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10. 터닝 포인트
성민은 요즘 출근할 때마다 사직서를 한 번씩 더 보게 되었다. 처음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다닐 때만 해도 이 손으로 직접 사직서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갈수록 실망을 안겨 주는 남일의 모습에 더는 이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더는 그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 백수로 지내 보지, 뭐.’
정을 붙인 연예인들이 있어서 아쉽긴 했지만, 그 마음을 자꾸만 돌이키는 게 남일이었다. 성민은 특히나 이번 주혁의 일로 크게 실망했으므로 사직서를 기꺼이 내기로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막상 대표실에 가니 예상과 다른 말을 하는 남일이었다.
“고주혁은 그대로 내보내기로 했어. 재계약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네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심했던 것 같아서.”
성민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웬일로 제 말을 들어준 남일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남일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 해 준다면 굳이 그만둘 필요가 없었다. 성민은 사직서를 품 안에 꼭 간직하기로 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동안 내가 섭섭하게 했던 게 많았지. 미안해.”
“아닙니다. 저도 그동안 너무 죄송했습니다.”
“다시 정신 차렸으니까 열심히 해 보자고.”
“네. 대표님.”
남일의 반성 어린 말을 들으니 성민은 마음이 더 들떴다. 얼굴만 봐도 진심인 게 느껴졌다. 성민은 웃으면서 인사를 한 뒤 바깥으로 나왔다. 안 그래도 주혁의 일로 마음이 너무 무거웠는데 덕분에 가벼워졌다.
‘근데 무슨 계기로 달라지신 거지?’
어제 모임에 나간다더니 그게 영향을 준 건가 싶었다. 어쨌거나 성민에게는 긍정적인 변화라서 기분 좋게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성민의 예상과 다르게 긍정적인 변화는 절대로 아니었다. 남일은 가식적인 미소를 싹 지운 뒤 무섭게 성민이 나간 문을 노려봤다.
“단순한 놈.”
언제 수한에게 가서 이를지 모를 사람을 남일이 믿을 리가 없었다. 이미 성민이 수한과 연락하고 지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남일의 눈에는 그저 성민이 배신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해서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니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성민이 안다면 어처구니없을 생각이었다. 누구 때문에 이 회사에서 안 나가고 버티는 건데 그걸 가장 몰라주는 게 남일이었다. 남일은 성민의 뒤에서 사정을 듣고 있을 수한을 생각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남일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자신을 버리기로 한 장준환과 강우형을 절대로 가만 놔둘 생각이 없었다. 특히나 강우형의 존재는 불편하다 못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남일은 장준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렸다.
“당장 투자한 돈을 빼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준비는 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남일을 버리겠다는 소리와 같았다. 장준환이 투자한 돈이 엄청났기 때문에 남일은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다 초조해졌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강우형이 이 일의 원인이니 그놈을 제거하면 회장님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자 초조했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더불어 위험하게 눈이 빛났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는데 두 번은 못하랴?
‘아니지. 아직은 아니야.’
당장 움직였다가는 예전처럼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일은 조금 더 상황을 살핀 뒤 움직이기로 했다. 특히 장준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그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
“아! 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수한은 성민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성민이 고민하다가 주혁의 일을 수한에게 말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남일의 예상이 조금은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성민은 주혁이 걱정되어서 연락한 거였지, 절대로 내통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처음에 걱정한 것과 다르게 일이 잘 풀렸기에 성민은 기분 좋게 수한에게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전화를 했다. 안심한 성민과 다르게 수한은 다른 생각을 했지만 말이다.
‘무슨 생각이지?’
솔직히 주혁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파장은 예상했다. 하지만 수한은 알면서도 밀고 나갈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이슈를 가져와도 대중에게는 안 먹힐 게 뻔해서였다. 노래가 좋으면 대중은 쉽게 용서해 준다.
‘주혁이가 군대 안 간다고 약은 수를 쓰지 않는 이상은 다 수용이지.’
게다가 남일이 아는 내용을 수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비록 여자 관계가 복잡하기는 했지만, 이미 다 해결된 후였다. 수한과 계약하기로 한 순간부터 주혁은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을 반성하며 당사자들에게 사과하고 다녔다.
‘용서를 안 한 사람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용서해 주었지.’
주혁의 본성이 나쁘지 않아서 나온 결과였다. 용서하지 않은 사람도 딱히 나중에 말을 꺼내지 않을 거라는 말을 했기에 수한은 안심했다.
‘어떻게 보면 주혁 씨가 운이 좋은 것이기도 하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보이는 직업이다 보니 악질적인 사람이 달라붙을 가능성이 컸다. 붙어있으면 있을수록 건져 먹을 게 많아서였다. 그러다 보니 사기꾼들이 가장 만만하게 보는 게 연예인 혹은 연예인 가족이었다.
돈은 많은 데 그를 주체하지 못하니 조금만 꼬드겨도 금세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연예인 가족은 평범한 사회생활이 힘들기에 직장을 다니다가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환경에 쉽게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관심이 생기는 게 사업이었다. 그렇게 사업 병에 걸리기 시작하는 거다. 덕분에 죽어 나가는 건 연예인 당사자였다.
‘지금도 그걸 덮어 주느라 개고생하는 연예인들이 많지.’
평소에 TV에서 안 나오던 배우가 갑자기 많이 출연한다 싶으면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연기하는 걸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으나, 가족 중 한 명이 사업 병에 걸렸을 경우 무리해서라도 많이 나오는 게 보여서 안타까웠다.
‘다행히 내가 아는 연예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
가장 노릇은 할 지어도 가족으로 인해서 무리하게 일하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나 소원은 저작권 때문에 돈방석에 앉은 상태였다. 음원 수입이 많이 나오지 않더라도 부가적으로 나오는 게 커서 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거나, 남일이 주혁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한 말은 수한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 강우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만납시다. 해 줄 말이 있습니다.]
“네. 안 그래도 드라마 일로 말씀드릴 게 있었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회사에서 만나지 말고 지난번에 갔던 한정식집에서 만나죠.]
“좋습니다.”
어차피 강우형에게 빚을 진 것도 있어서 그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이야기해야 했다. 수한은 전화를 끊은 뒤 나름대로 갖춰 입은 상태로 바깥으로 나왔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수한은 오랜만에 보는 렌터카를 보고는 곧장 그 차로 운전해 인천 공항으로 갔다. 그랬다. 오늘은 이광무 감독이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는 게 이광무 감독뿐만은 아니어서 많은 기자가 앞에 대기했다.
‘와. 대단하네.’
수한은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 싶어 괜히 뻘쭘해졌다. 기자들 사이에 서 있으니 그냥 지나가는 잘생긴 행인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그 상태가 오히려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가 안에서 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찰칵 소리가 미친 듯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예진이다.”
찰칵. 찰칵. 카메라를 얼마나 찍는 건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도도하게 걸어오는 예진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으로 쏟아지는 플래시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화보 촬영과는 차원이 다르네.’
그런데 그대로 지나갈 줄 알았던 예진이 점점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그러자 기자들이 더 가까이에서 찍으려고 움직이는데 수한은 예진이 자신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하는 걸 봐 버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기자들을 밀치고 예진을 보호하는 경호원 1이 되어 버렸다.
가까이에서 보는 예진은 얼마나 고생한 건지 전보다 더 말랐다. 그 모습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수한은 기자들이 예진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다가 멀리서 기자들을 피해 도망치듯이 빠져나오는 이광무 감독을 보고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예진 씨를 미끼로 내보낸 거였어?’
수한은 렌터카를 끌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예진의 차에 타게 되었다. 그러자 재원이 반갑게 수한을 향해 인사했다.
“수한아, 오랜만이다.”
“네. 선배님.”
“이대로 출발해.”
“저기 저는…….”
수한이 내리려고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차가 먼저 출발해서 어쩔 수 없었다. 수한은 옆에서 웃는 예진을 보고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저 차 끌고 왔는데요.”
“그래? 아쉽네.”
예진은 선글라스를 벗더니 편하게 의자에 누웠다. 정말 지나가는 말처럼 알아들어서 수한은 어이가 없었다. 수한이 도와달라고 재원을 봤지만, 재원은 앞만 보고 있었다. 아니, 눈이 마주쳤으나, 무서운 살기를 내뿜어서 수한은 얌전히 예진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근데 웬일입니까. 미끼 역할 이런 거 안 좋아하시잖아요.”
“감독님이 시키면 해야지. 어떻게 하겠어.”
너무 예진답지 않은 말이라 수한이 다시 재원을 보자 재원의 살기가 짙어지면 짙어졌지, 옅어지지는 않았다. 마치 수한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것처럼 굴어서 수한은 헛웃음이 자꾸만 나왔다.
“그럼 예진 씨 집으로 가는 겁니까?”
“나 배고파.”
“네?”
“밥 먹고 가자고. 너 맛집 많이 알잖아. 어디 괜찮은 데 없어?”
원래 목적은 이광무 감독이었으나, 수한은 이렇게 된 거 포기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마른 예진이 마음에 걸렸으니 몸보신할 만한 음식을 떠올려보았다.
“그럼 해신탕 먹으러 갑시다.”
“해신탕? 나 그거 TV에서만 봤어.”
“저 아는 곳이 있으니 그리로 가시죠. 주소 알려 드릴게요.”
다행히 서울 가는 길에 걸친 곳이라서 금세 갈 수 있었다. 수한은 어딘가 자신에게 불만이 있어 보이는 재원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와 다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예진의 모습에 그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기로 했다.
수한은 처음 해신탕 비주얼을 보자마자 굳은 예진을 발견했다. 혹시나 비위 상해서 못 먹는 게 아닐까 하고 재원을 봤더니 재원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거 참.’
결국, 수한은 고깃집에서처럼 직접 잘라 주며 두 사람에게 음식을 먹였다. 지금 보니 예진뿐만이 아니라 재원도 말랐다. 두 사람은 아기 새처럼 수한이 덜어 주면 덜어 주는 대로 잘 먹었다. 수한은 특히나 잘 먹는 예진을 보고 뿌듯하게 웃었다.
‘잘 먹으니까 내 마음이 다 편하네.’
당분간은 몸보신할 일이 생기면 예진을 먼저 챙겨야겠다. 그 옆에 있는 재원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