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10. 터닝 포인트
[더 아이돌 OST 음원 차트 장악]
‘더 아이돌’은 OST뿐만이 아니라 시청률까지 함께 잡으면서 큰 인기를 누렸다. 화제성만 잡겠다는 목표와 다르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가 좋더라, 누가 별로더라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초반에는 주연들의 발연기로 인해서 말이 많이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배우가 아무리 발연기를 해도 재미있기만 하면 된다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특히나 나오는 노래마다 좋다 보니 드라마가 방영하는 날이면 ‘더 아이돌’의 신곡이 늘 1위로 올라갔다.
‘강우형이 날개를 달았군.’
남일은 기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이 사업을 주도적으로 한 건 강우형이 아니라 나이수지만, 수한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남일은 강우형의 작품으로 착각했다.
‘김수한.’
생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이름이다. 어딜 가든 들려오니 노이로제에 걸릴 것만 같았다. 특히나 ‘가온에서 일했던 친구였다면서요-’로 말이 시작되면 남일은 가식적인 미소를 짓느라 바빴다.
“네. 제 회사에서 나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덕분에 훨훨 날아가고 있으니까요.”
그 질문만 하면 다행이랴. 요즘도 연락하고 있으면 연결해 달라는 부탁도 듣기에 남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게 김수한이었다.
‘그보다 요즘 왜 회장님께서 전화를 안 하시지?’
남일은 요새 통 연락이 오지 않는 장준환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강우형이 아무리 꼴 보기 싫다고 해도 그가 늘 모임에 나간 건 장준환 때문이었다.
‘강우형이 뭐라고 했나?’
그랬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남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물론 당장 급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따지면 현재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근에 이광무 감독의 작품에 성예진이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어서 회사가 계속해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별개로 이대로 흘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원래 이렇게 평온한 시기가 가장 두려운 법이었다. 큰 사고가 터지기 전의 전조 같은 느낌이다.
남일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들어오라는 말을 한 뒤 차가운 시선으로 성민을 보았다. 성민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보고서를 내민 후 바로 나가려고 했다. 괜히 남일에게 쓸데없는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남일이 더 빠르게 입술을 열었다.
“고주혁과 재계약은 마쳤나?”
수한이 계약서로 장난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해외 공연을 돌면서 주혁이 주는 수익이 막대했기에 계약서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수한이 친 장난을 보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이에요.”
계약 만료 일이 얼마 안 남은 거로 아는데 그 말을 들으니 뒷골이 먼저 당겨 왔다. 하지만 이미 남일의 손에는 주혁의 약점이 다 있기에 상관없었다.
“이걸 보여 주면 설득하기 좋을 거야.”
성민은 남일이 건네주는 서류 봉투를 의아해하며 받았다가 소름 돋았다. 그동안 주혁이 해 왔던 일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정신이 힘들었던 만큼 방황한 시기의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만약 재계약을 하지 않을 시 그 사진을 모두 풀 생각이었다.
“대표님.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뭐가?”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예전의 남일이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원래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가는 사람 안 잡고, 오는 사람 안 막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잡는다고 해도 과연 우리의 뜻대로 해 줄까요?”
성민은 진심을 담아서 이러지 말자고 했지만, 남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확고한 상태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계속 데리고 있을 수 없다면 아예 갈라 버리는 것도 답이다. 그게 수한을 내몰면서 가져 버린 남일의 열등감이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그럼 내가 직접 하지.”
“대표님.”
“너 변했어.”
“저보다 더 변한 건 대표님입니다.”
성민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갔다. 남일은 조금 전에 성민이 놓고 간 서류 파일을 성민이 나간 문으로 던졌다. 그러나 쌓인 분노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남일은 거친 숨을 내뿜다가 갑자기 울리는 전화에 남일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장준환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수한만큼이나 남일도 장준환과 만나는 한정식집을 좋아했다. 워낙 요리를 잘하는 집이라 가끔 혼자라도 와서 먹고 싶은 장인의 맛이었다. 다행히 아직 강우형은 오지 않은 상태여서 남일은 더 반가워했다.
“제가 요즘 뜸했죠. 안부 전화라도 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바쁘시면 그럴 수도 있죠.”
실제로 속은 굉장히 탔으나, 남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입꼬리가 다 아팠다. 안 쓰던 근육을 쓰려니까 벌써 안면이 굳었다.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평화롭죠. 좋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면서 강우형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남일은 그새 평화를 깨는 강우형의 등장에 보이지 않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오랜만입니다. 강 이사님.”
“네. 오랜만입니다. 얼굴이 확 피셨네요.”
정말 확 핀 사람은 강우형이지만, 남일은 그럴 만하다고 여겼다. 나이수가 철저하게 강우형을 경계할 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루어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애초에 경계를 한 게 맞긴 한 건지부터 의심스러운 정황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오랜만에 먹는 한정식집 음식은 시간이 지나도 맛있었다. 최근에도 자주 왔는지 강우형과 장준환은 아무렇지 않게 먹었지만, 남일은 천천히 맛을 즐겼다.
“요즘 가온에서는 좋은 소식이 없습니까?”
“뭐. 그렇죠. 요즘 엘 엔터는 하는 것마다 잘되던데 부럽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제야 나이수 회장님께서 투자한 게 꽃이 피려나 봅니다.”
“그러게요. 수백억을 투자한 게 이제야 빛을 발하게 되었네요.”
강우형의 성공을 탐탁지 않아 한 게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그를 강우형이 모를 리가 없기에 강우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게 다 김수한, 그 친구 덕분이죠.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한 능력자더라고요.”
역시 남일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에는 수한의 이름이 효과적이었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으로는 욕하는 게 다 보였다.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안심한 남일과 다르게 강우형은 이 만남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더 편하게 말했다.
“대표님이 그 친구를 쫓아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나이수 회장님께서도 김수한, 그 친구 어디 있느냐고 찾을 정도라니까요. 사실 이번 드라마 더 아이돌은 제 작품이 아니라 나이수 회장님의 작품입니다. 직접 김수한 그 친구를 섭외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했죠.”
설마 여기서 나이수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언급될지 몰랐기에 남일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나이수를 향한 배신감에 분노가 차올랐다.
‘견제를 김수한으로 했다고?’
강우형보다 더 싫은 게 수한이다. 그 수한의 가치가 수없이 올라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대표님 덕분에 엘 엔터테인먼트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네요. 진심으로 김수한 그 친구를 쫓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탕하게 웃는 강우형을 보며 남일은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욱하고 올라온 감정이 당장에라도 저 면상을 쳐 버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장준환의 웃음소리에 그 주먹은 뻗어 나가지 못했다.
“두 분은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하시네요.”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조금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일은 대놓고 섭섭한 얼굴을 했다. 이번의 경우는 강우형이 말을 심한 게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준환은 남일의 편을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슬슬 남일에게서 손을 뗄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김수한을 밑으로 들이려면 그게 맞지.’
겉으로 보기에는 수한이 남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 같지만,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만약 장준환이 남일의 후원자라는 사실을 알면 수한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장준환은 과감하게 남일을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담아 강우형을 보았다.
‘무슨 속셈이지?’
수한이 투자한 드라마 편성에 강우형이 도움을 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었다.
‘왜 도와준 거지?’
솔직히 강우형이 방해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강우형은 도움을 주는 쪽을 택했다. 장준환의 생각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장준환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강우형이 웃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제법이군.’
장준환이 달리 강우형을 높게 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강우형도 바보는 아니었다. 남일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그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만약 그 거위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거위를 빌릴 생각을 했다. 다만 쉽게 가지지 못하게 손은 써 두었다.
‘이래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지.’
이래서 강우형에게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를 손에 쥐여 주려고 하는 게 컸다. 강우형은 반항심이 있지만, 절대 선을 넘지는 않았다. 저기서 강우형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내는 남일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서 대표.”
“아! 네. 회장님.”
섭섭해하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폈다. 장준환은 웃으면서 가지고 온 서류를 남일에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기에 남일이 의아해하면서 서류를 받자 장준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거래를 합시다.”
“네?”
안에 내용물을 본 남일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가온 엔터테인먼트 관련해서 탈세한 자료들이었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장준환이 공격을 해 올 줄 몰랐기에 남일은 크게 당황했다.
“이걸 왜?”
“지금 하려는 거 멈추시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장준환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명백한 협박에 남일의 눈동자가 제대로 흔들렸다.
남일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강우형을 봤다. 강우형도 장준환이 이렇게 대놓고 협박할 줄 몰랐기에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함부로 이 현장에 끼어들 수 없었다.
“회장님.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요즘 고주혁과 관련해서 움직이는 거로 알고 있어요.”
그 말에 남일은 금세 상황 파악을 마치고 미간을 찌푸렸다. 강우형을 보니 장준환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서로 주고받는 눈짓에 남일은 두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다른 오해를 하게 되었다.
‘엘 엔터에서 고주혁을 탐내는 건가?’
그리 생각하자 모든 의혹이 풀렸다. 수한이 일본까지 가서 주혁을 만난 이유 말이다. 강우형의 입김이었다.
남일의 가슴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남일은 한류를 대표하는 아이돌을 지니고서도 만족하지 않는 강우형을 보고는 기가 막혔다. 더불어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동안 완전히 손을 잡은 것을 느끼고는 남일은 더 큰 배신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고주혁을 얌전히 내놓으라, 이겁니까?”
장준환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이미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럴 것 같아서 그동안 계속 싸했던 모양이다.
남일은 마음 같아서는 못하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손에 쥔 서류가 서둘러 굽히라고 말했다. 지금 굽히지 않으면 이제까지 이룬 게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본능이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하지만 말과 다르게 머리는 다른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우형만큼은 기필코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만다. 남일은 이날의 치욕을 절대 잊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