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수한은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환영하는 동료들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카메오로 잠깐 나왔을 뿐인데도 검색어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수한은 TV 화면에서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보고 쑥스러워졌다. 전과 마찬가지로 화면발을 잘 받는 모양인지 잘생기게 화면에 잡혔다.
요즘 개성파 남자 연예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오랜만에 잘생긴 사람 한 명 나왔다고 반응이 커서 수한도 당황스러웠다.
“이러다가 우리 대표님, 연예인 하겠어.”
성민이 먼저 치고 나오자 다들 오- 소리 내면서 수한을 놀리는 일에 합류했다. 수한은 화면까지 캡처해 주는 정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표실로 가서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들 장난기가 많은지 수한이 나온 장면을 메시지로 보내서 수한은 난감해했다.
‘아휴.’
이래서 방송 출연을 하면 좋기도 하면서도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수한이 누구인지 홍보하게 되어서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서영 기자에게 인터뷰 요청도 들어와서 수한은 기꺼이 인터뷰하기로 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를 홍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보다 수한은 서이나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이나에게 들어오는 인터뷰도 많았고, 예능 및 드라마 섭외 연락도 많았다.
서이나는 ‘하이힐’에서 주인공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해 냈다. ‘하이힐’은 정지원 작가답지 않게 주변 인물들을 세세하게 그려 내서 높은 시청률과 별개로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 안에서 서이나가 중심을 잘 잡아 주니 드라마가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서이나를 섭외하고 싶어 하는 곳이 많았지만, 수한은 이에 관해서는 고민을 해야 했다. 서이나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능에 함부로 출연하게 할 수도 없고.’
수한은 처음에 만났던 서이나를 기억했다. 지금은 수한을 믿고 따르지만, 언제 어떻게 통통 튈지 모르는 게 그 나이대였다. 잘못해서 말실수라도 하게 되면 안티가 순식간에 붙을 게 뻔했다.
똑똑. 대표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고 하니 성민이 커피 두 잔을 들고서 나타났다. 성민에게는 첩자라는 역할도 맡겼기 때문에 수한은 그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서이나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 맞습니다.”
“서이나가 미성년자인 게 마음에 걸리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수한의 고민을 딱 알았는지 수한은 해답이 있느냐는 얼굴로 성민을 보았다. 솔직히 서이나의 경우가 특이하기는 했다. 보통 그 나이대면 아역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힐’을 통해 라이징 스타로 확 오르게 되었으니 인제 와서 아역을 하면 한 발짝 후퇴하는 느낌이다.
‘게다가 한번 아역으로 이미지를 잡으면 극복하는 게 힘들기도 하고.’
아역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일부러 성인 역을 무리하게 맡는 배우도 있다 보니 더 고민이 들었다. 원래 수한의 계획은 천천히 서이나를 스타로 성장시키는 거였는데 말이다.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이럴 때 느끼는 건 서이나가 아이돌로 데뷔했다면 어땠을까, 네요.”
“하지만 연기 쪽 재능이 더 뛰어난 건 어쩔 수 없는 문제니까요.”
수한은 성민이 준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수한을 이해한다는 듯이 함께 커피를 마시던 성민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원래 인생은 나무만 보는 게 아니라 숲을 보는 거라고 하죠. 대표님?”
수한이 무슨 뜻이냐고 성민을 보자 성민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수한은 자신도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는 게 아닌가 성민을 의심하다가 곧 깨달음을 얻었다. 한번 주연이 된 이상 그 위로 계속 치고 올라가야 한다.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일단 섭외 들어온 건 다 거절해야겠네요.”
“네. 그래야죠. 배우 일을 1년 하고 그만둘 게 아니면요.”
“근데 그런 말을 왜 굳이 빙- 돌려서 합니까. 이래 봬도 같은 편인데요.”
“저쪽 대표님을 겪으니 직설적으로 말하면 도리어 미움을 받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 봤습니다.”
워낙 남일과 함께한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남일과 비교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직설적으로 말할 때마다 화를 내는 남일을 4년간 봐 왔으니 이러한 반응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미리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저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걸 좋아하니 앞으로도 계속 직설적으로 말해 주십시오.”
“좋아요. 대표님. 화장실 온수가 안 나오던데 그것 좀 해결해 주시죠.”
“그건 제 소관이 아니니 다른 곳에 가서 말씀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장난스럽게 나가는 성민의 모습에 그래도 수한은 성민이 함께 일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명훈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이나의 다음 작품은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기로 했다.
가끔 활동해도 대박작만 내는 배우를 수한은 알고 있었다. 서이나를 그런 식으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서이나의 막 생겨난 팬들은 서이나가 소처럼 일하기를 바랄 테지만 말이다.
‘일단 소처럼 일하는 건 성인이 되고 나서.’
안 그래도 서이나가 미성년자인 것을 지적하는 기사도 있기에 수한은 더욱더 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서이나를 다른 곳에 출연시킨다면 그건 무조건 영화였다.
‘유지영 대표와 신뢰를 잘 쌓아서 다행이네.’
유지영이 아니어도 다른 인맥이 많지만, 수한은 유지영이 제작하는 영화에 서이나를 넣고 싶었다. 영화계 사정을 알다 보니 서이나를 위해서도 그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유지아 작가가 보내 준 대본을 보았다. 어젯밤에 급하게 전화를 하고 나서 받은 대본은 과연 훌륭했다. 특히나 훌륭한 건 대본의 능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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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사전 - 대중성: S,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15%(20.5%), 성장 가능성: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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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새삼 ‘하이힐’의 평균 시청률을 떠올리게 되었다. 11%였다. 지금은 20%를 바라보는 시청률이지만, 초반 시청률 때문에 전체적인 평균은 낮았다. 시청률이 10%대로 확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건 10회부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지아 작가의 ‘로맨스 사전’이 평균 시청률이 더 높은 이유는 정지원 작가가 먼저 고정 시청자들을 잡아 줬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까지도 계산해 주는구나.’
수한은 이 능력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걸 자신이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대중적인 감은 있어도 이렇게 정확한 능력치까지는 파악하지 못하니 말이다.
어쨌거나 유지아 작가의 작품까지 제대로 성공하고 나면 케이블 방송국의 위상은 그야말로 변할 거라 생각했다. 그 공에는 수한의 지분도 있기에 수한은 현재 상황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대본 속 여자 주인공을 보자 누군가 한 명이 떠올랐다.
‘이거 딱 봐도 누굴 생각하고 쓴 건지 알 것 같은데…….’
수한은 대본을 읽자마자 떠오르는 성격과 태도에 미소를 지었다. 성예진, 그녀였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유지아 작가는 다음날 이광무 감독의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하지만 영화 속 예진의 캐릭터와 이 대본 속 캐릭터는 확연히 달랐다.
‘까칠하면서도 정이 많고 자기 사람이라 생각하면 다정해지는 게 딱 평소의 예진 씨지?’
직접 예진을 본 적이 없을 텐데도 예진의 성격을 대본에 그대로 녹여 버린 유지아 작가의 솜씨에 수한은 감탄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 성격이 그렇게 보인다는 거 아닌가?
‘내게 그 이야기를 해 줬다는 건 직접 캐스팅을 부탁하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예진을 데려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일이 예진의 일이라면 어떻게든 놔둔다고 해도 그게 수한과 엮인다면 태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컸다.
특히 유지아 작가는 수한과 친하기로 유명한 작가라서 말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남일이 케이블 방송국과 안 좋게 엮이게 되어서 케이블 방송국 측에서도 예진의 캐스팅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오는구나.’
하지만 수한이 봐도 이건 예진을 위한 대본이었다. 남일과의 관계를 뒤로해도 예진을 캐스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3년 동안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업을 해서 생긴 직업병이기도 했다.
‘머리를 굴려 봐야겠는데?’
일단은 예진의 허락을 받는 게 우선이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모두가 허락한다고 해도 예진이 허락하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성민에게 듣기로는 요즘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녀가 일하고 싶을지 의문이었다.
***
[예진아, 어디야?]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
예진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대충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원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매달렸지만, 예진은 백수의 삶을 즐기는 중이었다. 솔직히 이광무 감독의 영화를 찍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미국에서 인기가 많으면 뭐 해.’
예진에게 계속 집적대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해외 순방하는 것에 끼지 않았다. 그에 관해서 눈치 주는 영화 관계자가 있긴 했지만, 예진의 더러운 성격을 알기에 알아서 쭈그러들었다. 그리고 이광무 감독도 예진의 그런 사정을 알기에 너그러이 일정에서 빼 줘서 예진은 자유를 찾게 되었다.
‘막상 한번 쉬니까 일 같은 거 하고 싶지 않네.’
남일을 통해 여러 개의 작품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지만 예진은 남일의 뜻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성민이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온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나가기 전에 영화 한 편 찍고 나가야지.’
드라마를 찍는 것도 나쁘지는 않긴 하지만, 너무 바삐 움직이는 게 싫었다. 특히 영화처럼 시간 조절하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를 잘못 만나기라도 하면 개고생을 하니 말이다. 수한이 함께하던 시절 찍었던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면 그걸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수한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그쪽으로도 수한이 많은 도움을 주기는 했다.
‘새 기획사를 차렸다더니 얼굴 하나 보기 힘드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 예진은 앞에 있는 샴페인을 마셨다. 아무튼, 한다면 영화를 하고 싶었다. 물론 이광무 감독과 함께한 작품만큼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지도 않아서 독립 영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휴식을 하고 싶었다.
예진은 계속해서 연락하는 재원에 짜증을 내면서 핸드폰 전원을 끄려다가 막판에 온 전화에 흠칫했다. 수한에게서 온 전화였다.
‘갑자기 뭐야?’
예진은 당황스러웠지만, 오랜만에 하는 통화라 괜히 긴장하게 되었다. 예진이 전화를 받기가 무섭게 재원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곧 인상이 찌푸렸지만 말이다.
[예진아, 어디냐니까?]
“그보다 왜 김수한 핸드폰으로 전화한 건데?”
[그야…….]
옆에 수한이 있는 모양인지 정적이 흐르는 맞은편에 예진은 항복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전화한 건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이건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어. 그래.”
예진은 목을 가다듬었지만, 예쁜 목소리가 잘 나오지는 않았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보니 드라마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였다.
예진은 ‘터치’ 캐스팅 때가 떠오르면서 수한이 말하는 드라마에 관해 호기심이 생겼다. 특히나 예진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이라고 하니 생각이 많이 흔들렸다.
“알았어. 일단 대본부터 보내 봐. 생각 좀 해 보게.”
[네. 알겠습니다. 그보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통화만 하지 말고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든가.”
인제야 인사를 하는 수한의 모습에 예진은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좋기는 했다. 게다가 직접 찾아온다고 하니 예진은 그만 여기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조만간 드라마 하나 찍을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