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10. 터닝 포인트
지훈은 편의점 계산대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손님도 없고, 진열대 정리도 다 해서 할 일이 없었다. 지훈은 제게서 번호를 받아 갔던 수한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그 이후로 수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내가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지?’
다 포기했으면서도 미련을 보이는 제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지훈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연예계는 그가 생각한 것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다.
지훈은 벌써 다섯 번이나 사기를 당했다. 특히나 지훈이 작곡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마음대로 지훈을 이용했다. 재능만 이용한 거면 괜찮은데 지훈에게서 돈까지 받아 갔다. 투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그렇게 지훈은 부모의 돈까지 끌어다 쓰고 말아먹은 패륜아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편의점 및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서 부모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부모가 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닌다는 점이었다. 지훈의 실패에도 그들은 괜찮다고 다독였다. 그게 참 죄송스러웠다.
‘정신 차리자. 그쪽은 눈도 안 돌리기로 했잖아.’
지훈은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토록 기다렸던 수한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네…….”
“시간 길게 뺏지는 않으려고요.”
수한은 지갑을 열더니 그 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명함은 뽑은 지 얼마 안 됐는지 유난히 하얗게 반짝였다. 지훈은 무심결에 명함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마루 엔터테인먼트 대표?”
“네. 최근에 제가 세운 기획사입니다.”
이런 식의 명함은 많이 받아봤지만, 수한이 내미니 느낌이 너무 달랐다. 다른 사람들과 수한은 너무 다른 사람이니까. 처음 지훈의 가치를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지훈은 종종 생각한다. 수한이 SSS급 슈퍼스타에 가자고 이야기했을 때 그때 거절을 안 했다면 현실이 달라졌을까? 아니, 하다못해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직 사무실은 공사 중이라 변변치 않은데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달라고 명함 드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수한의 상태는 말끔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수상하게 느껴졌다. 예전이었으면 수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텐데 3년이라는 세월은 지훈에게 그런 순진함을 유지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희망을 안겨 주는 것 같아서 지훈은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관심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안타깝네요. 저는 아직도 지훈 씨가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든요.”
담백하지만, 진심이 담기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훈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친 사람을 알고 있었다. 크게 보면 수한도 그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특히나 공사가 덜 되었다는 저 말 때문에 지훈의 의심은 짙어졌다.
“그런 소리를 하려고 제 연락처를 받아 간 거예요?”
“네.”
너무 솔직하게 대답해서 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지훈이 눈으로 욕을 하자 수한은 미소를 지었다. 저런 여유로움을 보면 예전과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아서 지훈은 심란했다. 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믿는단 말인가? 저 말이 사기가 아니라면 지훈을 흔들 말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고주혁 씨가 마루 엔터테인먼트의 1호 연예인입니다.”
그 말에 지훈은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수한의 쓴 미소를 보고는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수한의 말은 믿지 못하지만, 주혁은 믿는다는 소리니까.
“생각 있으면 그쪽으로 연락 주십시오.”
수한은 지훈의 손에 있는 명함을 가리키며 끝까지 여유로운 모습으로 편의점에서 나갔다. 수한이 나가고 나자 편의점 안에서는 긴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지훈의 손에 있는 명함은 지훈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 말이 진짜일까?’
지훈은 그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핸드폰을 들어 주혁을 검색했다. 그러나 주혁의 일본 투어 소식만 기사로 뜰 뿐 기획사를 옮겼다든가 그런 기사는 없었다. 연예계 쪽으로는 전혀 인맥이 없어서 아직 기사로 나오지 않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
‘설마 나한테 사기 친 건가?’
이번에는 마루 엔터테인먼트를 검색하니 그에 관해서도 나오는 게 없었다. 이쯤 되니 의심을 안 하는 게 이상했다. 지훈은 그대로 명함을 편의점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려다가 멈칫했다.
‘만약에 진짜면 어쩌려고?’
진짜여도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과 버리지 말라고 경고가 충돌했다. 지훈은 결국 명함을 주머니 안쪽에 구겨 넣는 걸 택했다. 확실한 건 주혁을 만나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날 방법을 나는 모르지.’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떠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연을 다 끊어 버렸다. 하긴 가장 믿고 의지했던 수한에게도 연락을 안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오죽할까?
지훈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살던 때와 다르게 지금은 부모님의 집에 들어온 상태다. 지훈은 멍하니 필요한 가구 외에는 없는 제 방을 보았다.
지훈은 현재 작곡도 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던 기타도 급하게 팔아 버려서 무엇 하나 연주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훈은 어느 날 TV에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처음 보는 가수가 부르는 걸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사기를 당해 헐값에 넘긴 노래는 그달의 히트곡이 되어 지나가는 거리마다 들려오는 곡이 되었다.
지훈은 제 곡이 들려올 때마다 피눈물을 흘렸다. 억울해도 누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멍청해서 당한 일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지훈은 수한을 만나자 그 괴로웠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스타로드’에서 개망신을 당한 건 이젠 괴로운 기억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지훈의 부모가 지훈을 원망하기는커녕 걱정하는 건 지훈이 잘못될까 봐 염려도 되어서였다.
지훈은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거실에서 들려오는 TV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을 보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서 많이 들은 전주가 들려왔다.
지훈이 홀린 사람처럼 방에서 나오자 방송을 보고 있던 지훈의 부모가 놀란 얼굴로 지훈을 보았다. 지훈을 걱정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훈은 TV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막에서 뜨는 곡의 정보는 과연 지훈이 아는 내용이었다. SSS급 슈퍼스타 시즌 1에서 주혁이 불렀던 전설의 노래, ‘가을이 너라면’이었다. 작곡가 이지훈이라 쓰여 있는 자막을 보니 지훈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TV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이 나와서 다른 가수의 노래를 성공적이게 커버하는 내용이었다. 지훈은 넋 놓고 TV를 보다가 노래가 끝나자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남이 본다면 별것 아닌 모습이었지만, 이지훈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뜨거움으로 다시 새로운 것을 하기에는 이미 지훈이 겪은 좌절이 너무나 컸고,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
“그런 약점이 잡혔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너무 늦게 말씀드린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수한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네자 소원은 평소처럼 착한 얼굴을 하며 괜찮다고 말했다. 수한이 미리 걱정한 것처럼 소원도 언젠가 밝혀질 수도 있는 일이라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작곡가 에이치는 사라지는 거예요?”
“원하시면요. 이제는 각자 할 수도 있으니까요.”
수한이 바쁘긴 해도 작곡은 절대로 손에서 놓지 않았다. 주혁을 첫 번째로 연예인으로 데려온 이상 더욱더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러나 수한과 다르게 소원은 섭섭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오빠랑 유일하게 소통하던 수단이잖아요.”
“함께 작곡을 안 한다고 해도 제가 소원 씨 팬인 건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계속하고 싶다면 계속할 거예요?”
“네. 어차피 지금 와서 안 한다고 해도 했던 과거가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특히 이 소재가 누구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요리가 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소원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니 다행이긴 한데 수한은 심각성을 몰라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도 얼른 계약이 끝나야 할 텐데요.”
주혁과는 다르게 소원은 수한이 손 쓸 겨를도 없었다. 수한이 너무 매니저 초기에 데려왔기 때문이다. 그때 소원의 위치는 지금과 달라서 많은 위험을 품고 영입한 거였으니 긴 계약이 오히려 소원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래서 아직 2년이 더 남아 있다.
“그동안 회사 키워 두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아! 맞아. 팬들이 오빠 사진도 보내 줬는데 보실래요?”
“팬들이요?”
“이번에 터치 영화 시사회 때요. 카메라 성능 실험한다고 오빠 많이 찍은 모양이에요.”
수한이 놀란 건 그게 아니지만, 소원은 벌써 핸드폰을 켜서 수한의 사진을 열어 두었다. 수한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제법 잘 찍혀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옷도 잘 입고 왔으니 평소보다 더 괜찮게 나왔다.
“이런 사진은 팬들이 직접 건네줍니까?”
“네. 예진 언니가 팬들과는 어느 정도 선만 지키면 괜찮다고 해서요.”
수한은 그 말을 듣고 살짝 안심했다. 악질 팬으로 인해 고생한 전적이 있는 예진이 그 말을 했으니 믿을 만했다.
“그래서 고주혁 씨요. 그분 앨범 준비하고 있어요?”
“네. 일단 디지털 싱글로 존재감을 다시 드러내려고요.”
소원과는 작곡가 에이치로 통하니 이 정도 계획은 비밀로 할 게 아니었다. 소원이 앞으로도 함께하자고 했으니 어떻게 보면 사업 파트너이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네요. 그럼 예능에도 나가게 하는 건 어때요?”
“그것도 고민하긴 했는데 일단 간을 보려고요. 대중이 주혁 씨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소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이야 예전에 불운한 사건이 있었으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주혁의 경우는 너무 오래 해외에서 맴돌았다.
“요즘 가온 엔터테인먼트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 대표님이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고 실장님이 좋아하셨어요.”
“그렇습니까?”
소원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으나, 수한은 덕분에 성민이 자신을 거절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성민처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한이 아니었다.
‘과연 정신을 차렸을까?’
오히려 자신이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어 성실한 척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한은 그 이후로 장준환에게 들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누가 범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맞아. 저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연기 제안받았어요.”
“연기요?”
“안 할 거니까 벌써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수한은 여기서 엘 엔터테인먼트가 갑작스레 튀어나와 놀란 거지만, 소원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발연기를 하면서 무슨 연기냐로 오해한 거였다. 그 오해를 수한도 금세 알아챘기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사극이죠?”
현대극에서 연기를 잘한다는 연기자도 가끔 연기력 논란을 일으키는 게 사극이었다. 당연히 아니기에 소원이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저도 저 발연기 하는 거 잘 알아요. 이번에 더 아이돌 차기작으로 미는 드라마라는데 저하고 딱 어울린다면서 대표님이 해 보라고 했어요.”
수한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 차기작이라면 장준환의 명령으로 수한이 손을 뗀 그 작품이었다. 그래서 나이수 마음대로 굴릴 거라 예상은 했는데 설마 소원을 그 안에 넣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대표님이라고? 서남일이 직접 제안을 했다?’
어딘가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손을 잡은 남일과 나이수의 모습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