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그럼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때와는 다른 느낌이라 수한은 살짝 긴장했다. 그러나 예전에 대학로 연극을 섰던 짬이 여기서 나왔다. 수한이 주어진 대사를 완벽하게 내뱉고 표정 연기까지 제대로 해내자 누구보다 정지원 작가가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현장의 몇몇 사람들도 수한이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자 너무 놀란 얼굴이었다.
“작가님. 절 너무 좋아하시네요.”
“아니,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요. 연극한 티가 여기서 나긴 하네요?”
수한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자 정지원 작가가 더 장난을 걸었다. 그러고는 촬영 현장 분위기를 살피더니 수한에게 신호를 주었다. 수한이 어디론가 전화를 거니 얼마 안 가서 밥차가 도착했다.
“사실 수한 씨 촬영 구경하러 온 것도 있지만, 다들 쉬엄쉬엄 먹으면서 하라고 온 것도 있어요.”
정지원 작가도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그녀가 돌린 밥차에 현장 분위기가 더욱더 좋아졌다. 수한은 다른 사람보다 서이나가 잘 챙겨 먹는지 확인하고는 계속해서 서이나의 상태를 살폈다.
“조금 이따가 서이나 씨를 위한 커피차도 올 테니 다들 맛있게 마시라고 먼저 권해 주십시오.”
“아!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나중에 빚을 돌려받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죠.”
수한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서이나도 곧 웃음을 보였다. 말은 빚쟁이라고 하지만, 하는 행동을 보면 오히려 수한이 빚을 진 사람 같았다. 그때 정지원 작가가 수한을 불렀다.
“우리 갈 건데 여기 더 있을 거예요?”
“아니요. 저도 들를 데가 있어서요.”
지훈의 새 앨범이 나오기 전에 주혁의 팬 미팅을 먼저 열게 되었다. 소극장으로 잡았다고 해도 다 찰까 염려했는데 다행히도 매진되었다. 오히려 너무 좁은 데로 잡은 거 아니냐고 욕을 먹는 중이라 기쁘기도 했다.
“좋은 일 있으세요?”
“네. 고주혁 씨 팬 미팅 좁은 데로 잡았다가 욕먹었거든요.”
“욕먹을 만했네요. 근데 고주혁 씨 여전히 노래 잘해요?”
“네. 여전히 잘합니다.”
수한은 잠깐 고민하는 듯한 정지원 작가의 표정에 무슨 고민을 하는지 깨닫고는 괜찮다는 듯이 웃었다.
“OST까지 들어가겠다고 하면 너무 양심 없습니다. 그건 고주혁 씨가 다시 인기를 얻었을 때 제안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김 대표님이 그렇게 말하는데 굳이 할 필요가 없겠죠.”
수한은 정지원 작가의 능력대로 돈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걸 빚으로 여기지 않았다. 정지원 작가는 그걸 빚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지원 작가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될 갑질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정지원 작가는 앞으로도 쭉 잘나갈 테니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수한이 그다음으로 간 장소는 지난번에 주혁과 함께 온 적이 있는 소극장이었다. 팬 미팅이 시작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벌써 많은 사람이 주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거 리허설 하는 소리 맞죠?”
“대박. 노래 여전히 잘하네요.”
“하긴 콘서트로 단련된 목인데 당연하죠. 저는 일본 콘서트까지 따라갔어요.”
“대박이네요.”
같은 팬인데도 서로 존대를 하는 걸 보면 신기했다. 팬카페에 만난 사이라도 되는 건가 싶어 수한은 새삼 팬 문화에 대해 신기해했다. 그러다가 수한은 자신을 보는 팬들을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다들 얼떨결에 인사는 하는데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 저 사람 소원 매니저였던 사람이에요.”
“어쩐지! 잘생겼더라!”
수한이 그리 많이 활동하지도 않았는데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라마에 출연하면 사람들이 알아볼 수도 있다는 정지원 작가의 말이 이로써 신빙성을 갖추게 되었다.
수한은 그 알아보는 시선에 민망하여 그 사람들을 지나쳐 소극장 앞을 지키고 있는 스태프들을 보았다. 채용 후에 한번 인사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그들은 수한을 알아보고는 단번에 소극장 안으로 들였다.
팬들이 짐작한 대로 주혁은 팬 미팅 리허설을 하는 중이었다. 리허설인데도 얼마나 목을 아끼지 않고 부르는지 보는 사람이 다 흥분되었다. 나름 스태프의 신분인데도 주혁을 보며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소극장이라 그런지 음향 시설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주혁은 제 가창력으로 그를 덮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연신 미소를 지었다. 주혁의 그 긍정적인 생각을 수한은 좋아했다.
“대표님! 촬영은 잘 하고 오셨어요?”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에 수한을 발견한 주혁이 조심성 없이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멀리서 주혁의 매니저가 한숨을 쉬었지만, 수한과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수한은 이러다가 다치지 않을까 싶어서 주혁에게 작은 경고라도 할까 하다가도 자신을 보며 웃는 주혁이 귀여워서 그러지 못했다. 가끔 주혁을 보면 자신의 남동생 같았다.
“오늘 열심히 하네요.”
“그럼요. 오랜만에 팬분들 뵙는 건데요.”
“덕분에 욕 좀 먹었습니다.”
“그러게 제가 넓은 곳으로 하자고 그랬잖아요.”
팬이 안 올까 봐 걱정했던 주혁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미 인터넷 반응도 다 본 모양인지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게 딱 전성기 시절의 주혁 같았다. 물론 수한은 제2의 전성기를 만들어낼 거라서 주혁의 자존감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경호에는 더 신경 썼으니 걱정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대표로서 이 정도 일은 신경 써야죠.”
수한은 완벽하게 팬으로만 가득 차 있을 공간을 떠올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주혁의 컨디션을 확인했으니 회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주혁의 팬 미팅 자리에 함께 있을까 고민도 했는데 팬 자리도 없는데 그 한 자리를 수한이 차지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공간이 더 커지면 생각해 봐야지.’
올림픽 공원에 있는 작은 홀 정도는 되어야 한 자리 차지해도 말이 안 나오지 않을까 했다. 수한은 즐거운 상상을 하며 걸어 나오다가 한 남자를 발견했다.
‘응?’
원래라면 주혁에게도 남자 팬이 있을 테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을 텐데 이상하게 눈에 띄었다. 수한은 남자를 따라가려다가 방송 촬영을 하고 오는 바람에 유난히 튀는 자신의 정장 차림을 발견했다. 그래서 겉옷을 벗은 뒤 주변 스태프에게 맡기고 남자를 재빠르게 따라갔다. 마침 남자는 통화 중이었는지 수한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네. 대표님. 오긴 왔는데 딱히 이상한 거 없어요. 네. 네. 말실수 같은 거 하면 잘 적어 뒀다가 나중에 퍼뜨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네. 녹음도 잘 하겠습니다. 녹음기도 따로 잘 챙겼어요.”
수한은 종종 남일이 쓸데없는 것에 집착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주혁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너무 자잘하게 덤벼와서 이건 싸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활동하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네. 좌석은 앞자리예요. 비싸게 파는 거 샀으니 좋은 자리일 거예요.”
남자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표를 꺼내 자기 자리를 확인했다. 수한은 뒤에서 남자의 자리를 확인하고는 조용히 뒤돌아서 스태프에게 돌아갔다. 확실히 비싸게 주고 산 표라 그런지 가운데 자리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현장 녹음할 거라고 하니 잘 살펴보고 퇴장시키길 바랍니다. 이왕이면 초반부쯤에 퇴장시켰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 사람이 퇴장하게 되면 매니지먼트부 실장님에게 이 소식을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아예 쫓아내야 하니 녹음기를 미리 뺏지는 않기로 했다. 녹음이 시작된 후에 잡아야 근거가 확실하니 말이다. 스태프들은 수한의 말을 잘 알아듣고는 알겠다며 초반부에 즉시 빼앗고, 쫓아내겠다고 했다.
원래는 이렇게 엄하게 하는 게 아니었으나, 수한은 중요한 시기인 만큼 흙탕물이 튀지 않기를 바랐다. 팬들에게 너무하다는 원성은 들을 수 있겠지만, 팬 미팅 자리이니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노래하는 건 따로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 주면 되니까.’
안 그래도 좋은 카메라를 준비해 둔 상태이니 그에 관한 걱정은 없었다. 수한은 이제 자신의 할 일이 끝났으니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한 회사의 대표이다 보니 캐스팅 디렉터 일을 할 때보다 더 일이 많았다.
돌아가서는 지훈의 앨범 컨셉에 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벌써 피곤해졌다. 그러나 수한의 걱정과 다르게 회의는 금세 끝나게 되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상해 봤는데요.”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이 잘 맞았는지 한 명이 한 의견을 꺼내면 누군가 좋다고 하면서 그 아이디어를 보완했다. 웬일로 수월하게 흘러가는 회의 내용에 수한이 의아하게 그들을 쳐다보자 멀리서 성민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 실장님이 한 거구나.’
역시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보니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탁월한 소질을 가졌다. 수한은 성민이 원하던 대로 회사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성민이 부대표 자리를 차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오면서 성민이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은 무슨 내용일지 짐작하기에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얼마 안 가서 돌아온 성민은 수한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명백한 원망이라서 수한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 내며 둘이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팀원들을 물러나게 했다.
“대표님. 저한테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알고 있습니다.”
수한의 담백한 말에 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수한이 일부러 성민에게 연락이 흘러가게 한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대표 자리에 앉으려면 수한처럼 더러운 물에 조금이라도 손을 담그기는 해야 했다.
“알겠어요. 하죠. 첩자.”
“부대표 자리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허 참.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진심 되게 생겼네요. 이러다가 망하면 김수한 알지?”
성민이 장난스럽게 목을 긋는 자세를 취하자 수한이 따라 웃었다. 어차피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 일이 더 확고하게 마음을 먹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뭐 어려운 걸 부탁하는 건 아닙니다.”
“알지. 저쪽에서 우리 쪽에 해를 끼칠 거를 미리 알아오면 되는 거 아니야?”
“네. 그겁니다. 저쪽에는 거짓 정보를 심어 주고요.”
“그거라면 내가 오히려 하고 싶네. 진짜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가온에서도 그렇게 이제까지 해 왔던 거겠지?”
“아마도요.”
이쪽으로 넘어오면 이런 꼴 안 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해서 성민은 환장할 노릇이었다. 가족이라서 참았던 건데 가족이라서 더 무서웠다. 이참에 남일의 민낯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감사하고 죄송하네요.”
“그럼 시간 날 때 그 이지훈이 데려갔다는 한정식집에 데려가 줘.”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지훈이 없이 우리가 또 회의는 어떻게 해? 최대한 본인이 원하는 것도 들어줘야지.”
수한은 알겠다며 힘내자고 성민을 다독였다. 수한도 처음 그 집 음식을 맛보았을 때 자꾸 자기 전에 생각 나서 미쳤으니 지훈도 비슷했을 거라 생각했다.
수한은 마지막으로 지훈이 녹음할 장소를 정한 뒤 주혁의 팬 미팅 관련된 반응을 보았다. 팬들의 반응은 거의 감동의 도가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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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고주혁한테만 충성 충성
ㄴ충성 충성22222
-오늘 편지 보고 나만 감동한 거 아니지? ㅜㅜㅜㅜㅜ
ㄴ오늘 오는 인원 장난 아니었을 텐데 일일이 손편지 쓰느라 힘들었을 듯ㅜㅜㅜㅜ
-노래 미쳤더라. 어떻게 실력이 갈수록 더 놀음?
ㄴ녹음 파일은 없는 거지?
ㄴ오늘 안 그래도 누가 녹음기 켰다가 끌려갔음 ㅇㅇ
ㄴ소속사에서 찍은 거 있다고 나중에 따로 홈페이지에 올릴 테니 그거 보라고 하더라ㅜ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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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후기에서도 이 이야기를 볼 줄 몰랐기에 웃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쯤 속이 뒤집혔을 남일을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