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지훈은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계약하겠다고 수한에게 연락했더니 수한이 소개하고 싶은 맛집이 있다면서 둘이서 함께 식사한 뒤 계약하자고 했다.
맛집이라고 하길래 기대 안 했던 지훈은 수한이 갑작스럽게 데려온 고급 한정식집에 너무 평범하게 차려입고 온 건 아닌가, 괜히 눈치 보게 되었다. 게다가…….
‘자주 오시는 곳인가 보다.’
어색함이 전혀 없는 수한의 모습에 지훈은 수한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지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한은 능숙하게 주문을 하고는 웃으면서 지훈을 봤다. 덕분에 지훈은 조심스럽게 묻게 되었다.
“절 이런 곳에 데려와도 돼요?”
“됩니다. 안 그래도 이곳에 다들 데려와서 식사 한 끼 사 드리고 싶었거든요.”
강우형과 남일은 이 한정식집을 성역화했지만, 수한은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장준환과 자주 오는 맛집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훈을 데리고 오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기분만 좋았다.
“여기 제가 보증하는 맛집이니 맛으로는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한의 자부심 넘치는 말에 지훈은 그만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 보이는 게 없었다. 겉모습은 변했지만, 내면은 변하지 않았다.
얼마 안 가서 나오는 음식에 지훈은 눈이 크게 뜨였다. 수한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지훈은 충격을 받았다.
“맛있죠?”
“네.”
“오늘은 제가 사는 거지만, 다음에는 지훈 씨가 사세요.”
지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주문서를 봤을 때 대략 가격을 보기는 했다. 그 정도 돈은 아무렇지 않게 쓸 정도로 돈을 벌게 해 주겠다는 말과 같아서 지훈은 괜히 설레졌다. 큰돈은 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 주혁 씨와 이곳에 온 적이 있나요?”
“아니요. 지훈 씨가 처음입니다.”
지훈은 이를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음식이 맛이 있으니 되었다. 게다가 수한이 계약하기도 전에 제대로 지훈을 접대하는 모습에서 더 강한 신뢰감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대표님.”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훈 씨.”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자 수한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내심 지훈이 중간에 마음이 바뀔까 걱정했던 탓에 수한은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수한은 수정과를 마시며 어지러웠던 속을 정리했다.
“아! 저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저 실은 대표님을 만나기 전에 최명훈 매니저님을 만났었어요.”
“최명훈이요?”
“네. 이전 일을 사과하고 싶다고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가니까 계약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요즘 연예인을 모으려고 사방팔방으로 다닌다더니 기어코 지훈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수한은 자신이 조금만 기획사를 늦게 차렸으면 지훈을 명훈에게 빼앗길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걸 보고 오히려 결정하게 되었어요.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수한은 명훈이 이 계약에 도움을 줬다는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명훈을 경계할 필요성은 느꼈다. 물론 예진에게는 절대 손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녀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
“와아. 미쳤다.”
사무실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성민이 뱉은 말이었다. 수한은 열심히 아는 사람에게 조언을 받았기에 회사 구조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알았지만, 실물로 보니 느낌이 다르긴 했다. 물론 규모에 비하면 소속 연예인이 적기는 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었다.
“너 돈 많이 썼겠다?”
“네. 무리 좀 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깨끗한 사무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왕 회사 오는 거 즐겁게 일하자는 뜻에서 감각적인 디자인을 넣었고, 의자도 브랜드로 맞춰 오래 앉아 있어도 허리에 부담을 주지 않게 했다.
성민의 시선이 이제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은 수한이 특히나 신경 쓴 장소였다. 수한도 사원이던 시절 조금만 더 넓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낮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굉장히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들었다. 특히나 매니저 일은 밤낮없이 일하는 일이기에 휴식 공간은 매우 중요했다.
“따로 수면실을 만들어 놨습니다.”
“역시 매니저 출신들은 이렇다니까.”
공간 낭비라고 말하는 듯하면서도 성민은 은근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도 회사에서 자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개업식 할 때 어깨에 힘 좀 들어가겠네.”
수한은 인맥을 다 끌어들여 소수 정예로 직원을 꾸렸다. 회사를 만들기 전부터 봐 둔 인재들이 있기에 이전부터 공을 들이니 기꺼이 수한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성민은 하던 대로 매니지먼트 업무를 담당하기로 했다.
“근데 너 긴장 안 되냐?”
“긴장보다는 두근거리네요.”
이미 명훈과 기획사를 꾸린 경험이 있기에 나온 여유로움이었다. 성민은 수한답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고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개업식과 별개로 당장 잡아야 할 일정이 있다.
“주혁이 녹음은 다 끝났고?”
“네. 곡도 이미 나온 상태입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좋지.”
수한은 가지고 있던 노트북을 펼쳐 성민에게 노래를 들려 주었다. 성민은 노래를 듣자마자 누가 작곡했는지 바로 알았다.
“에이치?”
“네. 바로 아시네요.”
“알 수밖에 없지. 에이치 곡에는 일정 패턴이 있거든.”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고 하더라도 대중적인 취향을 섞어 넣어야 하기에 일정 패턴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한의 작곡 실력이 떨어지는 건 덤이었다. 그 때문에 수한이 지훈과 계약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다행히 지훈 씨가 마음을 빨리 먹어 줘서 다행이었지.’
수한에게 지훈만큼 어려운 상대가 없었다. 수한의 뜻대로 가장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수한은 지훈이 더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런 걸 시그니처라고 하지.”
“아! 그걸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없을 텐데 괜찮겠어?”
“네?”
수한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성민을 보자 성민이 씩 웃었다. 수한은 그 웃음을 보고 성민이 에이치의 정체를 알아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 아셨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 많은 곡을 네가 직접 팔고 다니는 게 이상하잖아. 그래서 알았지.”
수한의 뒤에 있는 소원까지 알아챈 것 같아서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민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작곡가 에이치의 등장은 수한이 캐스팅 디렉터로 활약하기 전이니 의심을 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그래서 이지훈을 계약하게 한 거구나. 작곡 천재니까.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네.”
“역시 실장님이네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실장님은 못 속이겠습니다.”
“아! 여기서도 실장이네. 실장이야.”
“경력직 그대로 채용이니까요.”
“뭐, 어쩔 수 없지. 언제 부대표까지 올라갈지 모르겠네.”
수한과 성민이 친하다고 해도 대뜸 높은 자리를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막 차린 회사이기 때문에 직급이 크게 나뉘어 있지도 않았다. 이제 사무실도 생겼으니 더는 성민이 모든 일을 감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김치를 수출하기도 전에 김치 공장을 돌리는 성민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럼 한소원도 나중에 이쪽으로 합류하겠네?”
“저와 인연이 있던 분들은 되도록 다 데려올 생각입니다.”
성민은 그 일에 자신이 크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속삭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떠난 탓에 연예인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성민은 수한의 일을 도우면서도 자신과도 연이 있는 연예인들을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일단 첫 번째 일부터 하자고.”
“네. 주혁 씨 일을 먼저 하죠.”
“그리고 차현 씨 기사도 내야겠네.”
“네. 맞습니다. 그에 대한 조치는 이미 해 두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 일이 태산 같지만, 이게 시작이라고 하니 웃음부터 나왔다. 드디어 그의 꿈이 시작되었다. 그 길에 성민이라는 든든한 동료를 얻었으니 수한은 첫 시작부터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수한은 미리 봐 두었던 타 기획사 연습생 명단을 보았다. 수한으로 인해 꼬여 버려 아직 연습생 시절을 보내고 있는 소년 다섯 명이 명단에 있었다.
‘서남일이 안 하겠다는데 내가 데려와서 키워야지.’
원래라면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낸 곡으로 칼 안무를 하여 이름을 날리고 있어야 할 다섯 명이다. 수한은 이들이 일으킬 한류 바람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그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
지훈은 새 기획사를 구경하러 왔다가 깜짝 놀랐다. 가온 못지않은 훌륭한 기획사 건물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외제 차를 끌고 온 것부터 심상치가 않더니마는 수한은 제대로 기획사를 꾸렸다.
“어서 오세요. 지훈 씨.”
지훈이 미리 오겠다고 연락을 해 두었기에 수한이 직접 나와서 지훈을 맞이했다. 지훈은 이런 환대는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수한은 계약 뒤에도 지훈에게 잘해 주었다.
“이쪽이 연습실입니다.”
일부러 연습실은 접근성이 좋은 자리로 마련해 두었다. 그래야 자유롭게 드나들며 연습을 할 것 같아서였다.
지훈은 기대하지 않았던 최첨단 설비에 몇 번이나 감탄했다. 게다가 기획사 건물 안에는 식당도 만들어 놔서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유롭게 가서 먹을 수 있게 해 두었다. 모두의 건강을 챙기고 싶다는 수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뭔가 건물 크기는 가온과 비슷한데 조금 더 공간 활용을 잘 한 느낌이야.’
건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만든 공간이 없었다. 수한은 기획사 구조 설명을 마친 뒤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지훈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런 곳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다시 가수에 도전하고 싶다는 지훈의 말에 지훈의 부모는 흔쾌히 허락했다. 수한이 또 언제 지훈의 부모에게 연락한 건지 지훈이 말하기 전부터 알고 있어서 지훈은 수한의 배려에 또 한 번 감사했다.
‘일단 노래 실력부터 다시 키워야겠지.’
그러면서 작곡도 다시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지훈은 비어 있는 제 손과 어깨를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기타는 팔지 말고 놔뒀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기타가 없이는 혼자 작곡하려고 해도 힘들었다. 머릿속으로 음을 떠올리는 것과 실제로 그 음을 듣는 건 확연히 다르니까.
“지훈 씨!”
그러나 그 걱정을 덜어 준 건 수한이었다. 수한의 손에 들린 기타 케이스에 지훈은 깜짝 놀랐다. 딱 봐도 수한이 무엇을 준비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계약 기념 선물입니다. 지훈 씨 부모님께 들었거든요. 경제적 어려움으로 기타를 팔았다고요.”
수한은 지훈의 울먹이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격하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이러면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준비한 보람이 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 우리 돈 많이 법시다.”
결국에는 돈이 목표이기에 지훈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수한의 말에 눈물이 나면서도 웃음을 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