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35화 (135/186)

135    10. 터닝 포인트

레드카펫 위로 데이빗 랩이 등장하자마자 현장은 난리가 났다. 수한이 가끔 한국 사람이 의외라고 생각할 때는 이럴 때였다. 막무가내로 밀 줄 알았던 사람들은 데이빗 랩이 한 명씩 인사하며 팬 서비스를 하고 다니자 얌전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다만 수없이 많은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수한은 안쪽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인터뷰하는 것을 확인하고, 뒤이어서 들어오는 연예인들을 보다가 예진을 발견했다. 마치 시상식을 온 것처럼 화려하게 입고 온 예진은 여신이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려서 할 말을 잃게 했다. 수한은 그런 예진을 기분 좋게 보다가 마침 딱 예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응?’

안쪽에서 기다리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게 보였다. 어차피 수한도 영화 관계자이기에 당연한 거지만, 수한은 예진이 잠시 그 사실을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남에게 관심이 없는 예진이니 그냥 넘기기로 했다.

수한은 인사할 사람들에게 다 인사하고 다니다가 유지영을 발견했다.

“오셨네요?”

“네. 아는 사람이 영화 관계자라서요. 표를 줘서 오게 됐어요.”

“영화는 잘될 겁니다.”

“그렇겠죠. 누가 이 영화에 참여했는데요.”

그 ‘누구’가 수한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수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수한을 발견한 성민은 어이없다는 듯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너 내 앞에서는 잘난 척 실컷 하더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다른가 보다?”

“아! 이 실장님.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입니다. 시은이 일 이후로 오랜만에 만나죠?”

유지아 작가의 첫 작품을 함께 한 사이라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유지영은 수한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수한이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어떻게 쫓겨났는지는 유지영도 잘 알았다. 그런 유지영을 수한도 알기에 장난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거야 실장님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잘난 척하는 겁니다.”

수한의 그 말에 유지영도 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새삼 수한의 인맥 관리에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이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죠?”

“네. 유 대표라고 불러 주세요.”

“첫 영화가 잘 되어서 다행입니다. 극장 가서 보고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그럼요. 누가 참여한 영화인데요.”

유지영이 대놓고 수한을 보자 성민이 살짝 놀란 얼굴로 수한을 봤다. 새삼 수한의 실패율이 0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수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 줄 잡으라니까 거절하시네요.”

“와. 이 실장님. 부럽네. 수한 씨가 대놓고 붙잡으라고 한 사람은 이 실장님이 처음인 거 아시죠?”

유지영은 대충 눈치로 맞췄다. 수한은 그런 유지영의 눈치에 미소를 짓다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이광무 감독을 발견했다. 그래서 수한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기실에 있는 이광무 감독에게로 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뭘. 그래도 언제까지 이런 걸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나이가 있다 보니 이런 일정이 벅차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광무 감독의 체력은 오롯이 영화 촬영에만 소비되었으니까. 그 소진된 상태에서 바쁜 일정을 돌려고 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런 수한의 걱정하는 모습에 이광무 감독은 농담 식으로 말을 던졌다.

“영화는 잘 나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쪽 걱정이 아닌 걸 알면서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는 모습에 수한은 걱정하지 않는다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하긴 이광무 감독은 꽤 오래 살았고, 그 살아온 만큼 명작을 뽑아냈다. 건강 걱정하기에는 인생을 오래 산 편이었다.

“감독님. 가셔야 합니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이광무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도 슬슬 VIP 시사회 장소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함께 대기실에서 나갔다가 갑작스럽게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예진이었다.

수한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예진을 보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여신 분위기가 물씬 났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더 장난이 아니다.

‘왜 갈수록 더 예뻐지는 것 같지?’

기분 탓이라고 하기에는 근처에 있는 스태프들도 넋 놓고 예진을 보고 있었다. 수한은 예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지 않나 기억을 되짚어 보고는 웃게 되었다. 놀란 수한과 다르게 예진은 그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며 평소처럼 말했다.

“뭐야. 어디 갔나 했더니 감독님이랑 있었어?”

“그럼요. 혹시 저 기다리셨어요?”

수한이 웃으면서 말하자 예진은 불만 섞인 얼굴이 되었다. 대답은 안 했지만, 기다렸다고 이미 얼굴이 말해 주었다.

“감독님 건강이 걱정되어서요.”

“그래? 많이 힘들어하셔?”

예진의 태세 전환에 수한은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 예진이 수한을 노려보았지만, 그 안에서 분노를 느끼지는 못했다. 수한이 계속해서 웃자 예진은 잠시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똑같이 웃었다. 수한은 가야 한다는 스태프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예진이 가기 전에 작게 속삭였다.

“오늘 되게 예쁘시네요. 팬분들이 좋아할 것 같습니다.”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는데 유난히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수한은 그 이유를 알았지만, 미소를 짓는 것으로 모르는 척하며 예진이 가는 것을 지켜봤다.

VIP 시사회를 하는 관으로 가자 연예인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수한은 눈으로 수치들을 확인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소원 씨, 시은 씨. 오랜만입니다.”

“역시 오셨네요?”

“오빠. 오랜만이에요.”

시은도 예진 못지않게 시간이 지날수록 예뻐졌다. 굳이 따지자면 수한의 첫 번째 연예인이 시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수한은 예진의 매니저를 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참 미안했다.

이것저것 도전하며 영역을 넓혀 가는 예진과 다르게 시은은 본인이 잘하는 연기를 하는 편이었다. 도전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다면 하지 않는 편이었다. 수한은 직접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하지만, 짐작은 했다.

‘유성준.’

시은이 믿고 열애를 인정했다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 과거의 떠오르는 신인이었다. 만약 수한이 나서지 않았다면 수한이 아는 미래대로 진행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수한이 가장 영향을 준 건 소원이었지만, 은근하게 많은 사람의 미래에 개입하여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저 완전 오빠한테 서운해하는 거 알아요?”

“네?”

“오빠가 참여한 드라마랑 만나기만 하면 필패잖아요.”

그런 것치고는 필모그라피가 나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시청률이 잘 나오는 편은 아니었기에 그건 수한도 인정했다.

“대표님은 오빠 이름만 대면 아주 질색해서. 예진 언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만약 이광무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다면 예진도 참여하기 힘들어질 뻔했다. 하지만 시은과 다르게 예진은 제멋대로 하는 경향이 컸다. 자신을 방해하면 소송도 불사하지 않겠다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에 비해 시은은 불같긴 하지만, 유성준의 영향으로 침착해진 편이었다. 그래서 남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수한은 옆에서 조용히 웃는 소원이 귀여워서 웃었다. 그런 남일의 뜻을 어기고 뒤에서 몰래 손을 잡고 있으니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

“왜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한은 안으로 조용히 들어온 장준환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장준환은 전혀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히며 뒤로 가서 앉았다. 그러면서도 수한은 장준환이 소원과 수한을 번갈아 본 것을 확인했다.

‘내 약점은 잡혔다는 말이네.’

수한을 이용할 생각이라 했으니 그 절차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였다. 그리고 수한은 장준환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

[오늘 끝나고 저와 시간을 갖는 게 어떤가요?]

------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있는 약속도 취소해야 하는 존재가 장준환이었다. 수한은 기꺼이 좋다고 대답한 뒤 이광무 감독에게는 다음에 찾아가기로 했다.

VIP 시사회라고 하여도 일반 관객들도 참여하기에 출연자들이 들어와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수한은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가져가 이광무 감독과 예진에게 건넸다. 옆에서 데이빗 랩이 차별이 심한 거 아니냐는 듯이 수한을 봤지만, 수한은 못 본 척하며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내가 굳이 남자한테 꽃다발을 줄 필요는 없지.’

수한이 장난스럽게 데이빗 랩을 보자 데이빗 랩도 황당하다는 듯이 보면서도 웃었다. 그도 남자한테 굳이 꽃다발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수한은 한마디씩 하는 배우들을 보다가 묘한 눈으로 예진을 보는 데이빗 랩을 발견했다.

‘어?’

애정이 잔뜩 담긴 눈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수한은 편하게 의자에 기댔던 허리를 바짝 세우며 데이빗 랩을 보았다. 그러면서 데이빗 랩이 말하는 동안에 예진을 보는데 수한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어떻게 저렇게 관심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말할 수 있지?’

그렇다고 쌩한 것도 아닌데 이상했다. 이성적 호감이 전혀 없는 게 보였다. 그래서 수한처럼 두 사람의 사이를 살짝 의심했던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나 예진의 팬들은 함박웃음을 보이며 좋아했다.

수한은 인사를 마치고 함께 자리로 가는 배우들을 보다가 어느새 영화관 안이 깜깜해지는 걸 느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잘 만들어졌다. 과연 이광무 감독의 영화답게 모든 게 완벽했다. 수한은 그중에서도 데이빗 랩의 연기와 예진의 연기에 감탄했다.

예진은 저번 영화보다 더 발전된 연기를 보였다. 연기자들끼리는 합이 중요하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의 연기 합이 아주 잘 맞았다. 특히나 예진에게 호감을 보이는 데이빗 랩의 눈빛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거 참.’

수한도 대본을 본 사람이니 저 연기가 맞는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쯤 되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저 배우가 예진 씨한테 관심이 있네.’

아무리 봐도 연기에 사심이 섞여 있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연기하다 보니 사심이 생겼을 수도 있다. 배우들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다고 하니까. 그래서 연기를 하다가 눈 맞은 경우도 많았다. 그저 그게 열애설로 안 이어진 것뿐이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예진은 지금처럼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다. 거의 민낯으로 연기를 했다고 해도 다름이 없었다. 예진의 민얼굴을 수한도 많이 봤기에 예진이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는 잘 알았다. 그러니 예진에게 호감이 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짝짝짝.

수한의 마음과 별개로 누가 이광무 감독의 영화가 아니랄까 봐 영화가 아주 잘 빠졌다. 이 영화가 흥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정도였다. 수한의 대중적 감각이 아주 높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대본이 좋은 배우를 만나니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네.’

한 배우의 연기만으로 흥한 드라마가 존재하기는 했다. 수한은 과거의 캐스팅은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이번 작품을 이 경우에 넣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지만, 수한은 이 영화를 한 줄로 줄일 수 있었다.

‘데이빗 랩. 눈빛이 다 했다.’

특히 예진을 바라볼 때 눈빛이 아주 좋아서 수한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멀리서 수한을 지켜보는 장준환을 발견했다. 일정이 끝났으니 장준환을 만날 차례였다. 하지만 그전에 수한은 예진에게 다가가는 데이빗 랩을 눈에 담았다.

예진은 역시나 콧대가 높은 사람답게 끝나기가 무섭게 쌩하니 나가 버렸다. 그게 이상하게 좋아서 수한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관에서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