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10. 터닝 포인트
‘더 아이돌’의 감독은 이름 있는 유명 감독을 데려왔다. 정지원 작가의 얼마 되지 않는 조건이었다. 처음에는 그 감독도 거절했으나, 정지원 작가가 직접 설득하면서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다. 결국, 정지원 작가의 인맥으로 데려온 유명 감독이었다.
감독의 정지원 작가를 향한 믿음은 대단했다. 물론 이 작품의 메인 작가는 김민영 작가였지만, 그 뒤에 정지원 작가가 있으니 거기서 거기였다.
김민영 작가가 글을 쓰면 정지원 작가가 거기서 재미있는 포인트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했다. 평범했던 대사가 정지원 작가를 만나면서 통통 튀니 재미있는 대본이 되었다. 물론 정지원 작가 밑에서 일한 세월이 길었기에 김민영 작가도 기본은 갖춘 작가여서 둘의 시너지가 엄청났다.
캐스팅이 확정되고, 첫 대본 리딩 현장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이기에 서이나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본 리딩 현장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배우 서이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아입니다.”
서이나의 눈이 바쁘게 돌아갔다. 아이돌을 이렇게 많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아이돌 자체를 오늘 처음 봤다. 학생 역할은 서이나를 제외하고 다 아이돌이라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 작품이지만, 갑자기 다른 세상에 확 떨어진 기분에 서이나는 쉽게 적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아이돌끼리는 서로 친분이 있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래도 주눅 들지 말아야지.’
성인 역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배우다. 서이나는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수한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때 다 같이 사람들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서이나 또한 따로 일어서다가 알게 되었다.
‘작가님이랑 감독님이다.’
서로 친분이 있는지 편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바쁘게 들어오는 아이돌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이 드라마의 주연도 있어서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많았다.
‘고작 그 정도 연기력을 가지고 주연을 한다고?’
‘주연이라는 애가 기본 약속도 안 지키네.’
엘 엔터테인먼트 제작이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 여러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어수선한 분위기를 감독이 단번에 잡아 냈다. 솔직히 말해 그도 이 구성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정지원 작가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은 대부분이 탑스타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름을 말하기만 해도 누구나 다 아는 탑스타. 그런 그가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드라마를 찍으려니 막막함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설득한 건 특별한 말이 아니었다.
“감독님께서 믿으실 건 돈과 대본입니다.”
정지원 작가와 함께 감독을 설득했던 수한의 말이었다. 사실 대본보다도 그 말에 가장 크게 흔들렸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이 부족하지 않은 제작 환경이라니 구미가 확 당겼다.
수한에게 그렇듯 감독에게도 이 프로젝트가 그의 한계를 도전하는 거였다. 그래서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참기로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수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수한이 시작해도 된다고 눈짓을 보내자 감독의 입술이 열렸다.
“다 모였으니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지문 읽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배우들의 목소리만이 현장에서 울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주연 배우들의 연기였다. 수한은 진지하게 대본을 봤지만, 몇몇 얼굴에서 웃음이 피어올랐다.
‘너무 못한다.’
‘내가 읽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많은 생각이 오가는 게 곳곳에서 보였다. 주연 배우들도 그런 분위기를 느꼈는지 어떻게든 애를 썼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말투와 억양이 엉망진창이었다. 감독까지 심각하게 여겨질 연기였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리면서 집중이 확 되었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수한이 대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올리니 서이나가 한껏 움츠려진 모습으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과연 천재는 남달랐다. 대사 하나만 쳤는데도 모든 사람의 집중을 단번에 끌어냈다.
------
[서이나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S,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20%]
------
수치로는 지난번과 달라진 게 없는데 연기 패턴을 바꾼 것인지 본연의 능력을 조금 더 잘 발휘했다. 서이나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대본에만 집중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졌네.’
영화 촬영이 서이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게 틀림이 없었다. 수한은 자신이 본 미래대로 서이나가 좋은 배우가 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더불어 서이나는 누가 천재가 아니랄까 봐 함께 대사 치는 주연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주연들의 연기가 조금씩 나아지네.’
상대방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연기하게 만드는 것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나 할 수 있는 거였다. 어린 나이인데도 벌써 그 능력을 습득한 것을 보고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수한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많이 한 중년의 배우들도 서이나를 다르게 보았다.
특히나 서이나를 보는 감독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탑스타가 될 재목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이래서 천재들이 좋아.’
수한은 서이나의 연기를 보며 짜릿함을 느꼈다. 일찌감치 서이나에게 빚을 만들어 놓아서 다행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감독은 그 말을 한 뒤 작가와 함께 빠져나갔다. 그러자 다들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그 가운데 서이나만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혼자 유독 튀어서 그런지 다른 이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게 보였다.
‘이런 문제점이 생길 줄은 몰랐네.’
그래도 현장에서 연기하다 보면 금세 친해지지 않을까 했다. 직장 동료는 그런 식으로 만드는 법이니까. 게다가 수한이 아는 서이나는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우울해하는 게 없지 않아 있어서 수한이 서이나의 앞에 섰다.
“뭐 마시러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서이나 또한 말할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기에 수한의 뒤를 금방 따라나섰다. 수한은 삐악삐악 귀엽게 우는 병아리 같은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영화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른가 봐요.”
“완전히요. 유지영 대표님이 절 엄청 챙겨 줬거든요. 챙김만 받다가 다른 현장에 오니까 적응하기 힘드네요.”
수한은 자신을 기회주의자로 보면서도 막상 자신이 더하는 유지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서이나를 데려온 건 정말 타이밍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근데 저 아이돌 처음 봐요. TV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다들 예쁘고 잘생겼네요.”
서이나는 소원이 살짝 떠올랐지만, 서이나에게 있어 소원은 아이돌이 아닌 솔로 가수였기에 그 생각을 부정하며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서이나 씨도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요.”
수한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진짜 미니 성예진이었다. 성예진이 어리면 딱 서이나일 것 같다.
“하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저한테 말씀하십시오.”
“와, 저 든든한 배경 생긴 거예요?”
“애초에 서이나 씨를 데려온 게 저이지 않습니까?”
일부러 빚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서이나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곧 예쁜 말을 했다.
“그래도 제가 선택한 거니까 일단은 혼자서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리고 사람들도 나쁘게는 안 보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건 조금 성급한 판단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수한은 대본에 집중하면서도 주변을 다 본 상태였다. 주연들이 연기를 못하다 보니 솔직한 생각들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시기, 질투, 비난. 서이나만큼이나 어린 사람들이다 보니 날 생각들이 다 보여서 탈이었다.
‘뭐, 차차 나아지겠지.’
그 생각을 숨기는 것도 연습이다. 수한이 불러온 아이돌들이 인기 멤버는 아니다 보니 그 연습이 잘 안 되어 있는 사람이 조금은 되었다. 하지만 수한은 걱정이 없었다. 이 작품이 예능 프로그램이었으면 걱정이 많았겠지만, 드라마였다. 주어진 연기만 잘하면 된다. 수한은 일단 그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쨌든 간에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잘할게요!”
“네. 그럼 다시 안으로 들어갈까요?”
“아니요. 조금만 더 있어요.”
아무래도 지금은 혼자 있는 게 어색해서 어쩔 수 없었다. 수한은 우선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날이 참 좋았다.
***
“하하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강우형은 조용히 목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 강우형이 왔음에도 나이수는 개의치 않고 전화 통화를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일부러 들리라고 하는 건지 꽤 큰 목소리에 강우형의 귀가 예민해졌다. 누구와 통화를 하길래 저러는 걸까?
“이번에 성공하면 회장님께 꼭 보상하겠습니다. 김수한 그 친구도 함께요.”
들으라고 이름을 강조하는 게 티가 나서 강우형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저 말을 통해 나이수가 누구와 통화하는지도 파악하게 되었다. 장준환이었다.
“네! 네! 그러면 다음에 또 통화하겠습니다!”
나이수가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강우형은 가져온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나이수는 웃으면서 그 보고서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수한, 그 친구. 자네 밑에서 일하던 친구라며?”
“네. 그렇습니다.”
강우형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수한의 이름을 꺼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그래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일 잘하던데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연을 맺으면 좋을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 일 마치고 내가 직접 스카우트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회장님께서 직접요?”
“그럼 직접이지.”
강우형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름대로 이간질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강우형은 수한이 나이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이미 알아 버린 상태였다. 나이수의 비서진 중에도 제 사람을 심어 둔 상태이므로 나이수가 수한에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지 알게 되었다.
‘노망난 거지.’
“좋은 인재야 들어오면 좋지요. 일이 많아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강우형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수한이 꼭 짚어서 괜찮다고 한 대본을 보았다. ‘더 아이돌’에 집중하느라 이쪽 일은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수한의 안목에 감탄하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 이런 작품을 구했지?’
수한의 거듭되는 거절에 있는 대본, 없는 대본을 다 끌어다가 바쳤다. 보통 그런 식으로 주면 아이디어를 베껴 갈까 봐 걱정하는데 수한이 그동안 보여 준 신뢰가 그 정도는 되어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재미있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모은 대본들이 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이건 확실히 달랐다. 보자마자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확 들었다. 솔직히 요즘 자신을 견제하는 나이수를 보며 불안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 대본이면 될 것 같다.
‘대단하단 말이야.’
요즘 나이수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우형을 쳐 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수한을 들먹여 강우형을 자극한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강우형은 나이수의 일에 수한이 나선 이유를 잘 알았다. 장준환의 입김 때문이었다. 나이수가 이루어 낸 업적을 모조리 삼키려는 게 장준환인데 그가 나이수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장준환에게 수한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게 오히려 강우형에게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