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작가님!”
수한이 만나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이자 정지원 작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손을 저었다. 그 옆에는 김민영 작가가 수줍게 웃으며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바빠요?”
“그동안 일이 많았습니다.”
수한은 어서 앉으라는 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지원 작가는 그녀가 아는 맛집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다. 수한의 맛집 리스트에도 있는 곳이라 수한은 이 자리에 오면서도 살짝 설렜다.
“얼마 전에 더 아이돌을 다시 보는데 그때 수한 씨 특별 출연으로 넣기로 해 놓고 안 넣은 게 생각났지 뭐야.”
“아! 그랬죠.”
수한도 잊고 있던 사실이라 어색한 웃음이 나왔다. 수한은 본격적으로 주문을 하는 정지원 작가를 보다가 조금은 편안해진 김민영 작가를 보았다. 역시 입봉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크긴 한가 보다. 여유가 생긴 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쪽 일 계속하나 했더니 기획사를 차렸다고 기사에서 봤어요.”
“네. 안 그래도 만나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수한이 명함을 내밀자 정지원 작가는 익숙하다는 듯이 명함을 김민영 작가에게 건네다가 멈칫했다. 수한이 의아해하며 정지원 작가를 보자 정지원 작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더 아이돌을 계기로 민영이가 독립하게 되었거든요. 깜빡하고 하던 대로 할 뻔했네요.”
“아니에요. 작가님. 저한테 주세요.”
“아니야. 너도 얼른 커야 밑에 사람을 두지. 이런 습관은 빨리 잊는 게 좋아.”
정지원 작가가 알아서 가방에 넣는 것을 본 수한은 문득 유지아 작가가 떠올랐다. 유지아 작가는 밑에 사람을 두지 않고, 여전히 혼자 글을 썼다. 유지아 작가의 성격에 밑에 사람을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지아 작가는 보조 작가 시절을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도 계속 혼자 글을 쓸 것 같다.
‘오히려 사람 뒀다가 글이 안 써져서 곤란해할 것 같단 말이지.’
수한은 앞에 나온 음식을 먹으며 집필하면서 있던 일에 대해서 들었다. TV로도 잘 안 나서고, 인터뷰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수한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정지원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요즘은 차기작 쓰고 계시겠네요?”
“쓰고는 있는데 이게 참 곤란하단 말이에요? 판타지가 많이 있거든요.”
수한은 정지원 작가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고는 웃었다. CG 때문에 드라마 제작에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염려하는 거였다.
“방송국들과 접촉은 해보셨나요?”
“말은 해 봤는데 최대한 그 요소들을 줄이고 드라마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냐는 말을 들었죠.”
예상했던 대로의 답이었다. 정지원 작가의 드라마를 가져오고는 싶지만, 제작비가 만만치 않자 망설여지는 것이다. 물론 막상 드라마를 만들면 그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큰 수익을 벌어들이지만, 그 전까지가 너무 힘들었다.
“혹시 케이블 방송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케이블이요?”
그쪽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라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자세히 그곳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케이블 쪽에서 괜찮은 드라마나 프로그램이 나왔다고 해도 막상 시청률은 잘 나오지 않으니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그 미지의 영역을 수한이 설명해 주니 정지원 작가는 구미가 당겼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드라마국에 가서 아는 사람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곳은 다른 구조로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구조라면 어떤?”
“처음부터 제작비를 다 대주고, 드라마가 끝난 뒤 발생하는 수익을 방송국 측에서 다 가져가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정지원 작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럴 만도 한 게 정지원 작가는 다른 작가와는 버는 수익 자체가 달랐다. 그러므로 공중파가 처음에는 힘들어도 나중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것이다.
“정지원 작가님이 만약 오신다면 방송국에서 부를 돈은 지금과 달라질 겁니다.”
일종의 매절 형태이니 더 크게 부르는 게 당연했다. 정지원 작가는 갑자기 이런 자리에서 돈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기에 살짝 당황한 게 보였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가 뭔가요?”
“당연히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죠.”
수한의 말만 들으면 솔깃해지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사기꾼들이 대체로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혹하게 하므로 정지원 작가의 루트로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이런 방법도 있으니 편하게 집필하시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좋아요.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죠.”
하지만 만약 케이블에서 드라마를 하게 되면 수한에게 어떤 이익이든 가게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업계에서 한탕 하고 튈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의리를 지키는 게 정지원 작가였다. 그를 아니까 수한이 미리 말해 주는 것도 있었다.
수한은 깨끗하게 빈 그릇을 보고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수증을 들고 가려는 수한의 모습에 정지원 작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살게요.”
“그럼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좋아요. 근처에 제가 아는 카페가 있는데 그리로 가요.”
***
이재성 PD는 수한이 드라마국에 들렀다가 간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황당해하다가 수한이 준 명함을 보고는 이해하게 되었다. 하긴 이제는 본인이 한 기획사의 대표이니 이곳저곳에 다니며 영업을 하고 다니는 게 맞았다.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성실한 건 같네.’
이재성 PD가 아는 사람들도 수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좋은 말이 먼저 나오니 말 다했다. 물론 이재성 PD는 오만하고 권위적인 성격 때문에 좋은 말이 나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바꾸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주혁의 소식을 듣고 연락을 먼저 해 온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비웃었다.
‘그렇게 출연해 달라고 매달릴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주혁이 수한의 기획사로 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연락한 게 이 이유도 있었다. 그게 주혁의 뜻이었는지 가온의 뜻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보면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일방적으로 거절한 거였다.
‘그보다 사람들이 참 재미있어.’
순순히 보내 주기에 아무 문제없이 나온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하긴 해외 투어로 큰돈을 벌어온 주혁이 아깝긴 할 거다. 가온과 수한의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이재성 PD도 몰랐다.
어찌 되었건 ‘SSS급 슈퍼스타 시즌 6’의 다음 라운드는 수한의 뜻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이재성 PD가 의견을 꺼냈을 때부터 반응이 좋아 이재성 PD도 나름대로 만족했다.
“안녕하세요. 고주혁입니다!”
주혁은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끔하게 하고 현장에 나타났다. 그 옆에는 예전처럼 수한이 붙어 있었다. 수한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첫 일정이기에 주혁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보는데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시즌 1 때 함께했던 스태프들은 주혁의 등장을 반가워했다. 이래 봬도 시즌 1의 주인공이 아닌가? 물론 그 옆에서 열심히 인사하는 수한의 존재도 반가웠다.
“일주일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가지고 대결을 하기에 주혁은 일주일 내내 방송국에 와야 했다. 그런데도 즐거운 건 오랜만에 국내 방송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주혁을 스타로 만들어 준 ‘SSS급 슈퍼스타’이니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그럼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수한은 대기실에 주혁을 데려온 뒤 바깥 상황을 살폈다. 확실히 뒤로 갈수록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출연자들의 얼굴을 봐도 눈에 쉽게 익지 않았다. 물론 수한은 오기 전에 주혁과 함께 시즌 6까지 한꺼번에 봤기에 일부러라도 더 외웠다.
‘확실히 조작해서 그런가. 스타 감이 보이지는 않네.’
차라리 결과대로 승복했다면 능력이 뛰어난 출연자로 인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봤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이 얼마 없는 상태에서 능력치를 확인하니 왜 시즌 6이 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라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지?’
이미 재미없다고 평이 나 버려서 다시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방송국에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았다. 투표로 버는 돈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수한은 멀리서 수한에게 신호를 주는 손에 서둘러 대기실 문을 열었다. 주혁은 오랜만에 방송 출연이라 긴장했는지 두 손을 꼭 모은 채 서 있었다.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 갈게요.”
주혁이 나가자 주혁이 등장할 걸 알면서도 놀라는 출연자들이 보였다. 시즌 1의 주혁을 참고해서 배운 리액션이기에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수한은 주혁의 촬영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부족한 점들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었다. 긴장해서 그런지 주혁의 시선 처리가 아무래도 어색했다. 하지만 누가 방송 체질 아니랄까 봐 곧 감을 되찾았다.
‘좋네.’
이렇게 방송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투어만 계속 돌게 했으니 주혁이 정신 안 나가 나는 게 이상했다. 물론 주혁은 노래하는 무대를 가장 사랑했지만, 그로는 결핍되는 게 있었다.
‘대중들의 관심이지.’
연예인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한은 주혁의 팬 카페가 어떻게 됐는지도 봤기에 주혁의 결핍을 이해했다.
수한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가 무섭게 주혁에게 달려가 부족한 점들을 말해 주었다. 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한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는 바로 피드백해서 다음 촬영을 이어서 했다.
수한은 촬영하는 것을 구경하다가 진동하는 핸드폰에 미소를 지으며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에 만났던 정지원 작가에게서 온 전화였다.
[수한 씨. 지금 통화돼요?]
“네. 통화됩니다.”
수한이 주혁을 보며 핸드폰을 가리키자 주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촬영에 계속해서 몰입했다.
[지난번에 수한 씨가 말한 것에 관심이 생겼는데 아는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통해 수한이 한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했는지 흥미로워하는 목소리였다. 수한은 바로 대답했다.
“네. 그쪽에서 전화하고 나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지원 작가는 수한이 생각한 대로 주는 만큼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수한을 그 가운데 넣은 건 그 안에서 알아서 이익을 취하라는 뜻이었다. 수한은 전화를 끊은 뒤 드라마국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김수한입니다. 지난번에 말했던 것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이 되시는지요?”
정지원 작가와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정지원 작가의 가격을 올려 두는 게 우선이었다. 수한은 정지원 작가의 드라마에 소속 연예인을 꽂아 둘 생각도 하고 있기에 정지원 작가가 기회를 준 만큼 중간에서 최대한 잘해 보기로 했다.
그 가운데서도 주혁은 프로그램 촬영을 능숙하게 했다. 특히나 시범을 보이는 장면에서 훌륭한 노래 솜씨를 뽐냈다. 그 모습에 수한은 확신했다.
‘시청률은 안 나오더라도 저 장면은 화제가 될 거야.’
방송 클립으로 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기이기에 그것만 되어도 주혁의 방송 출연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