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10. 터닝 포인트
강우형이 알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혔다며 비웃을 꿈이지만, 이미 세대를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을 키운 나이수로서는 당연한 꿈이었다. 과거 소속 아이돌로 영화를 만들어 성공한 경험이 있어 그는 더욱더 과거에서 헤맸다.
‘그래. 한 번 한 걸 두 번 못 할 이유는 없지.’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이룰 건 다 이루었다고 볼 수 있었다. 잘 키운 기업만 그의 가족에게 잘 물려주면 됐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 강우형까지는 내가 직접 쳐 내고 나가야지.’
강우형은 나이수가 키워 낸 괴물이었다. 잡일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사냥개였는데 알고 보니 늑대였다. 강우형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면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이수는 강우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나이수는 강우형에 관해 안일하게 생각했던 지난 과거를 후회했다.
‘이렇게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
애초에 음주운전 사건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직접 나섰지, 강우형에게 맡기지 않았을 거다. 물론 해결 방법이 제법 까다롭기는 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강우형에게 순순히 기회를 주는 게 아니었다.
‘지금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이고.’
차기작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수한 또한 그 일에 합류한다고 들었다. 수한은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수한이 강우형과 만난 사실은 이미 보고서에 담겨 있었다. 수한이 욕심이 나긴 했지만, 이런 보고서를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수한을 이용하고자 했던 나이수의 마음이 순식간에 돌아섰다.
‘역시 이쪽으로 데려오기에는 너무 강우형과 가까워.’
게다가 수한을 길들이기까지 해야 하니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굳이 제 사람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둘 사이를 이간질해서 떨어뜨리기만 해도 나이수에게는 큰 이득이었다.
‘일단은 이용할 수 있는 대로 이용하는 걸 목표로 둬야겠군.’
지켜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고삐를 잡으면 됐다. 수한의 예상대로 나이수는 이 관계의 갑(甲)이 자신이라 생각했다. 그 오만한 생각이 그를 붙잡는 한은 나이수는 강우형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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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어렵겠는데요. 대본은 봤지만, 주연도 아니고 조연이라니까 조금 그러네요.]
[컴백 일정이 있어서요. 무대 하면서 드라마까지 하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아 있네요.]
수한은 캐스팅 난도를 보면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이돌들을 캐스팅하는 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컴백 일정과 겹치면서 곤란한 상황이 많이 만들어졌다.
아이돌 쪽 사람들이라면 은은하게 소문이 다 돌아 모두가 다 아는 일정이지만, 수한은 드라마, 영화 쪽에 있는 사람이라 아이돌 쪽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낭패 아닌 낭패를 보게 되었다.
[엘 엔터테인먼트 제작이라고요? 그러면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요.]
게다가 배우들 못지않게 아이돌들도 선입견을 품었다. 그나마 최근에 ‘붉은 꽃’이 있어서 반응이 부드러워졌지, 전이었으면 차가운 반응일 게 뻔해 소름 돋았다. 특히나 주연 배우가 누구인지 밝혀지니 거절하는 횟수가 늘었다.
‘오히려 정지원 작가님을 상대하는 게 나았네.’
수한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각오는 했지만, 걱정이 현실로 닥치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러나 곧 정신 차리고 웃어 보였다. 수한은 이왕 일할 거 즐겁게 일하는 걸 선호했다.
전화로는 다 거절이니 차라리 직접 찾아가 대본을 보여 주는 편이 나았다.
‘그래. 이래야 할 만하지.’
이래야 도전하는 맛도 있고 성취감도 커진다. 수한은 대본을 챙긴 뒤, 차를 몰고 나갔다. 홈페이지를 보고 각 위치를 알아 둔 다음 차례차례 출발하였다. 물론 가기 전에 미리 연락하는 건 필수였다.
기획사마다 건물은 천차만별이었다. 낡은 건물도 있었고, 막 지은 좋은 건물도 있었다. 수한은 각각 돌아다니면서 해당 아이돌에게 직접 대본을 보여 주고 설득하였다.
미리 연락한 덕분에 기획사에서 직접 대본을 검토한 이들이 많았다.
“대본이 너무 좋은데요?”
“하고 싶어요.”
막상 가서 이야기하니 설득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나 대본을 보고 나니 생각보다 더 재미있어서 놀라는 반응이었다. 물론 그런데도 힘들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서 수한은 캐스팅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해 냈다.
그런데 아직 한 역할이 캐스팅되지 않았다.
‘이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인데.’
중요한 조연의 역할이었다. 여자 주인공의 친구이지만, 나름대로 애정 전선도 있고, 서사도 커서 매력적인 역할이었다. 전형적인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무조건 연기를 잘해야 하는 사람이 해야 사는 역할이라 수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하필 왜 다른 드라마랑 겹쳐서.’
수한이 염두에 둔 사람은 연기로 호평을 받은 아이돌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쪽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미래를 생각하면 연기자로서 지금 자리를 잡는 게 좋기에 쉴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한과 타이밍이 맞지 않게 되었다.
‘이러면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정도 연기력을 가진 아이돌이 많지 않다는 거다. 수한은 고민하다가 부재중인 전화를 발견했다. 메시지라도 남겼나 해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유지영으로부터 연락 온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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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촬영 마쳤어요. 덕분에 무사히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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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순간 한 인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수한은 핸드폰을 그대로 든 채로 빠르게 이름 하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오는 이름에 피식 웃었다.
[서이나]
아이돌이 안 되면 아이돌의 능력치를 지닌 신인 연기자를 쓰면 된다. 수한이 지체하지 않고 전화를 걸자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알고 있어요! 잘 지냈어요!]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목소리였다. 촬영을 마쳤다고 하더니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첫 영화 축하드립니다.”
[덕분이에요! 근데 이렇게 말로만 축하한다고 할 거예요?]
어려서 그런지 당돌함으로 따지면 예진보다 더했다. 아니, 예진은 뻔뻔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았다.
수한은 웃으면서 밥 사 줄 테니 어디서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나오겠다고 하는 서이나의 모습에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서이나에게도 좋은 기회여서 수한은 좋게 마음먹기로 했다.
***
수한은 노트북에 있는 파일을 열어 그동안 소원과 함께 작곡한 음악 목록을 보았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든 음악은 꽤 많았다.
‘음악 감독이 따로 있는 건 알지만, 추천 정도는 괜찮겠지.’
수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OST로 빵 터트려 음악으로 드라마를 끌어올리는 방법 또한 쓰기로 했다. 특히나 이번 드라마가 아이돌 드라마이다 보니 대중에게 통할 만한 음악이 나오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수한은 그리하여 음악 쪽으로도 투자하기로 했다.
‘화제성이 목표이니 뭐든 해 봐야지.’
물론 나이수에게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었다. 음악으로 따지면 엘 엔터테인먼트가 가진 음악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작곡가 에이치를 처음부터 언급하면 거절부터 할 게 뻔해 수한은 살짝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나를 볼 가능성도 크고.’
수한이 나이수보다 강우형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강우형은 작곡가 에이치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물론 수한 몰래 뒷조사를 하고 있지만, 그 사실까지는 수한도 몰랐기에 수한은 강우형을 더 좋아했다.
‘일단 소원 씨한테는 이미 말한 상태고.’
함께 작곡한 노래가 드라마 OST에 쓰일 수도 있다고 하니 소원은 굉장히 좋아했다. 이미 OST로 몇 번 낸 적이 있으나, 아이돌 드라마라니까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소원도 아이돌 출신이다 보니 아이돌 소재를 좋아했다.
짤랑.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수한의 고개가 돌아갔다. 10대 소녀가 모자를 쓰고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수한은 아직 영화가 개봉하지도 않았는데 얼굴을 가리는 서이나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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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나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S,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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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얼굴을 숨기려고 해도 이 눈은 속일 수 없다. 수한이 먼저 손을 들고 흔들자 서이나가 웃으면서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입니다.”
“뭐 하고 계셨어요?”
수한이 제지하기도 전에 노트북을 보려는 움직임에 수한이 먼저 노트북을 닫았다. 수한이 여유 있는 웃음을 보이자 서이나는 실망한 얼굴을 하였다.
“내가 좀만 더 빨리 봤어도 안에 봤을 텐데.”
“죄송하지만, 사업 비밀이라서요. 뭐 마시겠습니까?”
“아이스 초코요.”
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트북을 노리는 강렬한 눈빛이 보였다. 수한은 노트북을 가방 안에 넣고는 그대로 들고 주문대로 갔다. 허탈해하는 얼굴을 보니 웃기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려서 그런지 호기심이 너무 많은 편이네.’
만약 20대 배우가 저랬으면 예의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상대가 10대다 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수한이 아이스 초코를 들고 와 서이나에게 건네주자 서이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배 채우게 하고 식당가서 많이 못 먹게 하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수한이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마시자 불만 섞인 얼굴이 보였다. 장난을 받아 주지 않는다 이거였다. 수한은 불만이 더 쌓이기 전에 대본을 꺼내 서이나에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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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이돌 – 대중성: A,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7%, 성장 가능성: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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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예요?”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수한이 어서 읽어 보라고 눈짓을 보내자 서이나는 빠르게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푹 빠져 읽어 수한은 천천히 다른 일을 하다가 아이스 초코를 마시는 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제게 권하는 건 여자 주인공이 아니죠?”
“네. 아닙니다.”
첫 영화로 주연을 맡았다고 해도 서이나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그래서 살짝 실망한 눈치이긴 했으나, 곧 한 인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 역할이에요? 그럼?”
어떻게 수한의 생각을 안 건지 수한이 제안하려던 역할을 딱 맞춰 버렸다. 수한이 긍정의 의미로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서이나는 단번에 대답했다.
“할래요. 하고 싶어요. 근데 저 노래 잘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잘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아이돌 해 볼 생각 없냐고 명함도 많이 받았거든요.”
자랑하는 것처럼 턱을 올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게 제법 귀여웠다. 물론 수한의 생각도 비슷하기는 했다. 서이나는 아이돌을 해도 통할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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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나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S, 춤: A, 인지도: F, 기타: S, 성장 가능성: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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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수치로 봐도 아이돌로 활동해도 대단한 능력자였다. 하지만 수한은 서이나가 연기를 하기를 바랐다. 아직 대한민국은 가수보다는 배우를 더 쳐 주니 말이다. 물론 그게 미래에 가서도 바뀌긴 할 건지 궁금하기는 했다. 적어도 수한이 경험한 미래에서는 그대로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