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오랜만에 만나는 장준환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강우형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테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수한 또한 오늘은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날이었다. 강우형과는 생각이 꽤 잘 통했고, 일할 때 호흡도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수한은 처음 빼고는 늘 그를 좋게 평가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 대표가 나서 줘야겠어요.”
“목표가 어디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수한을 이용하겠다고 했지만, 누굴 향해 저격하는지는 수한도 알지 못했다. 어차피 이용당할 거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알아야겠다.
“엘 엔터테인먼트.”
“역시 그렇습니까?”
수한은 엘 엔터테인먼트의 몰락을 이제야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 엘 엔터테인먼트가 그냥 망한 게 아니었다.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되니 씁쓸했다. 특히나 강우형과는 정이 든 사이여서 더 그랬다.
강우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걸 생각으로만 그쳤다. 솔직히 진짜로 그가 죽을지 몰랐기에 방심한 탓도 있었다.
“원래는 서 대표를 이용해 볼까도 했죠.”
하지만 장준환은 버린 패를 다시 줍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요즘 남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강우형이 사고 난 날 나이수와 만난 것도 그렇고, 나이수와 연을 만든 것도 그랬다. 모르긴 몰라도 강우형의 사고에 관여한 게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절 어떻게 이용할 겁니까?”
“김 대표. 아이돌을 키울 생각이 있다면서요?”
“아. 네.”
수한은 앞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이따가 장례식장에 가 봐야 하기에 지금 술을 마셔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수한과 다르게 장준환은 술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했다.
“그럼 제대로 키워 보는 거 어때요?”
수한은 장준환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고는 소름이 돋았다. 장준환이 남일을 택했다면 남일이 장준환에게서 들었을 말이었다. 수한은 자신이 남일의 자리를 완전히 가로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쓰게 웃었다.
‘역시 앞에서는 중소 기획사인 척한 거고, 뒤에서는 이런 식으로 투자를 받고 있었군.’
아닌 척 몸집을 불려 갔던 가온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가 막혔다. 가온이 달리 대형 기획사로 성장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수한이 그 역할을 가질 차례였다.
“투자할 테니 제대로 날뛰어 봐요.”
“네. 감사합니다.”
수한도 남일이 했던 것처럼 몸집을 크게 불릴 생각이었지만, 수한은 남일과는 다르게 갈 생각이었다. 투자한 만큼 돌려준다. 그걸 빚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게 수한의 생각이었다.
“그럼 여기서 일어나죠.”
“네. 장례식장에 가 봐야 하니까요.”
장준환은 누구보다 슬퍼하는 얼굴이 되었다. 주변에 사람을 많이 떠나보내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보낸 적은 없었다. 특히나 강우형은 장준환의 기대주였다. 훗날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 자리에 앉아 장준환을 누구보다 빛내 줄 인사였다. 그런 인사를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되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장례식장에서 뵙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가지 않을 거예요. 마지막 인사는 다른 것으로 하죠.”
그래도 장준환이 대단한 건 흔들리지 않고, 복수를 꿈꾼다는 거였다. 수한은 그 복수의 매개체가 되었지만, 수한 또한 이 일을 남의 일로만 볼 수 없었다.
‘언제 내가 당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21세기라 해서 이런 일이 적을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수한이 더 한참 살아갔던 미래도 그랬다. 더 은밀하게 사람을 죽이면 죽였지, 법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래에서도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었다.
수한은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안 그래도 장준환과 만나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온 상태였기에 그대로 가도 상관없었다.
한 대형 기획사의 대표 이사로서 강우형은 인복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운이 없는 편이었다. 누군가는 일개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표 이사까지 올라간 거면 운이 좋은 거라고 말했겠지만, 수한의 생각은 달랐다.
‘진짜 운이 좋았다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
장례식장은 유난히 조용했다. 사람이 많지만, 이토록 조용한 건 본 적이 없어서 수한은 조용히 고인을 향해 인사를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결말이 이럴 거라 예상해서 그런지 지나치게 울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허망하게 앞에 있는 사진을 볼 뿐이었다.
수한이 자리에 앉자 나이수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수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나이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인사를 받고는 강우형의 가족에게 인사를 했다. 돈으로 어떻게든 보상을 많이 한 건지 가족 중에는 나이수를 나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래서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구나.’
장준환의 말에 의하면 강우형을 죽인 건 나이수였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알릴 사람이 없으니 나이수는 강우형의 가족에게 그저 좋은 사람이 되었다. 수한은 얼마 안 가서 제 맞은편에 앉는 나이수를 황당하게 보았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낫겠지.”
나이수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수한과 다르게 나이수는 수한을 나쁘지 않게 보았다. 수한은 그게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나이수는 앞에 있는 육개장에 밥을 맛있게 말면서 말했다.
“기획사 차렸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나름대로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존대를 해서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나이수가 하는 말은 뻔한 말들이었다.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해라, 도와주겠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차현 씨한테 대본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확인했는지 모르겠네요.”
“아! 네. 아마도 확인했을 겁니다. 그런데 차현 씨가 이미 차기작을 선택하게 돼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차현의 성격은 분명 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침 수한이 준 대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게 딱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대본 중 하나로 차기작을 고르게 되었다.
“아! 그랬군요. 난 또 우리 사이가 안 좋게 끝나서 그게 영향이 갔을까 했지.”
“다 지난 일인데요.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서로 안 맞을 수도 있지, 그런 걸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 두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습니까?”
“역시 그렇죠?”
역시나 나이수는 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한은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수한의 그 행동과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나이수는 기분 좋게 육개장을 깨끗이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일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도록 하죠.”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한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나이수가 사라진 것을 보고는 싸늘하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의리는 있는 사람이라 수한은 이왕 밟아 주는 거 철저히 밟아 주기로 했다.
***
서이나는 촬영장마다 분위기가 다른 것에 신기했다. 영화 촬영장은 첫 시작이라서 다들 영차영차 하며 힘내는 분위기였고, ‘더 아이돌’ 드라마 촬영장은 꿈과 희망을 주는 드라마의 내용과 다르게 어두운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이 드라마가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나오는 현장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시청률이 상승하면서 확 달라졌다. 마지막 회 촬영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았기에 서이나는 이런 촬영 분위기만 계속된다면 드라마를 쭉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여기는…….’
처음부터 이토록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었다. 특히 스태프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제작비에 들어간 돈이 꽤 크다 보니 제작진 대우도 좋은 것이다. 서이나는 그것도 좋았지만, 다른 것보다 자신을 이끌어 줄 선배 배우들이 많은 게 좋았다.
“안녕하십니까!”
“우리 귀염둥이 왔어?”
‘더 아이돌’에서는 선배들보다는 또래와 연기를 많이 해서 서이나가 이끌어야 할 장면이 많았다. 하물며 남녀 주인공이 모두가 발연기로 유명했기에 더 서이나가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이나야. 저번에 대본 읽을 때 본 건데 여기서는 이렇게 연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서이나가 원탑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후배 위치에서 조언을 받는 게 많았다. 서이나는 선배들에게서도 연기를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다. 물론 서이나에게 배정된 연기 선생도 있긴 하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건 또 달랐다.
“그럼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하면 될까요?”
“그렇지.”
서이나는 특히나 자신을 예뻐하는 선배 배우들이 많아서 좋았다. 또래와 있는 것도 좋지만, 선배들에게 예쁨받는 게 더 좋았다.
“이나야. 지금 있는 소속사는 어때?”
서이나가 의문인 것은 은근 이런 질문들이 많이 들려온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대표인 수한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다.
‘대표님 별명이 미다스의 손이랬나?’
수한이 손대서 실패한 게 없어서 나온 별명이지만, 아직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관해서는 두고 보자는 평이 많았다. 소수의 연예인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해서 정보를 얻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므로 이런 식으로 서이나에게 와서 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서이나는 마루 엔터테인먼트가 첫 기획사이니 어디와 비교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되게 좋아요.”
서이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건물 구조에 관해 말했지만, 그로 인해 알 수 있는 건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시설이 좋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좋기는 했다. 이름난 기획사가 아니면 사무실만 달랑 있는 것도 많으니 말이다.
“대표님은 냉정한데 좋으신 분이에요. 그리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대요.”
서이나는 자신이 이렇게 언변이 딸린 사람인가 몇 번이나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말할 수 있었다. 안목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서이나의 말은 아주 조금의 도움만 될 정도였다. 그래서 다들 그러려니 넘기려던 찰나에 갑작스러운 서이나의 외침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대표님!”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은 수한이 촬영 현장에 나타났다. 이미 한번 본 적이 있으나,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젊음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갖춰 입고 와서 그런지 훈훈하면서도 잘생긴 느낌이 더 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정 작가님과 약속한 걸 지켜야 해서요.”
그 말에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정지원 작가가 보였다. 정지원 작가가 직접 촬영 현장에 방문할 줄 몰랐기에 다들 난리가 났다.
이미 대본만 봐도 대박이니 정지원 작가와 더 연을 이어 가고 싶어 하는 배우가 많았다. 차기작에서도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다. 서이나에게 잘해 주는 이유 중 하나에는 그도 있었다. 서이나의 경우 다른 작품의 인연으로 이 드라마의 주연을 맡게 된 거니까.
대중들은 몰라도 ‘더 아이돌’의 뒤에 정지원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업계 사람들이면 다 알았다. 그러니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했다.
“이번에는 안 잊고 넣어 주셨습니다.”
“김 대표님이 생각보다 바쁘셔서 일정에 맞춰 넣느라 힘들었다고요.”
제법 친근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배우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들의 안에서 수한의 가치가 한층 상승했다.
“와. 그러면 대표님도 나오는 거예요?”
“카메오입니다. 제가 출연해도 시청자들이 알지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한때 예능에 나와서 실시간 검색어에 뜬 적도 있으니 알아볼 사람들은 알아볼 거예요.”
수한의 한숨에 정지원 작가는 더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이번에 잘되면 배우 하라는데 수한은 절대 사절이었다. 저기서 이쪽을 보는 배우들의 시선만 봐도 배우의 길은 힘들면 힘들었지,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 연기력 A등급이 아까우니 해 봐야지.’
오랜만에 TV 출연이라 수한도 떨리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