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10. 터닝 포인트
수한은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사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강우형은 깨어나지 않았고, 그 상태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시간을 내어 병원에 가 보게 된 수한은 착잡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침대 위에서 인공호흡기에만 유지하는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게 느껴지던지 엘 엔터테인먼트를 당장에라도 삼킬 듯한 지배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만약 내가 과거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도 최소 저 상태겠지.’
미래의 수한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강우형과는 달랐을 거라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수한은 강우형과 다르게 망해 가는 기획사 대표였으니까.
강우형이 사라지면서 생긴 파장은 꽤 강력했다.
강우형이 그동안 해 왔던 게 많아서 그런 거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단순히 사람들 입에 오르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로서 강우형이 벌인 일은 많았다.
솔직히 말해 수한은 처음 나이수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잘못 전화한 줄 알았다. 설마 강우형이 진행하던 것을 나이수가 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참 냉정하네.’
이 사회가 약자에게 냉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걸 이런 식으로 보여 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강우형이 다행인 건 그가 장준환이라는 끈을 잡고 있다는 거다. 장준환은 결코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다.
수한은 처음 나이수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 장준환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아직 누가 범인인지 확정이 되지 않았지만, 나이수도 강력한 범인 후보이니 말이다.
장준환은 수한에게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를 권했고, 수한은 덕분에 엘 엔터테인먼트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수한은 예산으로 편성된 금액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대놓고 성공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았네.’
전에 편성한 것의 두 배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엘 엔터테인먼트 아이돌로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물론 살짝 권유 비슷하게 말하기는 했다. 주연이 안 되면 조연으로라도 써 달라고 말이다. 수한은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기에 일단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러고서 소원에게 겨우 전화를 했다. 약속을 미룬 죄인으로서는 할 말이 없는 상황이지만, 소원은 수한을 이해해 주었다.
[그렇게 바빠서 어떻게 해요?]
소원의 걱정하는 말에 수한은 괜찮다며 다시 약속 시각을 잡자고 했다. 이미 장준환과 손을 잡았기에 거의 통보나 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소원에게는 말해 줘야 했다.
[좋아요. 만나요. 약속 장소는 제가 정해도 되죠?]
“네. 물론입니다.”
[아! 내일 우리 만나죠? 내일 이야기하기에는 좀 무리인가요?]
“네. 보는 눈이 많아서요. 따로 약속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지난번에도 그랬으므로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수한은 전화를 끊고서 쌓인 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장준환이 뒤에서 도움을 주고 있어서 힘들긴 해도 무리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수한은 내일 있을 일정을 보고 잠깐 기절했다가 일어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벌써 이광무 감독의 영화 시사회가 잡혔다. 무려 VIP 시사회라 제대로 차려입고 가야 해서 수한에게 부담 아닌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내일 웃을 준비를 미리 했다.
그리고 잘 준비를 하려는데 수한은 문득 조금 전 소원과 대화한 내용이 생각났다. 내일 수한과 만난다고 했다.
‘예진 씨가 출연한 영화이니 내일 VIP 시사회에 오나 보네.’
이미 연예계에도 소원과 예진의 친분을 잘 알기에 당연히 초대했으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예진이 소원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었다. 두 사람의 계속되는 우정을 생각하니 수한은 살짝 부럽기도 했다.
‘나도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성민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수한은 성민과 만나면 이직을 권유해 볼까 가벼운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
‘대단하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냥 시사회도 아니고, 레드카펫을 깔아 버렸다. 일반 시사회와 VIP 시사회를 함께 진행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수한은 이광무 감독에게 미리 인사하러 일찍 왔기에 당황스러웠다.
‘하긴 무려 데이빗 랩이 오는 자리인데 이래야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해외 스타이다 보니 이 현장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광무 감독도 이런 화려한 현장을 싫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수한은 저 레드카펫을 걸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조금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연예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딱히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연예인이 될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수한이 먼저 거절이다.
수한은 대기실로 가려다가 갑자기 자신을 붙잡은 손길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제 수한이 떠올렸던 얼굴이 보이자 크게 반가워하게 되었다.
“이 실장님!”
“혹시 해서 왔더니 맞았네.”
“일찍 오셨네요.”
그러고 보니 예진이 아직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있었다. 예진과 친한 얼마 안 되는 연예인들이 다 여전히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있기에 수한은 성민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깨닫고는 웃었다. 수한이 반가워서 손을 잡자 성민이 먼저 징그럽게 왜 이러냐면서 손을 떼었다.
“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식사는 하셨습니까?”
“예진이 알잖아. 음식 냄새 풍기면서 오면 싫어할 게 뻔해서 말이야.”
수한은 그 말에 웃으면서도 최근에 만났던 예진을 떠올렸다. 처음에 비하면 까칠함이 많이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긍정적으로 변한 것이나, 성민의 반응을 보니 변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진 씨가 실장님한테 마음을 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 상태니까.’
하지만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예진의 태도는 묘한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면 식사는 못 하시겠네요.”
“근데 오늘 꽤 멋지게 차려입었다?”
안 그래도 주변에 시선이 살짝 느껴져서 수한도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특히나 소원의 팬들은 이미 수한을 알아보았다. 수한의 시선이 닿을 때면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으니 말이다.
“소원 씨가 여기 오는 걸 어떻게 알고 벌써 저렇게 왔을까요?”
“내부 고발자가 있나 보지.”
별로 웃긴 내용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웃게 되었다. 수한은 성민과 주변을 돌면서 시간을 잠시 보내기로 했다.
“이렇게 있으니 제가 매니저 일 할 때가 생각나네요.”
“지금이 좋아? 그때가 좋아?”
“당연히 그때요.”
“그래? 의외네.”
“도둑질 중에 월급 도둑이 최고거든요. 일한 만큼 버는 것도 좋지만, 혼자 하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요.”
반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지라 성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독립을 하고 싶으나, 용기가 없었다. 수한의 경우 잘 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라서 더 그랬다.
“난 그래도 네가 부러워.”
“이직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뭐, 저번에 말한 스카우트 그거 하려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성민의 모습에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민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심이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준비는 거의 다 된 상태거든요. 물론 좀 더 안정화된 후에 스카우트 제안을 할 생각입니다.”
성민의 눈빛이 제대로 흔들렸다. 그러나 성민은 곧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족 회사인데 내가 어떻게 그만두겠냐.”
특히나 과거의 일을 반성하고, 다시 제대로 일어서겠다는 사람 앞에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 대답을 예상했기에 수한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말이다.
“요즘 가온 분위기는 어떻나요?”
“나쁘지 않아. 그럼 주혁이가 너희 회사 1호 연예인이겠네?”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주혁과도 섭섭지 않게 정이 들었기에 성민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수한이 없는 동안 주혁이 꽤 고생을 많이 했기에 성민은 기꺼이 보내기로 했다. 게다가 남일이 붙잡지 않는다고 했으니 서로 잘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더 잘되었으면 했다.
“회사 잘되어도 나 모른 척하기 없기다.”
“글쎄요. 그건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요? 실장님께서 절 먼저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뭐? 김수한이. 너 많이 컸다?”
“실장님이 키워 주신 덕분입니다.”
수한이 가볍게 장난치자 성민이 크게 웃었다. 수한은 냄새 걱정을 하는 성민을 위해 근처에서 빵을 사서 건네주었다.
“먹고 양치해야겠군.”
“그건 당연한 예의고요.”
“연예인은 주혁이 말고도 누구 생각하고 있어?”
“기업 비밀입니다.”
성민이 비밀을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조심할 필요성은 있었다. 성민도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걸로 섭섭해하지는 않았다.
“강우형 이사 말이야. 깨어날 가능성 없어 보이지?”
“이게 드라마나 영화였으면 기적적으로 일어나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이잖아요.”
“그렇지. 가만 보면 현실이 참 냉정해.”
수한은 조용히 동의하며 커피를 마셨다. 레드카펫 현장은 스태프들로 인해 정리가 잘 되었다. 그러면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몰리자 열심히 정리하는 게 보였다.
“감독님도 저기로 오시나?”
“아마도요? 주목받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시간을 확인하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수한은 성민에게 먼저 가 보겠다고 인사를 건네고 이광무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달려갔다.
“메이크업 받으셨네요?”
“이런 건 평생 사진으로 남으니까.”
이광무 감독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한은 처음 만났던 일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나름 젊은 애들처럼 입은 건데 노숙자 취급을 받았던 것 말이다. 그건 이미 이광무 감독의 기억 속에서도 흑역사가 되어 수한은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도 오늘 참석한다고 하더군. 자네를 밀어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어.”
“아! 말씀하셨군요.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니지. 그 사람 마음에 든 건 자네 실력이니까 말이야. 다만 너무 의지하지는 마.”
“네. 알고 있습니다.”
장준환에게 투자를 받을 생각이긴 하지만, 수한도 최소한의 도움만 받을 생각이었다. 수한은 강우형이 충고한 것도 잊지 않았다. 남녀 간에만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 사람을 너무 믿지도 말아야지.’
수한은 이광무 감독의 차에서 먼저 내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차에 데이빗 랩이 올라타는 것을 보고 쓰게 웃었다.
‘내게도 저런 순간이 과연 올지 모르겠네.’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살짝 부럽기도 하면서도 수한은 후회 없이 레드카펫 현장까지 다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먼발치에서 이 현장을 함께 지켜보는 성민을 발견했다.
‘역시 아쉽긴 하네.’
믿음직한 동료와 함께 회사를 차리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힘든 일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