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10. 터닝 포인트
수한은 방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강우형에 깜짝 놀라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왔는데도 강우형이 더 빨리 와 있었다. 게다가 이미 음식까지 나와 있어서 놀랐다.
“안녕하세요. 먼저 와 있었네요.”
“제가 먼저 약속을 잡았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면 빚을 진 사람이 먼저 나와 있어야 하는 게 맞지만, 수한은 어차피 그 빚을 갚을 생각이었으므로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강우형이 기획하는 드라마의 차기작 캐스팅이 끝나지 않았기에 수한이 할 일이 있었다.
‘그보다 내가 타이밍 좋게 왔네.’
수한은 다른 것보다 오자마자 식사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음식들도 하나같이 몸에 좋은 것들이었다. 수한은 해신탕을 잘 먹던 예진이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뭐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네? 아니요. 그냥 누가 떠올라서요.”
음식을 굉장히 잘하는 집이니 예진을 데리고 와도 잘 먹을 것 같다. 아니, 예진뿐만이 아니라 누구를 데려와도 잘 먹을 것 같아서 수한은 계약 전에 이 식당에 한 명씩 데려올까 즐거운 고민을 했다. 물론 한 명씩 데려오면 돈이 상당히 나가겠지만, 그 정도 돈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 내 가수, 내 배우들 먹이는 건데. 거기에 돈 아낄 게 뭐가 있어.’
“술 드시겠습니까?”
“아, 네. 좋죠.”
장준환의 때와는 또 달라서 수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형이 종업원을 부르자 알아서 술 한 병을 가져오는데 도자기 병에 담겨 있어서 그런지 꽤 값나가 보였다.
“전통주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저는 와인보다는 이런 술이 더 잘 맞더라고요.”
강우형이 따라 주는 술을 맛보니 그 말대로 뒷맛이 깔끔한 게 좋았다. 다만 전통주답게 도수가 높은 편이라 절제하며 마셔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제게 진 빚은 어떻게 갚을 겁니까?”
“돈으로 갚아야죠.”
장준환에게는 통했던 말이었지만, 강우형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건 당연히 딸려 와야 할 것이지 거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요. 저는 다른 거로 받고 싶은데요.”
“너무 무리한 것만 요구하지 않으면 됩니다.”
수한의 긍정적인 대답에 강우형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이상하게 범상치 않게 느껴져 수한은 살짝 긴장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장준환이라는 사람을 압니까?”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이광무 감독님 소개로 만난 분입니다.”
설마 강우형의 입에서 장준환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기에 수한은 놀랐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우형까지 알고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신뢰감이 들었다.
“사실 수한 씨에 관한 건 제가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네?”
“회장님과 저는 자주 술자리를 갖는 사이입니다.”
수한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안 그래도 장준환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테스트까지 하며 손을 잡으려고 한 건지 궁금했다. 손을 완전히 잡기 전에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강우형이 그 답이라니까 이해가 되면서도 신기했다.
‘그보다 회장님이라고 부르는구나.’
하긴 그 풍기는 기세가 회장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저에 관해서 좋게 말씀하셨나 보네요.”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두 사람을 연결할 목적으로 말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가는 모임에는 저뿐만이 아니라 서남일 대표도 있습니다.”
수한은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강우형이 수를 쓸 때마다 남일에게 잘 통했던 이유가 그래서였다. 수한이 미소를 짓자 강우형이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는 그러면…….”
“회장님이 서 대표를 버리고 그 자리에 수한 씨를 넣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건가요?”
“아니요. 저는 그 손을 쉽게 잡지 말라고 권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수한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장준환에게 함부로 투자받지 말라는 거다. 수한이 의문을 담은 채 강우형을 보자 뜻밖에 진실이 들려왔다.
“서 대표가 고주혁을 순순히 보내 주는 건 회장님께 약점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아! 그게 그렇게 된 거였군요.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요.”
“아마 회장님께 돈을 받으려면 수한 씨의 약점까지 다 노출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이사님께서도 그렇다는 거네요.”
“그렇죠.”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강우형은 절대 후회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긴 엘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 자리에 올라가 있는데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나는 어떻지?’
그를 감수할 만큼 급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니었다. 애초에 이 눈이 있는 이상 수한이 실패할 일은 없었다. 변수가 일어날지언정 수한은 가진 능력을 활용 못 하는 무능력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해 주시는 이유가 뭐죠?”
“수한 씨한테 계속해서 도움받고 싶다는 제 성의죠. 수한 씨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저와 같이 회장님이 필요한 입장이니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한은 강우형의 안목에 소름이 돋았다. 괜히 엘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이사가 아니었다. 물론 그동안 수한이 실패를 보인 적이 없으나, 남일처럼 반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저렇게 남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좋습니다.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상황에 맞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 무리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빚은 그걸로 지웁시다.”
과연 강우형다운 말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빚을 지우는 게 더 강우형에게 이득이었다. 물론 수한이 앞으로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가능성을 보고 건 도박이지만, 수한은 자신을 올바르게 본 강우형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사람한테 더 잘해 주고 싶은 게 사람의 본능이지.’
“할 이야기 다 했으니 식사나 더 할까요?”
“네. 좋습니다.”
장준환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 자리에서 당장 정하지는 못하겠지만, 확실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무엇이 약점인지도 찾아봐야 했다.
‘내게 약점이라는 게 있을까?’
어떻게 보면 오만한 말이지만, 수한은 그것까지 계산하며 돈을 벌어온 사람이다. 적어도 세금 쪽으로는 걸릴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작곡가 에이치로서 벌인 돈도 세금으로 열심히 냈기에 걸릴 게 없다지만…….
‘이상하게 소원 씨가 마음에 걸리네.’
소원이라는 예명으로도 작곡하지만, 가온 엔터테인먼트 몰래 다른 주머니를 찬 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세금 문제도 수한이 다 해결했지만, 이건 도의와 관련된 문제이니 말이다.
남일이 더럽게 물타기를 시작하면 좋지 않은 문제로 발전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걸 누가 알고 있느냐가 문제이긴 하지.’
누군가 대놓고 알아보려고 노력한다면 알 수 있기는 했다. 다만 법을 어긴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나라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준환만큼의 재력을 지닌 사람이 그런 걸 알아보는 건 껌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모르는 게 확실한 것 같네.’
나름대로 수한의 뒷조사를 하긴 했지만, 작곡가 에이치로 소원과 함께 활동하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간에, 알려 줘야 할 사실은 제대로 알려 줬기에 수한은 감사의 의미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물론 이 감사한 마음은 돈으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
남일은 사진에 찍힌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잘 아는 얼굴이 사진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남일은 강우형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김수한이랑 여기서 만났다는 거지?’
남일에게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한정식집이기에 남일은 충격을 받았다. 생각한 것보다 두 사람이 더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쫓아내고 김수한을 들이려는 건 아니겠지?’
생각만으로도 뚜껑이 열리는 내용이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장준환, 그 사람이 얼마나 까다롭게 사람을 보는데 자신의 자리를 수한에게 줄 리가 없다.
‘일단 회장님을 따로 만나야겠어.’
그러나 남일이 아무리 전화를 해도 장준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남일은 한정식집에 전화를 걸어 장준환이 식당에 오게 되면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장준환은 그 집의 오래된 단골이기에 식당 측에서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래서 남일이 택한 건 사람을 고용하는 거였다.
남일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보고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준환이 왔다. 그것도 혼자 왔다고 한다. 단둘이 만날 좋은 기회였다.
장준환은 한번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편이기에 남일은 무슨 말을 할지 정리하면서 갔다. 운전은 어차피 운전기사가 따로 있었기에 걱정할 게 없었다.
“어서 오세…….”
종업원이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남일은 늘 가던 방으로 갔다. 장준환이 오면 늘 안내하는 방이 있기에 그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남일이 문을 확 열자 보인 건 장준환 혼자였다. 아직 약속 상대가 오지 않은 건지 그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서 대표?”
“제 연락을 받아 주시지 않아 직접 왔습니다.”
“저기 이렇게 막 문 여시면 안 돼요.”
뒤늦게 쫓아온 종업원이 장준환을 향해 죄송하다고 인사했다. 장준환은 물론 불쾌해하기는 했으나, 이 일이 종업원의 잘못은 아니므로 괜찮다며 종업원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하고 가세요.”
“강우형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오해입니다.”
장준환은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대체 무엇이 오해라는 건지 모르겠다. 장준환이 계속해보라고 남일을 보자 남일이 대뜸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제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거의 빌다시피 간절하게 보는 눈빛 때문에 장준환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기에 곧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언제 서 대표를 버린다고 했나요?”
“투자하신 걸 뺀다는 말로 이미 절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제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회사가 성장했으니까요.”
좋게 들으면 좋은 의미이지만, 남일도 돈에 관해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강우형이야말로 장준환이 손 떼어야 할 인사였다. 아직 중소 기획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일과 비교하면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한 대형 기획사를 손에 쥐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건 무의미했다.
“그럼 저 대신 누구를 들일 생각입니까?”
“누구를 들이다뇨. 누구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남일이 가장 잘 알았다. 저 대답으로 오히려 남일은 확신을 품게 되었다. 장준환이 누구와 만났는지 알아보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장준환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 내 뒷조사라도 할 생각이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다른 건 몰라도 보복은 확실히 하는 게 나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에요.”
이미 남일을 협박한 전적이 있기에 남일은 소름이 돋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확실히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더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위협도 느껴져서 남일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치욕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가 버렸다고 여전히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인데 먼저 변한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려봤으면 좋겠네요. 그럼 가 보세요.”
차가운 장준환의 말에 남일은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가슴에서 타오르는 분노를 어쩌지 못했다. 그 순간, 남일의 눈에 강우형이 보였다. 장준환과 약속을 잡은 사람이 강우형이었는지 걸어오는 방향도 같았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오는 중이었기에 아직 남일을 발견 못 한 게 보여서 남일은 조용히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 가운데 들려오는 강우형의 목소리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남일의 이성을 끊어 냈다.
“굳이 두 사람에게 투자할 필요가 없죠.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