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10. 터닝 포인트
“일단 먹고 이야기하죠.”
“네.”
평소 같았으면 음식 맛에만 집중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수한의 뻣뻣한 움직임에 장준환이 피식 웃자 수한은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장준환이 먼저 식사를 권했다.
“밥 먹는 동안은 안 잡아먹으니 어서 드세요.”
“네.”
술 한 잔 마시겠냐는 이야기에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영업직에 속한 사람들은 주로 술을 마시면서 협상을 하지만, 수한은 맨정신에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수한의 술이 세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감이 있었다. 술이 들어간 순간 정신이 흐트러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가 그걸로 고생한 적이 있었지.’
신생 기획사이다 보니 술 영업을 많이 했다. 정확히는 수한이 한 것이 아니라 명훈이 한 거였다. 과거의 수한은 무른 편이어서 명훈이 불리하게 협상을 해 와도 수고했다며 격려를 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사람을 상대하는 수한이지만, 예전에는 아니었다.
‘그때 너무 믿고 맡긴 게 있었지.’
더는 돌아갈 수 없는 미래이자 과거였다. 수한은 그 기억을 발판으로 삼으며 앞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
앞으로 중요한 일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한다. 남에게 맡기는 미련한 짓은 더는 하지 않았다. 긴장하는 가운데서 먹는 음식은 여전히 맛있어서 한편으로는 기가 막히기도 했다.
“이번에 정말 고생 많았어요. 쉽지 않았죠?”
“아닙니다. 나름대로 재미있었습니다. 한계를 도전받는 느낌이었거든요.”
수한의 대답에 장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장준환이 생각해도 꽤 어려운 과제였는데 수한은 잘 통과했다. 한계를 도전받는 느낌이라고 수한은 대답했지만, 장준환의 생각은 달랐다.
‘감춰 놓은 실력이 더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인생을 오래 살아서 그런지 장준환에게는 그런 예민한 감이 있었다. 나이수와 그의 차이는 그 감이 여전히 살아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다.
“저도 봤지만, 정말 재미있더군요. 앞으로의 시청률이 더 오를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나요?”
“개인적으로는 비슷하게 시청률이 유지될 것 같습니다. 다만 화제성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비장의 무기로 숨겨 놓은 노래가 있다. 수한은 그 노래의 능력치도 이미 눈으로 봐 둔 상태기에 자신 있었다.
“하긴 이 소재로 시청률이 더 오르기는 힘들겠죠?”
“네. 안타깝게도요. 그리고 지금 타 방송사에서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드라마가 하고 있잖아요.”
80년도를 배경으로 둔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나름대로 그 방송사의 기대작이었고, 시청률 또한 잘 나오는 상태였다. 다만 주 시청자는 40, 50대였다. 광고주들이 겨냥하는 20, 30대는 ‘더 아이돌’을 보고 있기에 ‘더 아이돌’에 들어온 광고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도 투자한 보람은 있습니다.”
“네. 투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열심히 했습니다.”
수한의 아부성 짙은 말에 장준환은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장준환의 눈에 수한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그래도 그의 테스트를 해낸 상태에서 저런 말을 하니 귀엽게 보이지, 그의 돈을 날리게 했으면 괘씸하게 보았을 거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우형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다만 인망으로 따지면 수한이 더 좋은 편이었다. 강우형의 냉정한 성품이 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장준환이 다 뿌듯했다. 특히나 수한이 이 식당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본격적인 말은 식사가 다 치워지고 차를 마시게 되었을 때 하게 되었다. 수한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으나, 눈은 올곧으면서도 찬란하게 빛났다. 처음 보는 사람이 봐도 호감이 생기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장준환은 묻게 되었다.
“김수한 씨가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뭡니까?”
“저는 저만의 기획사를 차리고 싶습니다.”
장준환은 솔직히 말해 놀랐다. 지금 직업을 잠깐 하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 힘들었던 생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건가 했다. 그러다가 미소를 지었다.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남일 대표에 대한 복수입니까?”
“아니요. 저는 복수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수만큼 허탈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명훈이 신경 쓰이긴 하나, 복수는 목표를 이루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수한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수한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게 바라는 건 초기 자금이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하는 일은 그만둘 생각입니까?”
“네. 한 곳에 집중해야죠.”
사실은 부업 삼아 해 볼까 고민도 했지만,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한 곳에 집중하는 게 좋았다. 수한도 이곳 생활을 해 봤으니 어떤 곳에서,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몰랐다.
“도움을 주신다면 더 빠르게 계획이 시행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첫 연예인은 고주혁이 되겠군요.”
안 그래도 수한이 함께한 연예인들과 자주 연락하는 것을 보고 의문을 가지긴 했었다. 그래서 유독 정이 깊은 타입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훗날을 위해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 가는 것이었다. 그중에 계약이 가장 빨리 끝나는 연예인이 주혁이니 그를 처음으로 짐작했다.
장준환은 남일에게도 투자했기에 원하고자 하면 가온 엔터테인먼트 내의 정보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장준환이 대놓고 요구해도 남일은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니까.
수한의 긍정하는 모습에 장준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이라면 투자하기에 나쁘지 않은 가수였다. 계속되는 시즌제로 인해 지금은 망해 가는 ‘SSS급 슈퍼스타’가 만들어 낸 1호 스타가 아닌가?
“좋아요. 제가 투자를 하면 김수한 씨는 제게 무엇을 줄 건가요?”
“돈을 드리겠습니다.”
순간적으로 장준환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수한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장준환도 더불어 진지해졌다.
“그만큼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제 안목에 자신이 있거든요.”
하긴 하는 일마다 다 성공을 거두었으니 저 정도 자신감이 없는 게 이상했다. 장준환의 테스트도 이 정도면 통과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하긴 결과적으로 보면 나도 돈을 벌려고 투자를 하려는 거니까.’
더불어 수한 같은 인재를 자신의 아래에 두는 쾌감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수한에게 대접을 받고 있기는 하나, 그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하지만 저 대답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수한도 그를 잘 알기에 승부수를 던졌다.
“이번에 저는 한 드라마에 그동안 번 돈을 다 부을 생각입니다.”
3년 동안 쉴 새 없이 일했으니 벌어놓은 돈이 상당했다. 장준환은 이미 수한의 재산 상태를 파악했기에 수한의 자금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일반인이 버는 돈치고는 너무 잘 벌어서 왜 굳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리려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장준환은 돈을 가진 사람이기에 수한의 욕망을 잘 알았다. 돈은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는 욕망의 화수분이었다.
특히나 수한처럼 더 큰 돈을 벌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못 죽어도 가는 게 옳았다.
“그걸로 제 안목을 마지막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수한이 전 재산을 거는 도박을 직접 한다고 하니 장준환은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다는데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수한이 저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더불어 수한의 목표를 듣고 나니 강우형이 헛물을 켜고 있다는 생각도 들어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인재가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걸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그전에 가졌던 인재 하나 버리는 건 아쉽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은 쓸모없어진 인재라면 더욱더 그랬다.
장준환은 조용히 남일에게 이별을 고했다.
***
강우형은 책상 앞에 앉아 올라온 보고서를 봤다. 하나같이 수한과 관련된 정보였다. 수한이 한 드라마에 돈을 투자했다는 소식도 함께 실려 있어서 강우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특이한 패턴이었다.
‘하긴 자금 돌리는 걸 보면 보통이 아니긴 하지.’
어떻게 잘되는 회사만 쏙쏙 아는지 주식 투자하는 걸 보면 미래를 알고 투자하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크게 한 방을 노릴 만큼 큰돈을 굴리는 것도 아니어서 주가 조작까지는 의심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운이 좋았다? 아니,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야.’
어떻게 손대는 것마다 될 것만 손대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지금 일하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손대는 것마다 성공하는 걸 보면 그저 안목이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면 운이 미친 듯이 좋다든가.
‘이 정도면 실력이겠지.’
안정적인 것을 좋아해서 드라마나 영화에는 투자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 또 달랐다.
‘갑자기 큰돈이 필요해졌나?’
한 드라마에 이렇게 돈을 몰아서 투자하는 건 또 처음 봤기에 강우형은 의문이 생겼다. 사람이 갑자기 안 하는 짓을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거겠군.’
최근에 장준환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우형은 장준환이 나이수에게 수한을 붙이면서 수한의 능력을 평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미 강우형도 해 본 적이 있으니 알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테스트에 통과했으니 두 번째였다.
‘거의 두 번째는 스스로 하겠다고 하는 경우지만.’
어쨌든 간에, 수한이 장준환의 그물에 스스로 뛰어든 건 틀림이 없었다. 역시 돈 앞에서는 장사 없다. 하긴 어떤 배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는 건 돈이 모자라서예요.]
결과적으로 보면 강우형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수한이 잡지 않은 이유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대로 놓치기에는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들인 공이 컸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김수한을 방해하면 김수한의 가치가 깎이는 게 아니라 김수한의 위치가 깎이는 거겠지.’
전 재산을 걸고 투자한 드라마이니 오히려 장준환에게 유리하게 판이 돌아갈 수 있다. 수한을 장준환에게 주고 싶지도 않고, 제 사람으로도 만들기도 힘드니 강우형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개 안 되었다.
‘방해할 수 없으면 도와줘야지.’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물론 이건 강우형이 대인배라서 가능한 생각이기도 했고, 상대가 장준환이어서 한 생각이기도 했다. 강우형도 장준환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전화 한 통이 왔다. 수한에게서 온 전화였다.
‘확실히 양반은 아니야.’
가만 생각해보면 수한이 이런 식으로 먼저 전화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강우형은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
저녁 열 시였다. 퇴근 시간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강우형은 쌓인 일을 다 해결하지 못했기에 아직 퇴근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오늘 일찍 출근한 그의 비서진도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일하는 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우형은 정말로 나쁜 상사였다. 일찍 출근에다가 늦은 퇴근이라니. 그러나 그만큼의 대가를 월급으로 주니 할 말이 많아도 할 수가 없었다. 그 할 말을 하려면 퇴사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도 어지간히 일 중독자네.’
남들 다 퇴근한 시간에 전화한 걸 보면 확실한 일 중독자였다. 강우형이 계획하는 차기작 관련해서 하는 전화라면 이렇게 늦게 전화할 일도 없기에 강우형은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제가 내일 방송국에 가려고 하는데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 말에 강우형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수한에게 빚을 만들어 놓기 딱 좋은 발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