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오랜만에 보는 예진은 전에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예진의 외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새 기획사 차렸다며.”
만나자마자 대본 이야기부터 할 줄 알았기에 수한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개업식 날 예진이 오지 않았던 게 떠올라서 미소를 지었다.
“네. 덕분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일을 아직도 하네?”
예진이 대본을 대충 보는 시늉을 했지만, 수한은 그녀의 성격이라면 다 읽고 왔을 거라 확신했다.
“네. 이 작품을 보자마자 이건 예진 씨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듣고 싶었던 내용이 아니었는지 예진은 흥미 잃은 얼굴을 했다. 그래서 수한은 예진이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기로 했다.
“그를 핑계로 예진 씨도 보고 싶었고요.”
그 말에 귀가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역시 감정에 솔직한 건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예진은 크흠 기침 소리를 내며 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을 가져다 달라는 뜻이었다. 재원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순순히 차가운 물을 따라서 예진에게 건네주었다.
“근데 이 작가 이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유지아 작가입니다. 예전에 시은 씨와 드라마를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아…….”
기억이 났다. 시은이 하도 보라고 달라붙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작품이었다. 지금은 예전보다 뜸하게 보긴 하지만, 그때는 예능 프로그램을 함께 했기에 달라붙는 시은을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게 되었는데 시은의 연기에 예진은 또 한 번 자극을 받았다. 시은과 비교하면 연기력이 너무 떨어진다는 걸 그 드라마를 통해 더 크게 알게 되었다.
“어쩐지 재미있더라.”
“어떠십니까?”
당연히 할 거지? 하는 얼굴이라 예진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 하기로 작정하고 온 상태였다. 드라마가 허접했으면 아무리 수한이 들고 온 거라 해도 거절했을 테지만, 과연 보는 눈이 좋았다.
“가온에서 나오기 전에는 드라마 안 하려고 했는데…….”
예진의 말에 놀란 건 수한만이 아니었다. 재원도 마찬가지로 놀랐다. 재원은 그런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들었기에 배신에 찬 얼굴로 예진을 보았다.
“예진아.”
“걱정하지 마. 나 나갈 때 오빠도 같이 데리고 나갈 거니까.”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에 재원은 놀랐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웃었다. 예진이 저렇게 말하니 믿음이 확 갔다.
“그렇다고 네 회사 갈 거라고는 말 안 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수한의 눈치를 보는 건 틀림이 없어서 수한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안 그래도 예진을 어떻게 데려올까 고민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수한이 재원을 쳐다보자 재원은 마음에 안 들어 한 것 같으면서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성민이 있으니 솔직히 이직하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성민에게 듣기로도 월급이 나쁜 편은 아니었고.
“나중에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든가. 그럼 이제 서 대표를 어떻게 설득할 건데?”
예진은 그렇다 쳐도 문제는 남일이었다. 주변에 무관심해 보여도 요새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고 있는 예진이다. 자신이 이 작품을 하고 싶어 해도 쉽게 할 수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예진 씨는 예진 씨가 해야 할 일만 잘해 주시면 됩니다.”
믿는다는 수한의 신뢰감이 가득한 눈빛에 예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쑥스러워했다. 수한에게 제대로 연기자로 인정받는 것 같아서 솔직히 기뻤다. 하지만 옆에 있는 재원 때문에 다시 인상을 구겨야 했다.
마치 커플 사이에 낀 솔로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혐오하는 얼굴이 혐오스러워진 예진은 수한이고, 뭐고 상관없이 두 사람 다 집에서 쫓아냈다.
수한은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앞으로 조심하라는 듯이 경고하는 재원을 보고 불만을 표하지 않기로 했다.
***
김기해 국장은 요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큰돈 주고 데려온 정지원 작가의 작품이 그야말로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평균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최고 시청률이었다.
한때 예능국에 밀려 얼마나 눈치를 봤던가. 예능만큼 돈을 주지도 않으면서 성과 타령만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해진 돈 안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나, 위에서는 그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번은 마지막 기회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기회가 대박을 쳤으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그 가운데 걸려 온 수한의 전화는 김기해 국장을 들뜨게 했다. 수한이 정지원 작가를 데려오겠다고 처음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이러한 성공은 기대하지 않았다.
수한이 예능국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이재성 PD와 친한 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김기해 국장은 수한이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당장에라도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만큼 이재성 PD와 김기해 국장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인제 보니 복덩이가 제 발로 굴러온 거였다.
‘이번에는 유지아 작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나?’
수한이 물어온 작가는 정지원 작가뿐만이 아니었다. 유지아 작가도 있었다. 정지원 작가만큼은 아니어도 다수의 성공작을 가진 작가가 유지아 작가였다. 물론 그중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작품도 있긴 하지만, 평균치는 해냈기에 공중파에서도 유지아 작가는 반기는 인사였다.
[지금 찾아가려고 하는데 방송국에 계시는지 알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바깥에 있다고 해도 당장 들어갈 생각이었다. 김기해 국장이 어서 오라고 대답하자 얼마 안 가서 수한이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잘생기긴 잘생겼군.’
기획사 대표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 게다가 화면발을 잘 받는 것도 커서 연예인을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정지원 작가가 카메오로 섭외한 건가?’
김기해 국장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수한의 이름을 보았다. 수한은 그를 이용하여 인터뷰까지 하여 마루 엔터테인먼트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가만 보면 젊은 나이인데도 사업적 감각이 있는 친구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마침 시간이 있었습니다.”
뭐 마시고 싶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수한은 오히려 사 온 음료를 김기해 국장에게 주었다. 확실히 젊어서 그런지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아는 친구다.
마루 엔터테인먼트가 왜 신생 기획사인데도 업계에서 이름이 들리고 있는지는 수한의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음료도 싸구려로 파는 게 아니고, 이름 있는 비싼 음료라 김기해 국장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유지아 작가님의 작품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작가님께서 그전에 쓰던 걸 엎고 새로 썼다고 합니다.”
그 말에 김기해 국장은 살짝 당황했다. 솔직히 2화 대본까지 보고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진행하자고 한 거였다. 그런데 대본이 바뀌었다니 괜찮을까 싶었다.
“물론 크게 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변동 사항에 관해서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수한의 가방에서 나오는 대본에 김기해 국장은 일단은 자리에서 읽어 보기로 했다. 정지원 작가의 드라마 다음으로 바로 나올 드라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대작이었기에 그 기대감을 못 채울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다. 기대와 두려움은 늘 공존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수한의 자신감에 찬 모습에 김기해 국장은 곧 그 자신감의 근원을 찾아냈다. 이전 대본보다 새로 나온 대본이 더 재미있고, 참신했다. 특히나 바뀐 여자 주인공의 성격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사실 제가 여기로 찾아온 이유는 바뀐 대본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유지아 작가님과 이야기해 본 결과 여자 주인공으로 성예진 씨를 쓰고 싶습니다.”
성예진이라면 이광무 감독의 영화로 인해 충무로에서 더 주목받게 된 여배우였다. 아니, 충무로는 둘째 쳐도 탑 배우라서 예진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어느 정도 화제성은 보장되었다. 김기해 국장은 당연히 좋다고 이야기하려다가 금세 예진의 소속사를 떠올리고는 당황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
“네. 맞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왜 수한이 직접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온 사안이 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제작에 있어 가온 엔터테인먼트와 연관된 자는 제외할 것. 남일이 뿌려 놓은 씨앗이었다. 물론 대작이라는 조건 아래 허락이 떨어지긴 했지만, 대작이라고 하기에는 유지아 작가의 작품이 정지원 작가만큼의 임팩트가 있지는 않았다.
“굳이 성예진이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요? 이번에 서이나만 해도 라이징인데 연기를 잘했으니 다른 연기 잘하는 배우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내린 지시를 김기해 국장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위쪽에 잘 보일 기회이니 말이다.
“국장님께서 보시기에 이 드라마의 미래가 어떨 것 같습니까?”
“물론 적당히 흥행은 하겠지마는…….”
“저는 하이힐보다 평균 시청률이 더 높을 거라 확신합니다.”
최고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평균 시청률도 중요하기는 했다. 김기해 국장은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수한의 모습에 의문을 가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재미있는 건 수한이 이렇게까지 해서 성공시키지 못한 작품은 없다는 거다.
수한이 캐스팅 디렉터로서 괜히 3년간 활동한 게 아니었다. 기획사 운영까지는 모르겠지만, 이쪽 분야에서는 미다스의 눈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었기에 김기해 국장도 흔들렸다. 솔직히 지금까지 쌓아 온 명성이 아니었다면 수한도 이렇게 근거 없이 김기해 국장을 설득하지 않았을 거다.
‘하긴 손대는 거마다 망하는 엘 엔터테인먼트도 이 사람이 손대니까 잠깐이나마 살아나긴 했지.’
수한이 손을 떼기가 무섭게 망했다는 소식은 업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김기해 국장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수한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 김기해 국장을 보며 수한은 여유 있게 웃었다.
‘아직은 자본의 힘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
나이수만큼의 삽질만 안 해도 길게 보면 결국, 케이블 방송국이 돈을 잡아먹게 되어있었다. 김기해 국장이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게 수한에게는 다행이었다. 수한은 이 순간을 잘 이용해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남일인데…….
‘서남일 그 사람은 이 실장님이 알아서 요리해 주기로 했으니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성민에게 맡기기로 했다. 수한은 이야기가 잘 된 것 같아서 김기해 국장과 악수를 하고 케이블 방송국에서 나왔다. 솔직히 유지아 작가와 예진에 관해서 이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수한은 앞을 길게 보기로 했다.
‘나중에 우리 회사에서도 자체 콘텐츠를 만들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이수가 꿈꾸던 것을 수한이라고는 안 꿀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었다. 당장은 회사를 키우는 데 바빴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예능국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케이블 방송국에 출연할 필요가 없지만, 어디든 얼굴을 내미는 게 수한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 방송국에는 막 소속을 옮겨 온 유명 PD가 있었다. 한때 동물 예능 프로그램으로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그 PD가 4년 사이에 거물급이 되어서 케이블 방송국으로 막 소속을 옮겼다.
“이태욱 PD님!”
수한의 외침에 옛날과 다르게 얼굴이 쫙 핀 이태욱 PD가 반갑게 새로운 자리에서 수한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