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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탑스타-129화 (129/186)

129    10. 터닝 포인트

유지영은 바쁘게 돌아다녔다. 신생 회사이다 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확실히 직원일 때와 대표일 때는 주어진 환경이 완전히 달랐다. 직원일 때는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되었는데 대표일 때는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해야 했다.

‘중소기업인데도 갑질하는 회사 사장은 반성해야 해.’

자리를 잡으면 바뀔까 생각했지만, 지금 당장은 너무 바쁘기에 나중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나마 영화는 개봉 날짜를 확정 짓고, 앞으로의 일정도 다 잡은 상태였다. 이제 문제는 유지아 작가의 신작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인맥인데 말이야.’

주연 진도 확정 짓고 대본도 나와서 촬영하고 있으나, 아직 방송국 편성을 받지 못한 게 문제였다. 방송 편성 문제는 이전 제작사에서도 어려운 일이긴 했으나, 지금처럼 애먹지는 않았기에 곤란한 상황에 있게 되었다.

‘하긴 연기자 인지도가 약하긴 하지.’

여자 주인공 유진이 특히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수한의 추천으로 데려온 연기자라서 연기는 분명 잘하는데 트렌디함은 확실히 없었다. 공개 연애가 아무래도 타격이 컸다.

‘이래서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둘 다 고집을 부리니…….’

여기서 말하는 둘은 유지아 작가와 수한이었다. 특히나 이번 결정에는 수한의 입김이 컸다. 수한은 캐스팅 디렉터로 나서면서도 투자자로도 나섰다. 그러니 유지영이 말린다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투자자도 김수한 씨가 데려왔으니 더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방송국으로부터 벌써 두세 번 거절당했다. 물론 거절당했다고 해서 거기서 포기해서는 안 되기에 유지영은 오늘도 방송국을 찾았다가 그 앞에서 기다리는 수한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다행히 늦지 않았네요.”

“어? 진짜로 오셨네요?”

“네. 제가 오라고 했잖아요.”

물론 그래서 오기는 했다. 원래는 내일쯤에 오려고 했는데 어젯밤 갑작스레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

유지영은 수한을 보니 거북함이 먼저 들었다. 그 낌새를 눈치가 좋은 수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왜요? 제가 불편합니까?”

“네. 투자자님이니까요.”

그것도 입김이 아주 센 투자자님이었다. 유지영은 생각 없이 말했다가 아차 싶었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했던 명칭이 어느새 입에 붙어서 자신도 모르게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수한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네?”

“오늘 일은 잘 풀릴 겁니다. 제가 도울 거니까요.”

유지영이 직접 상황을 말하진 않았으나, 수한도 인맥이 넓은 편이었다. 투자자를 데려온 것만 해도 그랬다. 그러니 이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근데 진짜 왜 전 재산을 투자한 건지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수한이 성공하게 한 드라마가 한두 개가 아닌데 왜 하필 이번 드라마에 투자한 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 도와주려고요?”

“방법이 있습니다.”

수한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유지영은 의문을 그리며 드라마국으로 갔다. 그러자 안에서는 무슨 일인지 심각한 목소리가 오가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회의실 같은 데 잡아서 이야기해야 할 사안이지만, 워낙 급한 상황이기에 안에서는 보안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사고가 났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죠? 예고편까지 나가서 방영 날짜가 얼마 안 남았는데.”

“드라마 스페셜 같은 거로는 못 내보내?”

그 말에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드라마가 하루 만에 뚝딱 하면 만들어지는 거냐고 따지는 소리였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그 자리에 다른 드라마 넣어야죠.”

“하지만 이미 편성된 드라마 중에는 이 날짜에 맞춰서 할 수 있는 드라마가 없어요.”

그 순간 똑똑 소리가 울렸다. 유지영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수한이 다시 한번 문을 똑똑 두드렸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 드러내면서 말이다. 유지영은 당황해서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김수한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말씀드린 대로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워낙 진지한 분위기라 그런지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 안에 있던 관계자들의 시선이 수한을 향했다. 수한은 그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그와 관련해서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옆에서 미쳤다고 하는 유지영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수한은 내색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봤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일단 내용이나 들어 보자고 수한을 안으로 들였다.

“일단 저희 소개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수한이 간단하게 소개를 하고, 유지영을 보자 유지영도 최대한 공손하게 소개했다. 조금 전까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중에는 유지영에게 계속해서 퇴짜를 놓던 사람도 있었기에 사람들은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왔는지 금세 알게 되었다.

“설마 그 구멍 난 자리에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네. 이미 촬영 중인 드라마여서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수한이 눈짓을 주자 유지영이 준비한 자료를 내놓았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했던 만큼 좋지는 않았다. 너무 뜬금없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황도 얼마 가지 않았다. 한 통에 전화가 오면서 바뀌었다.

***

일단 이야기는 성공적으로 잘 되었다. 유지영은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게 이 자리에서 당장 결정이 났다고?’

게다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결정권자도 방송국에 있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장 허가까지 단번에 통과되는 현장에 유지영은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한의 인맥이 그녀의 생각 이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이 사람 진짜로 능력자잖아?’

유지영도 이쪽 일을 해 봤기에 일이 이렇게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한은 그 안 되는 것을 해냈다.

‘역시 대한민국은 인맥 사회야.’

그러면서도 수한의 인맥 대상으로 분류되는 유지아 작가를 대단하게 봤다. 더불어 자신까지 챙겨 주는 수한에게 감동 아닌 감동도 받았다.

결정은 오전에 다 되었다. 특히 미리 찍어 둔 게 있다는 사실이 가산점이 되었다.

유지영은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나오면서도 새삼 수한에게 감탄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가 말입니까?”

“사고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지만, 첫 궁금증은 사고였다. 유지영만 해도 사고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한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웃자 유지영이 얄미워하며 수한을 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일이 잘 되었으니 웃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오자고 한 거죠?”

“네. 그렇습니다. 소식을 들은 건 그제고요.”

“근데 그 소식은 왜 오늘 밝혀진 거예요?”

“일단 평범하게 난 사고는 아니어서요. 쉬쉬한 거죠.”

평범하게 난 사고가 아니라면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자들 입을 막을 정도로 안 좋은 일이 엮였을지도 모르겠다.

유지영은 정보도 정보지만, 발 빠르게 움직인 수한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한이 하는 일마다 잘되는 이유에는 인맥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실천력도 존재했다.

“경과도 알고 온 거예요?”

“아니요. 사고당했다는 소식만 들어서요. 혹시 몰라서 오자고 한 겁니다. 그런 의미로 결과가 좋아서 다행입니다.”

정말 우연이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아까 그 현장을 보니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지영은 더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수한을 추궁하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수한과 계속해서 연을 이어 가고 싶어서였다.

‘이런 능력자면 계속 함께해야지.’

“그래도 덕분에 살았네요. 이게 묵히면 묵힐수록 유행이 달라져서 안 먹히거든요. 특히 지아 작품은 그 정도가 심해서 빨리 편성받아야 하는 것도 있고요.”

“네. 그래서 제가 직접 움직인 것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카메라 기술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써도 옛날 드라마는 옛날 드라마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전 제작 드라마인데도 불구하고, 편성받지 못해 사장되는 드라마도 있었다.

“확실히 투자자가 되니까 느낌이 다르죠?”

“네. 마음이 조급해지네요.”

“일도 잘 해결됐는데 점심 먹고 가실래요?”

“하긴 우리가 일찍 오기는 했죠?”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아침부터 난리이니 다른 데서 치고 들어오기 전에 일찍 온 게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으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어디서든 점심은 해결해야 하기에 수한은 유지영과 함께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수한은 뒤늦게 방송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보고 웃는 유지영을 발견했다. 그냥 봐도 즐거워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우리처럼 미리 찍어 두는 데는 그렇게 많지는 않을걸요?”

수한이 긍정의 의미로 웃자 유지영이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방송국 근처이다 보니 어디 아는 맛집이 없다. 그러자 수한이 아는 곳이 있다며 유지영을 끌고 갔다.

“국밥집? 어제 술 드셨어요?”

“아니요. 개인적으로 좋아해서요.”

“잘됐네요. 저는 어제 술 마셨거든요. 안 그래도 아침 안 먹고 와서 혼나는 줄 알았는데 좋네요.”

누가 대한민국 최고의 패스트푸드가 아니랄까 봐 주문하기가 무섭게 국밥이 뚝딱 나왔다. 붉은 국물을 한 모금 마시니 속이 다 시원했다.

수한은 잘 먹는 유지영을 뿌듯하게 보면서 마찬가지로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사실 사고는 내가 아는 몇 개 안 되는 미래여서 기억한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 몰랐네.’

유지영의 드라마에 돈을 투자하면서 살펴본 방송국 차기작들을 보다가 떠오른 기억이었다. 대학로에서 주연 배우를 도맡아 하던 김우리가 조연으로라도 출연하려다가 엎어진 드라마였다. 그래서 수한이 매니저를 했던 때도 아니었는데 기억이 났다.

‘그래. 그때 얼마나 억울해하던지.’

그냥 억울해하고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 불똥이 수한에게까지 튀어서 굉장히 괴로웠던 기억이 났다. 사실 명훈이 아니었다면 수한이 지금까지 원망했을 사람이 대학로 극단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최명훈은 내게 잘해 준 거라도 있지, 그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배척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명훈을 원망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맞은 뒤통수가 더 아프고 아린 법이니까.

“밥 생각보다 천천히 먹네요?”

아침을 안 먹었다더니 유지영은 국밥을 금세 비워 냈다. 반대로 수한은 아직 반밖에 먹지 않은 상태라 서둘러 먹었다. 앞에서 유지영이 천천히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점심시간인지라 사람이 붐비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한은 식당을 위해서라도 얼른 먹고 나왔다.

“식후 커피는 제가 살게요.”

“그럼 맛있게 마시겠습니다.”

수한이 근처에 있는 카페로 가서 가장 비싼 것을 시키자 유지영이 황당해하며 수한을 봤지만, 곧 자신도 마찬가지로 비싼 커피를 시켰다. 일도 잘 풀렸는데 이런 사치를 잠깐 부리는 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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