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11. 마루 엔터테인먼트
“아직 공사가 덜 끝났다고?”
“네.”
수한의 말끔한 대답에 성민은 황당해하며 수한을 보았다. 자리 잡으면 데려온다더니 그게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다. 준비가 덜 되어 있을 줄이야.
“그럼 주로 어디서 일하는데?”
“집이요.”
과연 프리랜서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지금 당장 성민이 있을 만한 공간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민은 비싼 커피를 얻어먹고 있는 지금 다시 고민해 볼까, 아주 잠깐 생각했다. 회식비와 커피 값이야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성민의 복잡한 얼굴에 수한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성민은 결국에는 수한의 손을 잡았다. 당장 백수로 지내기보다는 바로 일하는 게 성민과도 맞았고, 수한이 망하더라도 자신은 이직할 자신이 있으니 괜찮았다.
수한은 성민의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마저 그날 있던 일에 대해서 들었다.
“제가 기획사를 차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실장님을 자른 거는 거죠?”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지.”
수한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수한의 소식을 듣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남일이 감정적인 사람이기는 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성민의 말에 따르면 3년 동안 의심을 해 왔는데 인제 와서 성민을 쫓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수한이 모든 의문을 해결했다는 듯 시원하게 웃자 성민이 자신에게도 말해 달라며 수한의 커피를 인질로 삼았다. 어차피 이제는 한배를 탄 사이이기에 수한은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일? 무슨 일?”
“절 방해하려는 거겠죠. 그 일을 하는 데 실장님이 방해되어 움직인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수한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성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눈을 번뜩였다. 기사로 주혁의 일정에 대해 본 기억이 났다.
“고주혁 디지털 싱글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해는 되네.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해도 내 눈에 띌 수밖에 없을 테니. 물론 나는 그걸 봤더라도 네게 말하지 않겠지만, 그쪽은 내가 네 첩자라 생각하고 있으니 이해는 된다.”
말은 이해한다고 했지만, 분노한 얼굴이 보였다. 머리로는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소리였다. 이 분노를 생각한다면 가온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서 복장 터지는 것보다 밖에서 터트리는 게 낫기는 했다. 성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작전은 뻔하네.”
“네. 소원 씨 앨범을 낼 것 같습니다.”
수한에게 가장 타격을 주는 방법이니 수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고작 그를 위해서 성민까지 내쫓았으니 수한은 이를 감사해야 하나 말아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수한에게는 이득이었다.
“대처 방법은?”
“글쎄요.”
그건 머리를 잘 굴려 봐야 했다. 소원도 나중에는 수한의 품에 들어올 수한의 보석 중 하나이니 서로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게 좋았다.
“실장님 생각에는 소원 씨가 앨범을 낸다면 언제 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당연히 당일이겠지.”
“동시 공개만큼 타격이 큰 건 없겠죠?”
“다음 날 공개도 있긴 하지만, 한소원의 화제라면 동시가 가장 낫지.”
소원이 앨범을 내면 앨범에 수록된 곡 순서대로 상위권 줄 세우기를 하니 대부분은 소원을 피해서 음반을 냈다. 아무리 음원으로 돈을 크게 벌지 못한다고 해도 소원의 노래에 떠내려가게 놔둘 수 없었다.
“한소원이 대표님 말을 거절할 수는 없겠지?”
“거절할 수는 있지만, 굳이 그 일을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괜히 남일의 눈 밖에 났다가는 주혁보다 더 안 좋은 꼴이 날 수 있다. 수한은 소원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소원에게 부담감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장준환의 일로 소원의 약점까지 노출하게 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뭐.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겠죠.”
수한은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을 흔들었다. 성민은 오랜만에 보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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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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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슈퍼스타’를 함께한 PD였다. 아직 투표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라 이재성 PD는 자신 있게 수한에게 전화했다. 수한은 한 2년 뒤쯤에 잡혀가려나 짐작하며 의문을 그리는 성민을 향해 웃었다.
“주혁 씨 계약 소식을 듣고 전화한 거겠죠.”
“그러고 보니 그거 시즌 6까지 나왔지? 아니, 시즌 6은 요즘 하던 중이었던가?”
“네. 짧은 시간 내에 많이도 우려먹었죠. 더는 우려먹을 게 없으니 이렇게 전화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잠시만 통화할 테니까 잠깐 다른 일 하고 계세요.”
다른 거라고 해 봤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수한은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에 통화하는 이재성 PD는 예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다. 변하긴 했다. 더 고집스럽고 권위적이게 변했다. 잠깐 통화했는데도 그걸 알 수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래서 주혁 씨의 출연을 원한다고요?”
[네. 맞아요. 어차피 고주혁 씨도 화제성 다 떨어졌잖아요. 서로 도움이 되자는 겁니다.]
수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은 주혁의 출연을 수락했다. 성민이 그래도 되냐고 수한을 봤지만, 수한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조건은 만나서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했다. 무작정 출연하기에는 주혁의 이름값이 있다. 수한은 통화하면서 재미있는 생각도 떠올랐기에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 양반 보통이 아니던데 괜찮겠어?”
“저도 보통이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절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아니다. 이제는 거의 4년이 다 되어 가나? 수한은 뭐가 됐든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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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수한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이재성 PD가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수한은 옷차림부터 명품으로 싹 바뀐 이재성 PD의 모습에 그가 그동안 얼마나 출세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나 명품 시계가 나 좀 봐 달라고 빛을 냈다.
“고주혁 씨 이후로 새 인재를 기대했더니 김수한 씨가 먼저 새 시즌 시작하기도 전에 가온에서 나가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네. 저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 참 마음대로 안 흘러가네요.”
수한은 많이 바뀐 방송국의 모습에도 놀라긴 했다. 곳곳에 붙여져 있는 포스터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케이블 방송사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게 했다.
‘슬슬 이쪽으로 갈아탈 준비를 해야지.’
수한은 곧 케이블 드라마가 부흥할 시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원 작가와도 이미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더 아이돌’이 흥하게 되면서 약속을 잡자고 할 걸 서로 시간이 안 맞아 최근이 되어서야 겨우 잡게 되었다. 어차피 사업적으로도 정지원 작가와 연이 닿아 있는 게 좋으므로 수한은 기꺼이 정지원 작가의 일정에 맞추기로 했다.
‘정지원 작가는 판타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제작비 제한이 없는 케이블 드라마가 더 맞겠지.’
아마 정지원 작가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굉장히 좋아할 것으로 여겼다. 수한이 기억하는 과거에도 정지원 작가는 케이블과 만난 후 더 훨훨 날아다녔다.
그와 별개로 이재성 PD는 자신의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수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깍듯하게 이재성 PD를 대했을 수한인데 허리도 꼿꼿이 세우고 있어 기분이 상했다. 가끔 전화해서 안부도 묻기에 제 위치를 알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쪽에서 일해서 그런가?’
수한이 드라마와 영화 쪽에서 활약을 많이 했다는 소식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도 들었기에 이재성 PD는 살짝 아쉬워했다. 갑질을 하고 싶은데 그 갑질 당할 상대가 자신의 위치를 모르니 먼저 뜬금없이 갑질을 하기도 그랬다.
물론 수한은 이재성 PD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예전처럼 마냥 굽히고 싶지는 않아서 눈치가 없는 척 연기했다. 수한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이재성 PD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아니에요. 그보다 고주혁 씨 말입니다. 다음 라운드의 선생님으로 초대할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라면 출연자들을 가르치는 겁니까?”
“네. 원래는 심사위원으로 부르고 싶었는데 가온에서 거절해서 타이밍이 이렇게 되었네요.”
안 그래도 그걸 바라고 나왔기에 수한에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특히나 이번 시즌의 심사위원에서 주혁이 제외된 게 수한은 마음에 들었다.
‘해외 투어 돌리느라 거절한 거겠지만, 굳이 이런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을 자처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조작인데 심사위원이 되어서 뭐 할까? 한 라운드의 선생님이면 두 회 정도 분량을 뽑아낼 수 있으니 괜찮았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저 주혁의 출연만으로는 수한의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수한은 여기서 조건을 걸기로 했다.
“혹시 다음 라운드의 주제를 정해 둔 상태입니까?”
“그런 건 당연히 정하고 하죠.”
말은 그리 했지만, 수한은 은근히 시선을 피하는 이재성 PD를 발견했다. 시즌을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주제도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다 보니 돌려막기 식으로 하여 주제를 정하기 때문에 다음 라운드 주제는 진행 중인 라운드를 마치고 나서 정했다.
어차피 다음 주제 방송은 경연 이후에 따로 녹음하기에 급할 것도 없었다. 수한은 그 사정을 다 알고 이재성 PD를 만난 것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말했다.
“혹시 제가 주제를 제안해도 됩니까?”
“제안이라면?”
“주제는 초심입니다.”
이재성 PD는 수한의 속셈을 알아채고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주혁을 이왕 쓸 거면 제대로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영악하기도 했다. 이재성 PD는 저 잘 돌아가는 머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괜히 저쪽에서 이름을 날린 게 아니었네?’
마냥 자기 이익만 챙기는 영악함이면 단번에 거절했겠지만, 확실히 주혁을 내세우면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다. 안 그래도 초심을 잃었다는 시청자들의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에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좋아요. 상부상조해 봅시다.”
“네. 좋습니다.”
수한은 소원이 방송 출연을 많이 안 해서 다행이라 여겼다. 남일의 의도대로 두 사람이 충돌하여 주혁이 밀려난다고 하여도 주혁이 화제성을 얻으면 순위는 결국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아이돌들이 괜히 공중파 방송에 참여하는 게 아니었다.
원래 눈에 보일수록 관심이 더 생긴다. 특히나 여자 아이돌은 무대가 좋으면 음원 순위 역주행도 가능하기에 수한은 그를 공략해 보기로 했다. 물론 수한의 머릿속에 실패는 없었다.
“그럼 다음 방송에서 보죠.”
“아! 그전에 명함 드리겠습니다.”
수한이 명함을 건네자 이재성 PD는 다른 욕심도 생겨나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다른 가수는 안 키웁니까?”
“네. 아직은요. 주혁 씨부터 제자리로 돌려놔야죠.”
어떻게 보면 오만한 말이지만, 수한이 해서 오만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재성 PD는 맨 처음 수한을 만났을 때 수한이 한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SSS급 슈퍼스타’가 성공할 거라 했던 말 말이다.
“그래요. 이야기는 그 뒤에 하죠.”
이재성 PD가 기분 좋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수한은 가만히 서 있다가 드라마국 위치를 파악했다. 온 김에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수한은 이재성 PD에게만 안부 전화를 한 게 아니었다. 수한은 스태프로 지나친 사람 중에서도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는 연락을 놓지 않았다. 특히나 그중에서도 오래 볼 것 같은 사람들은 절대 연락을 빼먹지 않았다.
‘원래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거지.’
드라마국으로 옮긴 사람도 있기에 수한은 인사도 할 겸 드라마국 상황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안에 틈이 있다면 기꺼이 껴 들어가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