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수한은 차현에게 왔다는 대본 중에서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냈다는 대본을 보았다. 수한은 나이수가 망하고 나서야 자신에게 손을 내민 사실을 알고는 웃음부터 나왔다. 당연히 거절이었다.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해 버리네.’
어떤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긴 이렇게 남의 눈치를 안 볼 위치에 나이수가 있기는 했다. 수한은 자신의 뒤에 장준환이 있다는 사실을 나이수가 모르는 걸까 생각하며 대본을 그대로 창고에 넣어 두기로 했다. 미련을 가지기에는 대단한 능력치를 가진 대본도 아니어서 미련이 없었다. 그리고 지훈이 준 파일 몇 개를 틀었다.
“좋네.”
감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볼 수 있었다. 수한은 이 정도면 이제 다시 앨범 준비를 해도 된다고 여겼다. 그 생각으로 성민을 찾아가려고 했더니 먼저 성민이 대표실을 방문했다.
“안 그래도 실장님 부르려고 했습니다.”
“하하! 제가 타이밍이 좀 좋습니다.”
수한은 웃다가 문득 성민의 말투가 달라진 것을 파악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공손해졌다. 그래서 의아하게 보니 성민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아무리 친해도 제가 대표님 대접을 제대로 해야 대표님 면이 살겠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그런 거로 제 면이 살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요?”
“제 능력을 보여 줘야 제 면이 살죠. 그래도 제 생각해 주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실장님.”
수한이 정중하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자 성민이 피식 웃었다. 이러니까 정말 수한이 한 회사의 대표라는 게 실감 났다.
“좋네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이지훈이 앨범 준비를 슬슬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들렀습니다.”
“저와 생각이 같네요. 안 그래도 지훈 씨가 최근에 작곡한 곡을 들었거든요. 예전의 감은 되찾았습니다. 이제 방향성을 잡고 앨범을 잡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오후에 회의 소집하겠습니다. 일정 괜찮으시죠?”
“네. 괜찮습니다.”
오전에 다녀올 곳들이 있지만, 괜찮았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회의 일정을 너무 빠르게 잡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성민이 바로 잡겠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미 수한이 주혁의 다음 타자로 지훈을 내보겠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말한 순간부터 그에 관한 준비를 성민이 시켰다. 그런 섬세한 부분은 수한이 할 수 없으므로 경력자인 성민이 했다.
“그럼 가서 말하겠습니다.”
“네. 그럼 저도 제 볼일 보고 오겠습니다.”
수한은 기획사 건물에 주차된 차를 끌고 나갔다. 가는 길에 차현의 집이 있기에 수한은 들러서 대본을 가져다주기로 했다. 수한이 선별해서 고른 대본들이라 차현이 원하는 역할을 고르기만 하면 됐다.
“대표님이 직접 수고하시네요.”
마침 유진과 함께 있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이 반갑게 수한을 맞이했다. 유지아 작가와 함께한 작품이 크게 성공했고, 그 이후로 좋은 대본이 꾸준히 들어와서 두 사람의 얼굴이 굉장히 밝았다.
“저도 같이 봐도 되나요?”
“어차피 저희 쪽에만 들어온 대본은 아닐 테니 보셔도 됩니다.”
차현의 얼른 읽고 싶어 하는 얼굴에 유진이 어서 가서 읽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차현이 신나서 대본을 읽는 동안 유진은 수한에게 차를 내주었다. 안 그래도 유진이라는 배우를 욕심내고 있는 수한이라서 이런 대화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
“차기작은 어떻습니까?”
“고민하고 있어요. 확실히 작품이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크네요.”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건 역시 배우였다. 수한이 웃으면서 유진을 보자 유진은 금세 수한이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하고는 말했다.
“안 그래도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시잖아요. 대본 봐주신다고 하면 기꺼이 부탁할 거예요.”
업계에서 열애설로 인해 외면당한 역사가 길어서 그런지 한번 작품이 넘쳐나기 시작하자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유진은 앞에 있는 수한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그가 손을 먼저 내미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네. 좋습니다. 근데 제가 미다스의 손이라 불립니까?”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시네요.”
“그럼 제가 유진 씨를 욕심부리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네. 그러니까 대본도 봐준다고 하는 거겠죠? 일단 차현 씨의 차기작을 보고 결정해야겠지만, 되도록 같은 기획사에 가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이 정도면 거의 이야기는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전제 조건이 차현의 차기작이지만, 수한은 실패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럼 조만간 따로 뵙겠습니다.”
“좋아요.”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친 동안에도 차현은 대본 삼매경이었다. 수한이 엄선한 것만 들고 왔기에 기본적으로 재미없는 대본은 존재하지 않았다.
차현은 수한이 간다고 인사를 한 후에야 조심히 가라고 인사했다. 어떻게 보면 예의 없는 행동이지만, 수한은 저렇게 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았다.
수한은 시간을 확인한 뒤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다음 장소는 주혁의 집이었다. 주혁은 미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자를 쓴 채로 서 있었다. 예전과 다르게 아파트로 이사했기에 조금 더 편한 복장이었다.
주혁은 수한이 오기가 무섭게 바로 차에 올라탔다.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죠?”
“네. 방금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는 거죠?”
“소극장입니다.”
주혁의 씁쓸한 미소에 수한은 괜찮다며 주혁을 토닥여 주었다. 대관하기 전에 장소에 먼저 가 보고 싶다는 주혁의 요청을 수한이 들어줘서 함께 가는 거였다.
“팬들이 많이 올까요?”
“그래서 보수적으로 작게 잡은 게 아닙니까?”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성기 시절이었다면 대학교 대극장을 대관했을 텐데 지금은 다시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보수적으로 팬 미팅 장소를 대관할 수밖에 없었다.
“팬 카페를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은 다른 데에다가 판 모양입니다.”
이제 더는 가온 엔터테인먼트 소속이 아니니 일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가온에 대해 욕하는 팬들이 있기는 했지만, 잠깐 그러고 말았다. 이미 팬 카페는 버려진 거나 다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팬 미팅 소식은 홍보팀에서 알아서 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소극장이라는 말이 알맞게 꽤 작은 규모의 공간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대학로 소극장 정도는 아니었다. 대학로 소극장은 정말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하여 좌석끼리 좁게 꼭 붙어 있으니까. 그래도 지금 들린 장소는 어느 정도 좌석 사이에 공간은 있었다.
“이 정도면 좋은 것 같네요.”
“네. 그러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혁이 콘서트를 하긴 했지만, 가온 자체에서 팬들을 내버려 둔 게 커서 팬들을 다시 모으려면 어느 정도 계기가 필요했다. 게다가 주혁도 팬에게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기에 예전처럼 팬들에게 다가가지 못해 둘 사이가 꽤 소원해졌다.
하지만 주혁이 다시 시작하려면 필요한 게 팬이었다. 물론 ‘SSS급 슈퍼스타 시즌 6’을 통해 팬들이 모이기 시작했지만, 예전과 같은 화력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목 관리 잘 하십시오.”
“네!”
팬 미팅에서 노래를 꽤 많이 부를 생각이기에 주혁은 벌써 기대감에 들떴다. 수한도 준비할 것이 많아서 기획팀에 따로 이야기해 둘 생각이었다.
“주혁 씨가 여기가 마음에 들면 여기로 대관하겠습니다.”
이미 일정을 다 보고 왔기에 관계자와 이야기만 하면 되었다. 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가기 전에 괜히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갔다.
***
수한은 피곤함에 커피를 마셨다. 시럽을 많이 넣은 커피라서 입에 쫙 달라붙었지만, 그와 별개로 회의는 그렇지 못했다. 지훈에 관한 이미지가 서로 너무 다른 탓이었다.
“부드러운 발라드로 가야 한다니까요?”
“저는 청초한 이미지로 갔으면 합니다.”
“아니, 남자가 무슨 청초한 이미지로 가요?”
“지훈 씨 생각하면 아주 잘 맞는데요?”
수한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청초하게 가려면 일단 가냘픈 미소년 형이어야 했다. 지훈은 나쁘지 않은 얼굴을 가지긴 했으나, 미소년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차라리 그 이미지를 밀려고 했다면 가온에 있을 때 해야 했다. 지금은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그 흔적이 얼굴에 담겨 있어 무리였다.
“차라리 인디 느낌을 더 살리는 건 어떨까요? 원래 그쪽 출신이라면서요?”
“그것도 그쪽에서 꽤 오래 생활해야 인정해 주지, 아무나 인디로 받아 주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업계 능력자들을 데리고 온 건데 이렇게 마음이 안 맞을 줄은 수한도 몰랐다. 주혁이야 주혁이 강하게 하고 싶은 게 있고, 그전에 가진 주혁의 이미지가 있다. 특히나 대중에게는 그 이미지가 강렬했기에 굳이 그걸 버릴 필요가 없었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몰려드는 시선에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 발라드를 꺼낸 사람이 성민이므로 어서 제 의견에 말을 보태라는 압박의 서신을 보내왔다. 수한은 잠시 고민하더니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싱어송라이터로 가고 싶습니다.”
“혹시 남자 소원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수한이 그 말이 맞는다는 듯이 웃자 다들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수한이 소원에게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 준 건 맞으나, 또 다른 소원을 만들어 낸다는 말은 회의적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소원이 단번에 그 자리에 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소원도 계속해서 성공하면서 그 이미지가 만들어진 거였다.
그것과 별개로 수한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특히나 수한이 가온 출신이라서 베낀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한뿐만이 아니라 성민도 가온 출신이니 그런 말 나올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착하면서도 예민한 이미지도 가져가죠.”
“갭을 만들자는 거죠?”
“그렇습니다. 원래 지훈 씨의 성품이 착한 편이니 평소에는 착한 모습을 보이다가 일할 때는 차갑고 예민한 모습을 그리자는 거죠.”
명확하게 여성 팬을 노리겠다는 수한의 계획에 다들 긴가민가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식의 기획이 과연 통할까 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지훈이 그 이미지를 소화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컸다. 그들에게 지훈은 심약한 이미지였다.
“해 보죠. 해 보고 안 되면 다음 앨범 때 바꿔 보면 되지 않습니까.”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에 다들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앨범 하나 제작하는 데 깨지는 돈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생 기업이라서 돈이 얼마 없을 텐데 그런 도전을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돈은 제가 알아서 해결한 테니 여러분은 최고의 기획 실력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그럼 오늘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짜 오십시오. 그걸 보고 다시 판단해 보겠습니다.”
“네. 대표님.”
수한은 회의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자신을 쫓아오는 성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실패할 가능성에 관해 염두 하는 것이다.
“실장님. 제 안목 못 믿으십니까?”
“그것과 이거는 별개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 걱정할 게 없었다. 실제로 수한이 미래에서 본 지훈은 그러한 모습이었으니까. 그 갭에 매력을 느끼는 여성들이 많았다. 물론 이건 지훈이 외모 관리를 잘했을 때의 일이었다. 물론 이전보다 더 고생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수한은 지훈의 외모 정도야 관리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돈의 힘은 사람의 외모를 바꿔 놓을 정도로 무시무시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