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한은 나이수의 전화를 받고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수한은 장준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준환이 수한에게 맡긴 건 새로운 아이돌을 키워 내는 것이라서 수한은 이에 관해 장준환에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수한의 이야기를 들은 장준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은 거절하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이라면 나중에는 거절하지 말라는 거네요?”
[네. 제가 재미있는 건수를 하나 잡았거든요. 그걸 터트린 후에 도와줘도 늦지 않죠.]
뭔지는 몰라도 엘 엔터테인먼트를 논란에 휩싸이게 할 만한 사건임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다가 수한은 그 건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마약 사건.’
수한은 맞춰지는 퍼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그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엘 엔터테인먼트 출신인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마약이요?”
“네.”
수한의 물음에 직원들끼리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이야기는 엘 엔터테인먼트 내에서도 암암리에 도는 것이라 수한이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서였다. 동시에 이들은 수한의 정보력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강우형 이사님이 달리 탐내던 게 아니었어.’
‘그 안에도 따로 첩자가 있나?’
“그래서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마약 하는 아이돌이 있다고 보시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가 돈 적은 있어요.”
“어떤 식으로요?”
그러니까 일본 투어를 돌면서 생긴 문제라고 한다. 파파라치가 붙으면서 무슨 사진을 큰돈을 들여 샀다고 하는데 여자 문제라기보다는 다른 문제가 얽힌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여자 문제로는 그렇게 큰돈을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그동안 만나 온 여자들이 많았거든요.”
“그 문제는 나이수 회장님이 직접 처리하신 거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강우형 이사님은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따로 조사하지는 않았어요.”
하긴 인기 아이돌이니 여러 여자를 만나고 다닐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다닌 것 같고. 하지만 워낙 그러고 다니는 남자 아이돌이 많아서 여자 문제로는 괴팍한 성 취향이 있지 않은 이상은 그렇게 큰돈을 요구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약은 왜요?”
“만약 마약 사건이 터진다면 우리가 이득 볼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서요.”
이왕 무너지는 거 거기서 떨어지는 물건 정도는 주워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불러들였다. 물론 이에 관해서는 장준환도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말하면 허락할 것이다.
“주식?”
“아니요. 주식은 말고요. 엔터 사 주식만큼 불안전한 것은 없잖아요.”
수한이 큰돈을 굴리며 이곳, 저곳에 투자하기는 했지만, 엘 엔터테인먼트는 그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다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수한의 투자 수완에 대해서 들은 게 많기 때문이다. 그런 수한이 전혀 건드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히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말은 이제 엘 엔터테인먼트가 투자할 만한 가치도 없는 회사라는 거 아닌가?
그중 용기 있는 직원이 수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엘 엔터테인먼트가 망할 거라 생각하세요?”
“네.”
수한의 단호한 대답에 술렁이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곧 그 분위기도 정리되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몸을 담그긴 했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에는 마루 엔터테인먼트가 있었다.
‘대표 이사님도 없는데 차라리 망하는 게 낫지.’
복수하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는 나이수가 강우형의 죽음에 관여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그를 자세히 파고들지는 않았다. 만약 그들이 생각한 대로 나이수가 관련된 게 맞는다면 자신의 안위가 굉장히 위험해질 테니 말이다.
“그럼 주식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정보를 팔고 거래를 하는 수도 있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약 사건에 어떤 가수가 얽혀 있는지 알고 있기에 나온 제안이었다. 인기 아이돌이니 여러 가지로 얽힌 곳이 많을 것이다. 정보를 미리 주고, 이익을 취할 곳은 취하자는 거였다.
“네. 그리고 또요?”
“그중에서도 솔로로서 미래를 기대해도 되는 가수도 있을 겁니다.”
“그들을 빼 오자고요?”
“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마약 이미지를 소속사가 같다는 이유로 함께 뒤집어쓸 수 없으니 길을 터 주는 것도 방법이었다.
“좋아요. 그럼 오늘 나눈 것에 대해서는 서로 함구하고, 여기서 말한 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대표님.”
수한의 시원한 발언에 다들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이번이 자신들을 쫓아낸 엘 엔터테인먼트에 복수할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의욕이 저절로 솟아올랐다.
***
명훈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케이블 방송국에 나왔다. 얼마 전에 동현과 싸웠기 때문이다.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로 들어간 사실을 뒤늦게 안 동현은 흥분해서 명훈에게 따져 들었다.
“그렇게 네 마음대로 할 거면 왜 나와 회사를 차린 거야?”
“이게 다 회사를 위한 일이라니까요.”
“차라리 조금만 더 버티자고 하지. 돈 나올 곳이 있었는데. 됐다. 너와 무슨 말을 하겠냐.”
“네?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명훈이 흥분해서 동현을 붙들려고 했지만, 동현은 이미 포기한 눈빛이었다. 이미 가온과 합병을 하게 되었는데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가온과 손을 잡은 건 좋은데 거기서 나는 빼 줘라.”
동현은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명훈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동현을 잡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은 못 할망정 누가 누구에게 뭐라 한단 말인가? 명훈으로서도 최선을 다한 것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기분이 저조한 상태에서 온 케이블 방송국은 지상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되게 좁네.’
공중파만 해도 달리 공중파가 아니라서 그런지 건물을 두 개 이상은 두고 넓게 사용했다. 그에 비해 케이블 방송국은 멀리서 보면 그냥 회사 건물이었다.
“우리 잘하자.”
“네!”
연습생 중에서도 그나마 괜찮은 남자애를 하나 데려왔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안목만큼은 믿는 명훈이기에 부디 여기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1등까지는 아니어도 계속 꾸준히 방송에 얼굴을 들이 내밀기만 하면 인지도가 어느 정도 생기니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 보았다.
“안녕하세요. 엠디 엔터테인먼트의 최명훈입니다.”
명훈은 스태프들을 지나 곧장 이재성 PD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이재성 PD는 당연히 처음 들어 보는 기획사 이름이기에 인상을 구기며 명훈을 보았다. 명훈도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은 아니기에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엠디 엔터테인먼트는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입니다.”
“아…….”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재성 PD도 생각이 났다. 이번에 가온에서도 연습생을 내보낼 테니 잘 써먹어 보라는 윗선의 명령이 있었다. 더불어 가온에서 직접 조작 소문을 퍼뜨린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윗선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이재성 PD는 미소를 지으며 명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메인 프로듀서 이재성입니다.”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리 와. 어서 인사해야지.”
출연자와는 개인적으로 인사하지 않지만, 이재성 PD는 기꺼이 받아 주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현장을 설명해 주었다. 명훈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재성 PD의 친절에 어리둥절했다.
‘뭐지?’
무언가 꺼림칙하기는 한데 잘해 주니 싫지는 않았다. 이름이 없는 곳에는 워낙 까칠한 곳이 이 방송계라 명훈은 이상하다고 생각은 계속했지만, 그래도 친절을 베푸니 기분은 좋았다.
“그럼 대기실로 가서 촬영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명훈이 데려온 연습생과 함께 사라지자 이재성 PD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조작 프로그램이라고 직접 소문을 냈더라.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이재성 PD는 가온에서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기에 더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정작 도움을 요청한 수한은 무응답인데 말이다. 가온과도 무언가 거래가 있었으니 저렇게 내보낸 게 아닌가 싶었다. 이왕 조작 프로그램에 들어온 거 제대로 발을 담그게 하자는 게 윗선의 뜻이었다.
‘뭐, 나는 윗선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니까.’
안 그래도 예능 쪽에서 요즘 밀리고 있으므로 위에서 내리는 명령이라도 잘 따라야 했다. 그래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테니.
***
예진은 촬영 현장이 마음에 들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드라마 촬영 현장이었다. 이광무 감독 이전에는 늘 적자에 쪼들리는 촬영 현장에만 있었기에 훈훈한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자본의 힘이 크긴 하네.’
성실하게 대본을 먼저 준 유지아 작가 덕분에 예진은 대사를 다 외운 채로 현장에 도착했다. 솔직히 캐릭터는 따로 분석할 필요도 없이 예진과 성격이 비슷해서 예진은 자기 자신을 조금만 드러내기로 했다.
그보다 촬영 현장이 즐거운 가운데서도 술렁이는 건 수한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요즘 잘나가는 마루 엔터테인먼트라서 그런지 수한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연기자들이 많았다.
예진은 이미 수한이 제안을 먼저 한 사람이라 수한에게 딱히 들이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니, 들이댄다고 해도 다른 방향이었다.
“근데 왜 오는 거래?”
“유지아 작가님이랑 친분이 있대.”
“그리고 성예진 배우님 예전 매니저였대.”
남일이 위기감을 느끼는 이유가 이런 거 때문이었다. 이미 밖에서도 예진이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가지 않을까 말이 나오는 중이었다. 물론 예진은 당연히 넘어갈 것이기에 할 말이 없었지만, 남일은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진에게는 잘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 유지아 작가님도 오시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그 말대로 얼마 안 가서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그 안에서 내리는 유지아 작가가 보였다. 그 옆에는 남의 촬영 현장을 훔쳐보기 위해 따라온 유지영도 함께 있었다.
유지영이 제작하는 영화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도 있는 예진이라서 예진이 웬일로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자 유지영도 당황했다.
“네! 안녕하세요.”
워낙 까칠하기로 유명한 예진이라서 예진이 먼저 다가오자 두 자매가 동시에 당황했다. 그러나 유지아 작가와 다르게 유지영은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반가워요.”
“최근에 개봉한 영화 잘 봤습니다.”
“저야말로 잘 봤어요. 연기 너무 잘하시던데요.”
“더 열심히 해야죠.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기 전에요.”
“네. 이미 서이나라는 연기력 좋은 후배가 올라가는 중이니 열심히 하셔야 할 겁니다.”
누가 운전을 그렇게 잘하나 했더니 운전석에서 수한이 내렸다. 한 회사의 대표가 운전기사 노릇이라니 어떻게 보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예진은 수한이라서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이힐’ 때와 다르게 오늘은 편한 복장이었지만, 그게 오늘 수한이 카메오로 출연할 역할이라 예진은 수한에게 다가가 어깨에 묻은 먼지만 털어 주었다.
그 모습이 왠지 다정하게 보여 현장을 지켜보던 재원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