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65화 (165/186)

165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수한은 도착하자마자 강성 그룹의 내부부터 봤다. 엘 엔터테인먼트가 대형 기획사이긴 했던 것 같다. 물론 건물 크기로 따지면 훨씬 컸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수한은 이번에는 성민을 데려오지 않고, 홀로 왔다. 저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예상이 안 되어서였다.

수한이 부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50대 이상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네. 앉으세요.”

수한이 자리에 앉자 무얼 마시고 싶냐는 말에 수한은 시원한 물을 달라고 했다. 이제는 이런 자리에 와도 긴장이 안 되어 수한이 차분히 부회장을 보자 부회장이 먼저 말을 건넸다.

“검찰에서 조사하기도 전에 마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예전에 관련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 그걸로 유추했습니다.”

그걸 먼저 물을 줄 알았기에 수한은 만들어 놓은 답을 내놓았다. 엘 엔터테인먼트 내부에서 소문이 돌았었다고 이야기하니 그 문제에 관해서는 됐다고 생각했는지 본론을 꺼냈다.

“장준환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장준환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막 나온 차가운 물을 마시자 부회장도 여유 있게 앞에 있는 차를 마셨다.

“글쎄요. 왜 제가 그분과 만남을 주선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바라는 거냐고 돌리지 않고 말하자 부회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습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얼른 말하라는 눈빛에서 수한은 조급함을 느꼈다. 이미 검찰 쪽에서 상당히 일이 진행된 듯싶었다.

“글쎄요. 지금은 바라는 게 딱히 없어서요.”

수한이 물을 마시며 한층 더 여유를 부리자 오만하게 내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장준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라는 낮게 보는 눈빛이라서 수한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마치 불가촉천민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신분 제도가 있는 시대가 아닌데도 말이다.

‘하지만 저 생각이 틀린 건 아니니까.’

장준환을 뒷배로 두고 있는 게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나갈 수는 없기에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은 보류로 하죠.”

“보류?”

“원하는 건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시기에 필요하다기보다는 나중에 필요할 것 같거든요.”

“좋아요. 그럼 이 건에 대해서는 서면으로 서로 기억해 두기로 하죠. 그래서 장준환 씨와 만나게 해 주는 겁니까?”

“네. 이미 이쪽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수한의 말에 부회장은 크게 안도했다. 강성이 뿌려 놓은 돈이 많기는 하나, 장준환이 뿌려 놓은 돈이 더 만만치 않은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수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긴 검찰도 움직이는 것 같던데.’

수한은 새삼 얼마나 큰 뒷배를 둔 건가 싶으면서도 나중에 장준환과 멀어지더라도 깔끔하게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가까이하기에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왜 강우형이 조심하라고 했는지도 알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

[잘 이야기되었어요.]

“그렇습니까?”

수한이 만남을 주선 한 자리가 잘 풀렸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장준환도 딱히 강성 그룹까지는 건드릴 생각이 없었는지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따로 이야기하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나중에 자체 콘텐츠를 제작하면 투자자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하긴 콘텐츠 제작 능력이 있으면 묵히지 말고 활용해야지.]

수한이 자신이 있는 만큼 장준환도 수한의 능력을 신뢰하는 듯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 말하여 수한은 새삼 안심했다.

[그럼 오늘도 고생해요. 다음에 시간 날 때 함께 식사하죠.]

“네. 알겠습니다.”

수한은 전화를 끊은 뒤 가볍게 목을 움직이며 피로를 풀었다. 확실히 장준환의 무서움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지금보다 더 회사를 키워야지.’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마쳤다는 ‘더 블랙’의 이야기에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 그런지 얼마나 날뛰는지 며칠 새서 찍었는데도 팔짝거린다고 한다.

‘나도 어릴 때 그랬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수한이 들어오라고 말하니 눈 그늘이 턱까지 내려오는 성민이 보였다. 얼마 전에 ‘더 블랙’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다녀왔다고 듣긴 했는데 저리 피곤해할 줄 몰랐기에 수한도 놀랐다.

“이건 나이와 상관없이 피곤한 거겠죠?”

“자존심 상하지만, 상관이 있는 것 같다. 그보다 이건 뭐냐?”

성민이 들고 있는 홍삼에 수한이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주문한 게 오늘 도착한 모양이다.

“다들 피곤해하시는 것 같아서 주문했습니다. 쫙 돌려 주세요.”

“그럴 것 같아서 이미 하나 먹었어.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회사 복지가 좋아서 계속 다닌다.”

이미 몇 개 챙긴 모양인지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들렸다. 성민의 표정을 보니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거 보니까 예진이가 생각나네. 너하고 재원이만 챙겨 줘서 섭섭했었는데.”

“제 거 뺏어 먹은 것도 기억나요?”

“내가 그날 먹고 엄청 후회했잖아. 엄청 맛없어서.”

그 말을 하니 그 더럽게 쓰던 홍삼 맛이 떠올랐다. 근데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수한도 그 맛이 지금까지 떠올라서 소름이 돋긴 했다. 그래도 쓴 만큼 효과가 있기는 했다.

“실장님. 은근 어린이 입맛이에요.”

“그럼 너는 다른 줄 알고?”

수한도 찔려서 웃기만 했다. 아직도 단 커피만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성민이 눈앞에서 홍삼을 쭉 마시는 걸 보니 흐뭇했다. 지훈의 때와 다르게 반대로 자신이 효도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부모님께도 홍삼 몇 상자를 이미 보내서 왜 이렇게 많이 보냈냐고 한 소리 들었다.

“공중파와는 이야기가 잘 됐나요?”

‘더 블랙’의 데뷔 시기를 정하기는 했으나, 공중파 방송과도 이야기가 잘 되긴 해야 했다. 아무리 케이블이 요즘 잘나간다고 해도 음악 방송은 공중파가 우세했다. 특히 일요일 낮에 하는 음악 방송이 중요했다. 채널을 돌리다가 심심해서 보게 된 경우가 많기에 공중파 진출은 필수였다.

그런데 공중파 이야기를 하니 성민이 곤란해하는 게 보였다. 그래서 수한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긴장하게 되었다.

“사실 거기가 문제야.”

“네?”

“네가 케이블과 친하게 지내는 거 다 알잖아. 그러니까 잘 받아 주지 않더라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했는데도 기억 못 하더라. 대놓고 갑질하겠다는 거지.”

수한은 종종 인간의 욕심이 끝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공중파 방송국에 잘한 게 얼마인데 케이블과 손을 잡았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니 말이다.

“특히 이태욱 PD 데려간 건에 대해서 말이 많이 나오더라.”

수한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이태욱 PD에 관해서 말하자면 수한이 할 말이 더 많았다. 시청률 안 나온다고 패대기쳤던 건 전혀 기억이 안 나나 보다.

“여기가 원래 그래. 알잖아.”

“네. 알긴 하죠.”

홍삼을 먹지도 않았는데 입안이 쓰게 느껴졌다. 이러면 결국 수한이 직접 방송국에 찾아가 봐야 했다. 성민이 가는 거로는 마음에 안 찰 게 뻔했다.

“그럼 제가 가 보겠습니다.”

“괜찮겠어?”

“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굽신거리는 건 잘합니다.”

수한의 말에 성민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사람이 남일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나나 싶었다. 하지만 캐스팅 디렉터 시절을 완전히 아는 것도 아니기에 성민은 수한에게 맡기기로 했다. 하긴 수한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해결하겠는가?

‘나는 드라마국 사람들이랑만 친해서 말이지.’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배우 전문 기획사였기에 성민이 나서려고 해도 나설 수가 없었다. 그저 수한이 이 일을 잘 처리해서 공중파와도 다시 사이좋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

공중파 방송 3사 중에 S사는 현재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다른 방송사보다 더 아이돌 친화 방송이었기 때문에 아이돌을 데리고 예능 프로그램을 많이 했다. 물론 그래서 시청률이 잘 나오는 편은 아니지만, S사는 그 이유로 아이돌을 데리고 예능을 하는 게 아니었다.

‘수출!’

한류가 대세이니 다른 나라에 팔아먹을 수가 있었다. 아무리 재미없어도 좋아하는 아이돌이 나오면 무조건 보는 맹목적인 아이돌 팬들의 특성을 노린 거라서 그들은 시청률이 안 나와도 적자가 나지 않는다는 좋은 명목 아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요새는 또 다른 여론이 형성되어 문제였다. 돈만 벌면 다냐, 그래도 방송국인데 시청률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터진 게 황경의 마약 사건이었다.

‘이걸 어쩌지?’

하필 방송가에 대놓고 떠도는 소문 중에 엘 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이 이 마약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문제였다. 엘 엔터테인먼트와 겨우겨우 협상해서 데려온 거였는데 마약 사건이 터지면 프로그램 몇 개는 망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대놓고 시청자들이 공격하기 시작하면 철판을 얼굴에 깐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특히나 방송 통신 위원회에서 제대로 압박한다면 아무리 S사라고 해도 버티기 힘들었다.

“어떻게 하죠?”

그렇다면 일이 터지기 전에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 해서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이 현장에서 여유가 있는 건 음악 방송 담당 PD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예능국에 갑자기 등장한 한 사람에 모두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하필 이 시기에 와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또 누굴 빼가려는 거냐와 그게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케이블 대접이 좋다는 소문이 이미 한 바퀴 돌았기 때문이다.

수한이 가자고 하면 따라갈 인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한은 그 시선들에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예능국 국장님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요.”

음악 방송 담당 PD는 이미 마루 엔터테인먼트와 몇 번이나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을 찾을 줄 알았기에 놀랐다. 갑자기 국장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국장님께 연락 한번 할게요. 하지만 만나지는 않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천천히 기다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분위기 안 좋은데 수한이 앉아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분위기가 더 안 좋아졌다. 수한도 그걸 알면서 온 것이기에 딱히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국장실로 안내하라는 이야기에 모두가 놀란 반응을 보였다. 수한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걸음을 옮겼다.

“뭐야? 뭔데?”

수한이 사라지고 나자 수많은 말이 나왔다. 특히나 황당해하는 건 음악 방송 담당 PD였다. 안 그래도 수한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갑질을 조금 하려고 했더니 이런 등장은 너무 뜬금없었다.

“박 PD! 국장님이 오래!”

“갑자기?”

음악 방송 담당 PD는 국장의 호출에 어리둥절하며 국장실로 갔다가 웃으면서 반기는 수한을 발견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국장의 반응이었다.

“이번에 마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신인 그룹을 낸다고 하는군. 촬영하는 데 어려움 느끼지 않도록 잘해 줘.”

“네? 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갑질을 하고 싶어도 이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대체 국장님을 어떻게 구워삶아 먹은 거지?’

갑질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끝나서 음악 방송 담당 PD는 억울한 감정이 없지 않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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