166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수한은 방송국에서 나오기 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음악 방송 담당 PD를 떠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수한이어도 억울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예능국 국장에게 곧바로 간 것도 있었다.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될 갑질을 일부러 당할 필요는 없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감사해야 하나.’
덕분에 주변 상황을 잘 이용하게 되었다. 수한은 방송국에 가기 전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갔다. 이 일에는 수한의 넓은 인맥이 도움을 주었다. 굳이 방송국 사람이 아니어도 안의 사정을 아는 사람은 상당했다.
방송국에는 정규 채용된 PD도 있지만, 외주도 있었다.
[거기 난리 났던데요? 요즘 방송가에 퍼진 소문 들었죠?]
“네. 물론 들었죠.”
그 소문이 퍼지게 한 사람이 수한이라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S사가 가장 타격이 클걸요? 그 아이돌 그룹이 가장 많이 나오잖아요. 가면 분위기 잘 살펴봐야 할 거예요.]
“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 날 때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저야 김 대표님이 만나자고 하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생각이 있습니다.]
인맥으로 돌아가는 세계라 그런지 PD와 친한 외주 사람을 쿡 찌르니 알아서 답이 나왔다. 그래서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더불어 다른 일에는 몰라도 이런 일에는 쉽게 허리를 굽히고 싶지도 않아 국장을 먼저 찾았고, 결국 이야기는 잘 되었다.
수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 상황을 개척할 좋은 아이디어를 주는 거였다. 물론 수한이 아는 미래에서 S사에서 잘됐던 예능을 기억하고 말하는 거라 위험성도 크지 않았다.
“시청률을 잡으려는 거면 중년층이 좋아할 만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현대 시기에 맞물려서 몇 개의 아이디어를 던져 주니 예능국 국장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가 생각해도 재미있는 아이템이라 생각한 듯했다. 더불어 정부 정책과도 잘 맞아 정부로부터 돈도 잘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수한이 하니까 힘이 실렸다. 하는 것마다 잘되니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그럴듯하게 들리는 탓이었다. 더불어 수한이 케이블로 보낸 이태욱 PD가 잘 되는 모습을 보니 더 신뢰감이 생겼다.
수한은 담당 PD까지 이야기하려다가 그건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 나서면 선 넘는다고 심기가 불편해질 가능성이 컸다. 더불어 제작비를 지원해 줄 몇몇 곳을 더 알려 주니 국장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역시 돈이구나.’
아이디어도 좋지만, 역시 돈이 중요했다. 하긴 아이돌 예능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만든 이유도 결국은 돈이었다.
“제가 미리 말해 둘 테니 그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수한이 중간에서 힘써 준다는 이야기까지 하자 국장이 크게 기뻐했다. 하긴 수한이 나서면 투자 안 할 곳은 없었다. 그만큼 이쪽에서의 수한에 대한 평은 굉장히 좋았다.
수한은 중간에서 수고해 줘서 고맙다는 국장의 전화를 받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 네! 다음 주에 방송한다고요? 좋은 성과가 나오길 바랍니다.”
다행히 마약 사건이 제대로 터지기 전에 마약에 얽힌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종료했다. 그에 관해서 아이돌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이미 방송가에 퍼진 소문을 아는 사람들은 미리 손을 떼는 거라 잘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사건에서 마음이 상한 건 해당 아이돌 팬들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피해를 줬다며 아이돌 팬들이 열심히 방송사를 공격했지만, 그러한 상황 가운데 마약 기사가 터지는 바람에 그 노력이 헛되게 되었다.
장준환과 협상을 잘 본 탓에 강성 그룹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빠지고 엘 엔터테인먼트가 직격타를 맞게 되었다.
“요즘 엘 엔터 분위기는 어떤가요?”
“상갓집 분위기라고 하던데요?”
내부에 굳이 첩자를 심어 두지 않아도 관련된 이야기는 충분히 전해 들을 수 있기에 수한은 미소를 지었다.
“떨어질 만한 것들은 다 잘 주워 먹었으니 우리 할 일만 하면 되겠네요.”
“근데 진짜 엘 엔터 주식 안 먹게?”
“네. 투자할 가치가 없거든요.”
수한의 단호한 말에 성민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엔터 주식 사는 거 아니라고 해도 언제 또 탑 아이돌이 탄생할지 모르니 말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엘 엔터테인먼트인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다음 탑 아이돌은 우리 회사에서 나올 겁니다.”
“오. 자신감 좋네요. 대표님?”
“당연히 탑으로 만들 생각으로 키우는 거죠. 실장님은 다른 생각으로 키우는 겁니까?”
수한의 말에 성민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그 생각에 공감했다. 이왕 꿈을 꾸는 거 크게 꾸는 게 옳았다.
“그러니 우리는 기초부터 잘 쌓아야 합니다.”
“팬카페 또 만들 거예요?”
“아니요. 이번에는 팬클럽이요. 주혁 씨 때와는 다른 형태로 만들어야겠죠.”
제대로 아이돌 산업에 뛰어들 생각이기에 수한은 기초 공사부터 단단하게 쌓을 생각이었다. 훗날 중소 기획사의 나쁜 예로 기록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슬슬 데뷔 준비합시다.”
“좋아. 이미 준비 다 됐어.”
성민의 믿음직한 말에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블랙’의 방송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케이블과 협의해서 만드는 아이돌 방송 ‘블랙’도 빠르게 준비했다.
***
연습실에서 거의 사는 다섯 명의 연습생 윤지우, 이정원, 김민준, 이도현, 최건우는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적응이 안 되어 혼났다.
“카메라가 몇 대야?”
“10대는 넘는 것 같은데?”
카메라 앞에는 처음 서는 것이기에 도현은 눈동자가 저절로 흔들렸다. 데뷔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카메라가 눈앞에 있으니까 긴장이 되었다. 더불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섯 명을 둘러싸고 있어 어디에다가 시선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거 다 우리 찍는 거 맞지?”
“맞다니까.”
정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면서도 사실 몸이 바짝 굳은 상태였다. 솔직히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이돌 연습생 중에 데뷔를 꿈꾸며 연습하는 연습생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중에 데뷔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데뷔해도 잘되지 않아 가수의 길을 접는 사람도 많기에 이 상황이 꿈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내 볼 좀 꼬집어 봐.”
“알았어.”
볼을 꼬집자마자 강한 고통이 찾아왔다. 정원이 됐다고 화를 내자 건우가 미안하다며 뒤로 물러서면서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가장 어려서 그런지 가장 긴장을 안 한 게 느껴졌다.
‘아니지. 긴장해서 오히려 저러나?’
그런 것치고 수한을 가장 편하게 대하는 걸 보면 긴장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머릿속에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이런 건 대형 기획사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수한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다섯 명은 어색하게 몸을 풀다가 얼마 안 가서 들어오는 수한의 모습에 다들 차렷 자세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김수한입니다.”
촬영 온 스태프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수한을 보고는 다섯 명도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채고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열심히 인사했다.
처음에는 다섯 명에게 불쾌해했던 사람들도 바짝 굳은 다섯 명의 모습에 긴장해서 그랬거니 하고 넘어가 주었다. 무엇보다 수한이 먼저 한 사람, 한 사람 인사해 주는 것에서 마음이 먼저 풀렸다.
“옆 방에 여러분이 드실 만한 음식도 마련했으니 촬영하면서 틈틈이 드십시오.”
들어올 때부터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튼, 수한의 제대로 된 대접에 스태프들의 마음이 완전히 풀렸다.
수한은 먼저 어떤 식으로 촬영할 건지 설명을 듣고는 긴장한 다섯 명에게 설명해 주었다.
“근데 대표님. 너무 긴장되는데 어떻게 해요?”
“그 모습대로 촬영하는 것도 좋아요. 신인이잖아요.”
무엇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수한의 말 때문에 다섯 명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평소에도 방송에서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대해 계속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말대로만 하면 문제가 없었다.
“그럼 촬영 들어갈게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다시 긴장하는 게 보였지만, 촬영을 계속해서 진행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왔다. 수한은 그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보다가 옆에서 툭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성민이었다.
“이제 나머지 촬영은 제가 지켜볼 테니까 얼른 올라가서 업무 보세요. 쌓여 있는 서류가 많아요.”
“네. 알겠습니다.”
수한은 주변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한 뒤 위로 올라갔다. 성민이 왜 위로 올려 보낸 건지 알 수 있게 업무가 쌓여 있었다. 수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자신의 서명이 필요한 서류에는 지훈이 선물한 만년필을 들어 사인했다.
지훈의 마음이 들어간 펜이라서 그런지 손에 착착 감기는 게 마음에 들었다.
***
“음…….”
남일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요즘 마루 엔터테인먼트 관련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화를 삭이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성민의 말만 들으면 당장에라도 망했어야 할 회사인데 오히려 훨훨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혹시 이 실장님이 배신한 건 아닐까요?”
“또?”
“네. 한번 배신자는 두 번도 할 수 있죠.”
남일은 입안의 혀처럼 구는 명훈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 간신배처럼 구는 모습이 딱히 좋지는 않았다.
“이동현은 결국 안 온다는 건가?”
“아! 네. 일이 그렇게 됐어요.”
엠디 엔터테인먼트에는 결국 명훈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내는 성과를 보면 나쁘지는 않아 버릴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 엠디 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 ‘SSS급 슈퍼스타 시즌 7’에서 대활약 중이기 때문이다.
남일은 당연히 처음에 떨어질 줄 알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의외로 오래 살아남자 놀란 상태였다. 물론 주혁의 때에 비하면 화제성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탈락하지 않고 오히려 밀어주고 있는 형태이니 나쁘지 않았다.
“근데 김수한을 저대로 놔둘 거예요?”
“놔둬서는 안 되겠지.”
가수 관련이라면 나이수와 대화를 해서 틀어막아야 하는데 지금 나이수는 제집에 난 불을 수습하는 데 바빴다. 하긴 마약 사건이라면 제법 큰일이니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돌 회사인데 어떻게든 잘 해결되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일이 커지기만 하고 잠잠해지지 않아 남일도 찝찝해했다. 나이수라면 정치권에 손이 닿아있을 텐데 말이다. 누군가 뒤에서 힘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설마 장준환?’
하긴 이 정도로 계속해서 일을 만들려면 그 사람밖에 없기는 했다. 역시 장준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자는 말은 좋은 조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낭떠러지로 가는 지름길로 안내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장준환에 대한 원망이 커져서 그리 조언한 거였는데 역시 무엇이든 감정적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나까지 연관이 되기 전에 손을 놓는 게 좋겠군.’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손을 빼려고 했는데 장준환의 기세를 보니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손을 뺄 수 있을 때 최대한 빨리 빼는 게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남일은 좋은 생각이 났다.
나이수의 손을 놓으면서도 다시 장준환과 사이가 좋아지는 방법이 떠올랐다.
‘어차피 나는 말만 한 거니까.’
실제로 일을 실행한 건 나이수니 남일은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