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서이나 씨. 서이나 씨?”
서이나는 자신을 연신 부르는 수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수한이 괜찮냐고 서이나를 쳐다보자 서이나는 괜찮다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 봅니다.”
“첫 주연이라서 그런가 봐요.”
“아니죠. 두 번째 주연이잖아요.”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에도 서이나의 긴장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영화를 찍을 때는 유지영이 와서 서이나를 달래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현장에는 유지영이 없었다. 물론 유지영이 이 드라마 제작을 맡고 싶어 했지만, 아쉽게도 케이블 방송국에는 따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제작사가 있었다. 자체 제작사였다. 유지영은 그 사실을 굉장히 아쉬워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케이블 방송국의 본체 자체가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곳이니 자기들끼리 다 해 먹으려고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원 작가를 큰돈 주고 데려온 것도 있으니 말이다.
“청심환 드리겠습니다.”
“네.”
서이나는 청심환을 꼭꼭 씹은 뒤 물까지 삼켰다. 원래라면 수한이 굳이 매니저로서 이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되지만, 서이나의 첫 드라마 주연작이다 보니 처음은 수한이 서이나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특히나 매니저 일을 할 때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수한이다. 서이나의 보조를 굉장히 잘 해 주어서 서이나는 더 편하게 수한을 대하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김수한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이나입니다.”
신인이라는 신분을 망각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열심히 보이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특히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쪽은 서이나보다는 수한이었다.
‘저렇게 젊은 사람이 마루 엔터테인먼트 대표라고?’
서른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서른은 아니지만, 그 가까운 나이이기는 해서 수한은 더 웃으면서 홍보했다.
주혁의 일로 마루 엔터테인먼트가 소소하게 알려졌기에 명함을 받는 사람마다 신기해했다. 명함도 새것 티가 물씬 나서 확실히 신생 기획사라는 게 실감은 났다.
“안녕하세요. 배우 서이나입니다.”
서이나는 회의실 안에 들어갈 때까지도 열심히 인사를 했다. 이제 수한에 대한 충격이 서이나에게로 옮겨질 시간이었다. 막상 마주한 서이나가 너무 어리게 보이는 탓이었다. ‘더 아이돌’에서는 교복을 입어서 딱히 어리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사복을 입으니까 확 어려졌다.
‘너무 어린데?’
‘이래도 되는 건가?’
물론 드라마에서 사랑 이야기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어려서 이래도 되나 싶기는 했다. 하지만 이에 관해서도 이미 제작사 쪽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공이 한 명인 드라마는 아니니까.’
‘더 아이돌’을 쓰면서 정지원 작가의 실력이 더 늘었다고 생각되는 건 조연까지 살리는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드라마 ‘하이힐’은 서이나를 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는 하지만, 다른 조연 캐릭터까지 다 살아난 드라마였다.
물론 드라마가 흥하려면 주연이 가운데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하지만, 정지원 작가는 이미 서이나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실제로 정지원 작가에게 통과까지 받은 서이나였다. 수한도 그 연기를 직접 봤기에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정지원 작가까지 안으로 들어오자 하나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원 작가에게 인사했다. 수한은 마찬가지로 인사하다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정지원 작가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 내가 많이 편해지긴 했나 보네.’
처음에만 해도 예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내면 지낼수록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한은 유지아 작가가 왜 뛰쳐나왔을까 하는 호기심이 종종 들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수한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그 호기심을 유지아 작가 앞에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럼 대본 리딩 시작하겠습니다.”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서이나의 목소리로 먼저 시작했다. 서이나는 주인공이면서도 주변 인물을 살펴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관찰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는데 그게 기가 막히게도 사람들을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수한은 뿌듯해하는 정지원 작가를 보고는 마찬가지로 웃었다. 대본 리딩을 끝날 때쯤에는 모두가 신뢰하며 서이나를 보았다. 어린 나이이긴 해도 서이나의 재능을 모두가 알아보았다. 수한은 다른 것보다도 성공을 확신하는 정지원 작가의 미소에 함께 속으로 웃었다.
***
수한은 천천히 회사 전체를 돌아보았다. 아직 시작이지만, 시작이라는 느낌이 물씬 들게 활기찬 내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수한은 대표실로 올라가려다가 이쪽으로 와 보라고 손짓을 하는 성민의 모습에 웃으면서 매니지먼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님. 한가하신가 봐요?”
“아니요. 한가하지 않은데요.”
수한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성민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수한을 보았다. 둘이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많이 본 직원들은 즐겁게 웃으며 두 사람을 보았다.
“난 또 할 일이 없어서 그렇게 돌아다니나 했죠.”
“하하. 그냥 다들 어떻게 일하고 있나 궁금해서 살핀 겁니다.”
한 수도 안 지려는 수한의 모습에 성민은 못 당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수한은 성민이 자신에게 일 시키려고 부른 사실을 잘 알았다. 수한은 대표이긴 하지만, 동료 느낌이 더 강한 대표였다. 그래서 모두가 수한을 편하게 여겼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을 넘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막 대하는 직원은 없지.’
물론 그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사장이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수한은 일을 너무 잘하는 대표이므로 하극상을 벌일 직원은 이 안에 없었다.
“다들 필요한 게 있으면 실장님께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다들 알겠다고 웃었다. 일이 많긴 하지만, 신생이기에 다들 이해는 했다. 오히려 마루 엔터테인먼트는 신생 회사인데도 복지가 좋아서 놀랐다고 볼 수 있겠다. 엔터테인먼트사는 대체로 직원을 갈아서 콘텐츠를 만들기에 이 정도 복지면 다른 데서도 이직을 고민할 정도였다.
‘그만큼 블랙 회사가 많다는 거겠지만.’
수한은 사람을 가는 만큼 돈도 많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법인 카드를 성민에게 건네주고 위로 올라갔다.
성민은 다른 건 몰라도 수한이 법인 카드를 줄 때가 가장 좋으므로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을 향해 법인 카드를 흔들어서 보여 주었다. 환호성을 뒤로하고 수한은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연습실로 내려가 지훈을 보았다.
지훈은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즐겁게 기타를 연주 중이었다. 물론 방음 때문에 무슨 소리가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훈이 한시름 부담을 놓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많이 좋아진 것 같더라고요.”
수한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인물에 깜짝 놀랐다. 수한은 땀으로 흠뻑 젖은 주혁을 발견하고는 웃었다.
“연습생들 사이에 껴 있으니까 좋습니까?”
“네. 너무 좋던데요. 형! 형!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너무 귀엽더라고요.”
4년이면 연차가 조금 있긴 했기에 수한은 주혁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했다. 다음 곡은 퍼포먼스 곡을 하고 싶다고 욕심을 부려서 수한은 그리하라고 했다. 물론 수한의 기준에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맞아. 엘 엔터테인먼트에 있는 연습생한테 이야기 들었는데 거기 사정이 요즘 안 좋아졌나 봐요. 여기도 연습생 받느냐고 물어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한은 앞에 말이 서론이고, 본론이 뒤라고 이해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데려오고 싶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보면 인정에 기대서 묻는 거였다. 하지만 수한은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지금 있는 사람들로 번듯하게 꾸리고 나서 뽑으려고 합니다.”
“아…. 그렇네요.”
“그리고 그분들께 조언할 게 있다면 엘 엔터테인먼트에 너무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을 거라 말씀해주십시오.”
원래라면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만, 주혁이 저 정도로 친한 사람들이라고 하니 알려 주는 거였다. 주혁은 그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는지 의문을 그렸지만, 수한이 저런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언제인가 한번 소개해 주시죠. 물론 제가 대표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고, 친한 형이라고 소개하는 선에서요.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가수 쪽이 아니라 다른 쪽에 재능이 있을지.”
실제로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는 가수보다는 연기자 쪽으로 재능이 맞아 그쪽으로 가는 사람도 많았다. 수한은 그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수한이 보여 줄 수 있는 호의는 여기까지였다. 만약 주혁이 미리 말해 그들이 수한의 눈치를 본다면 수한은 기꺼이 그 호의를 접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주혁도 그 사실을 알기에 기회를 준 사실 자체에 감사하다고 다시 한번 인사했다.
***
나이수는 인터넷 기사로 뜬 시청률을 확인하자마자 화면을 꺼 버리고 말았다. 시청률이 무려 1%대였다. 이건 망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시청률이었다. 기사에서는 여기서 더 아래로 떨어지면 역대 최악의 시청률로 뽑힐 거라며 조롱하는 내용을 썼다.
“이 기자. 누구야?”
“우리 회사에 관해 부정적인 기사만 쓰는 기자입니다.”
예전이라면 이런 기사 따위 가뿐히 무시하겠지만, 지금은 무시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기자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 떨어졌다가는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하게 생겼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이수의 권력을 공고하게 할 기회였는데 이로써 주주들의 눈치만 더 보게 생겼다. 나이수는 자신이 잘못한 게 무엇이 있나 열심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아니다. 이게 아닌데 싶은 순간이 있기는 했다.
‘김수한!’
수한이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기 시작하면서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빠진다고 이렇게 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김수한이 그렇게까지 능력이 있다고?”
“회장님께서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이미 업계에서도 실패작 하나 없는 인사로 유명합니다.”
나이수의 비서가 참다못해 진실을 고했다. 그 말에 나이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강우형의 공을 인정하는 것보다 그에게 있어서는 수한의 공을 인정하는 게 더 쉬웠다. 그래서 쉽게 수한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강우형은 여전히 안 깨어났나?”
“네. 회장님.”
나이수는 강우형이 없는 상황에서도 위기에 몰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특히 이번에 예산을 크게 부어서 드라마를 제작했기에 평소보다 손해를 더 크게 보게 되었다. 중국에서도 반응이 미적지근했기에 더 그랬다.
“오히려 상태가 심각해져서 장례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긴 이 정도로 안 깨어나면 어쩔 수 없겠지.”
나이수는 남일이 그날 밤 갑자기 찾아온 것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그날 밤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지만, 그래서인지 더 잊히지 않았다. 나이수는 그날 일을 모두 없던 거로 삼기로 다짐했고, 앞으로 그럴 생각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빨리 가는 게 그 친구한테도 이롭겠어.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보상은 그 가족에게 톡톡히 치러 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