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10. 터닝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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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혁, 마루 엔터테인먼트와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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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은 모니터 너머로 수한과 손을 잡을 주혁을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장준환의 존재만 아니었어도 남일은 수한을 수백 번은 더 건드렸을 거다.
‘강우형이 그렇게 되어서 기회가 내게로 온 줄 알았더니.’
장준환에게서는 연락 하나 오지 않았다. 남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우형의 자리를 수한이 꿰차게 되었다. 더불어 남일의 자리까지 수한이 먹었으니 남일에게는 커다란 손해였다.
‘설마 회사를 차릴 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어떻게 보면 수한의 가치를 남일이 가장 인정하지 않은 거라 볼 수 있었다. 캐스팅 디렉터라는 일을 한다길래 방심했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 몰랐다.
‘그래. 그런 거였어.’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다. 자신의 빈자리를 강우형이 오롯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강우형은 수한과 함께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전화 통화 내용은 무엇일까? 남일이 착각했을 가능성이 컸다.
남일은 상세하게 기사 내용을 읽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간 주혁은 얼마 안 가 디지털 싱글을 낼 거라 했다. 디지털 싱글은 CD 앨범이라는 실체가 없는 디지털로만 낸 음원을 뜻했다.
‘이걸 어떻게 방해할 수 없을까?’
남일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얼마 안 지나서 좋은 생각이 났다. 수한에게 가장 크게 엿 먹일 방법이 있다. 아마 수한이 이 생각을 안다면 결과를 보기도 전에 남일에게 욕을 던질 것이다.
남일은 여유 있게 웃으며 수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 더불어 이 계획을 어떻게 하면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남일은 더는 성민을 믿지 않았다. 이광무 감독 시사회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이미 봤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 기회에 성민이 녀석도 처리하는 게 좋겠어.’
남일은 성민이 수한이 차린 기획사에 가지 않는 이유를 첩자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서라 확신했다. 그렇지 않은 한 성민이 이 회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 이 기회에 함께 처리해야 해.’
실장이라는 자리가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니었기에 남일이 비밀리에 진행한다고 해도 중간에 샐 가능성이 컸다. 물론 성민을 내보내면 어느 정도 수한이 경계를 하게 될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불안감이 생기면 더 좋았다.
남일은 수화기를 들어 곧장 성민을 불러냈다. 성민은 밝은 얼굴로 대표실로 나타났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나, 남일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김수한이 회사를 차렸으니 확실히 안심할 만하겠지.’
첩자 짓을 하다가 쫓겨난다고 해도 수한의 회사에 들어가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 생각을 하자 남일은 좋은 사람의 얼굴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었다. 솟아오르는 분노를 그는 여전히 다스릴 줄 몰랐다.
“이 실장.”
“네. 대표님.”
성민의 싱글벙글 웃는 낯이 이처럼 꼴 보기 싫을 줄은 몰랐다. 처음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차릴 때만 해도 성민과 이런 식으로 대립하게 될 줄도 몰랐기에 남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아무리 피로 이어진 사이라 해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했다. 특히나 배신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요즘 성과가 신통치 않아.”
“예진이가 있는데도요?”
“그래. 연예 기획사가 연예인 한 명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잖아.”
남일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성민은 살짝 당황스러웠으나,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남일이 기사를 통해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존재를 확인한 것처럼 성민도 그랬기 때문이다. 성민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수한의 행보에 감탄했다.
‘그게 정말로 스카우트가 맞았구나.’
짐작한 것과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보는 건 생각보다 큰 차이였다. 성민은 수한의 제안을 받았던 과거를 떠올렸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남일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민을 보는 남일의 눈빛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혁이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알고 있었나?”
성민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책망하는 눈빛이 보였다. 왜 알고도 말해 주지 않았느냐는 원망이 보여서 성민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말하려고는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꺼림칙해서 말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인 감 같은 게 발동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은 알리지 않기를 잘했다고 성민에게 말해 주었다.
“어차피 주혁이 그냥 보내 주기로 했잖아요. 주혁이가 어딜 가든 저희와 이제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성민은 반성하고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말했던 남일을 믿었다. 그래서 타이르듯이 말했는데 그게 또 남일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 남일이 대놓고 분노하는 게 보였다.
“김수한한테 그대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면 보내지 않았을 거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성민은 놀랐다. 성민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자 남일이 대놓고 성민을 비웃었다.
“이제 또 가서 김수한에게 무슨 말을 할 작정이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김수한 끄나풀인 건 내가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도 봐준 건 네가 내 가족이라서 그런 거다.”
성민은 남일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랐다.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성민이 전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해도 남일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대표님. 그럼 지난번에 말씀하신 건 뭡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당연히 거짓이지. 그걸 믿었나?”
성민은 혈압이 등 뒤로 쫘르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성민을 계속 의심해 왔다는 말이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사람이 이제껏 그래 왔다는 사실에 성민은 충격을 받았다.
“언제부터 저를 의심하셨어요?”
성민이 충격을 받아 대놓고 흔들리는데도 남일은 성민이 연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격정적으로 반응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남일은 더 차갑게 말했다.
“3년 전부터.”
성민은 쓰게 웃었다. 그러니까 수한이 나가고 난 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남일은 두 사람의 사이를 계속해서 의심해 왔다는 이야기였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은 두 배가 되어 성민에게 돌아왔다.
“그걸 지금 말한다는 건 저 보고 알아서 나가라는 거네요? 그렇죠?”
“그래. 그 녀석이 내 것을 빼앗았는데 더는 빼앗길 수 없지 않나?”
언제부터 주혁이 남일의 것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남일은 장준환을 포함해서 한 말이었으나, 성민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성민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3년 동안 변한 남일을 겪으면서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기꺼이 남일의 원대로 나가 주기로 했다.
“좋아요. 부모님께는 제가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
“그러지.”
어서 가라고 턱짓하는 모습에 성민은 온갖 정이 다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한이 제안할 때 단번에 받아들일 걸 그랬다. 수한이 연예 기획사를 차렸다는 이유로 남일의 안면이 싹 달라질 줄은 몰랐다.
‘하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
어쩌면 3년 동안 보여 줬던 남일의 모습이 진정한 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성민은 더는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성민은 곧바로 자리로 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격한 행동에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매니저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실장님. 무슨 일이에요?”
어제 피곤하게 일정을 달렸기에 눈 그림자가 턱 아래까지 내려온 재원이 놀라서 물었다. 성민은 하나같이 걱정하는 시선을 보자 입 안이 썼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남일의 입으로 직접 나가라는데 여기에서 버틸 이유가 없었다.
“설마 회사 나가려고요?”
“그래. 미안하게 됐다.”
이건 진심이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그만두는 걸 성민이 가장 바라지 않기도 했다. 수한도 이런 식으로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쫓겨나지 않았던가? 그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식 어때?”
짐을 다 싸고 나서 성민이 한 말이었다. 성민은 오랜만에 법인 카드가 아닌 개인 카드를 꺼냈다. 법인 카드 썼다가는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말이다.
“실장님…….”
“다들 시간 안 되면 말고.”
“아니, 가야죠. 시간이 안 되더라도 가야죠. 그렇지?”
재원이 독려하듯이 다른 매니저들을 보며 말하자 몇몇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남일의 명령을 받고 소속 연예인들을 감시하는 매니저들이기 때문에 이 반응이 당연했다. 덕분에 재원은 거를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한눈에 파악하게 되었다.
“저는 무조건 갈 거니까 가시죠. 그리고 이제 백수신데 무슨 실장님이 쏩니까? 제가 쏘겠습니다.”
“아니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만 가자고.”
성민도 그들을 의식했기에 비웃음부터 나왔다. 진짜 첩자가 누구인데 누굴 보고 첩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성민은 짐을 다 쌌음에도 바로 나가진 않았다. 그동안 해 오던 일이 있기에 무책임하게 놔두고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누가 이 자리에 앉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성민을 외면한 매니저 중 한 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지 말라고 하더니마는 그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중에는 성민이 직접 면접을 보고 뽑은 사람도 있어서 씁쓸했다.
성민은 그나마 재원이 자신을 신경 써 줘서 고마웠다. 달리 재원이 예진의 매니저가 아니었다. 재원은 인간적으로도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퇴근 시간이 되자 일정이 없는 매니저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에 재원이 성민을 이끌고 자주 회식하던 삼겹살집으로 갔다.
“와. 마지막까지 여기로 데려오네?”
“그럼요. 그럼 어디 갈 줄 알았는데요?”
그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근처에서 괜찮은 식당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지막이라는 이유로 소고기 구이집에 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백수이니 아끼고 살아야 했다.
‘인제 와서 수한이한테 가면 자존심 상하겠지?’
원인으로 따지면 수한인데 수한 탓을 하기에는 남일의 말도 안 되는 오해가 컸다. 성민은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나는 남일에 술부터 시키려다가 어느새 맞은편에 앉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선배님이 부르셔서요.”
수한이 가리킨 사람은 재원이었다. 예진의 일로 수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는 수한이 필요하다는 걸 가장 먼저 파악한 게 재원이었다. 아무리 재원이 눈치 없는 척을 한다고 해도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김수한이라는 것도 알았지.’
이건 수한을 유난히 신경 쓰는 예진 때문에 알게 되었다. 제 마음을 들키고 나자 편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재원에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 원인이 되었지만, 이런 방향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영재 영입하려면 이 정도는 수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의미로 오늘 회식은 제가 쏠 테니 다들 맛있게 드십시오.”
수한의 화끈한 말에 다들 좋아했다. 그중에는 수한을 만난 적이 없는 매니저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한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라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성민이 지난번 거절은 미안하다는 듯이 수한을 보자 수한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남일의 말도 안 되는 오해 덕분에 수한은 믿을 만한 파트너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