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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탑스타-123화 (123/186)

123   10. 터닝 포인트

수한은 저택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얼마 안 가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리며 대문이 열렸다. 수한은 들어가면서 솔직히 놀랐다. 정지원 작가는 이광무 감독의 집 같은 커다란 저택을 가지진 않았으나, 집 하나를 통으로 작업실로 썼다.

수한은 작가 작업실인데도 그 규모에 놀랐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니지. 스타 작가인데.’

업계 탑이 이 정도는 되어야 지망생들도 큰 꿈을 꾸지 않겠는가? 오히려 소박하게 혼자 집에서 글 쓰는 유지아 작가가 특이한 경우였다.

‘유지아 작가의 성격이라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수한은 현관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한 여자에 마찬가지로 인사했다.

“전화 드렸던 김수한입니다.”

“김민영이에요. 작가님께서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 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지만, 그 옆을 지나쳐 거실로 가니 소파에 앉아 있는 한 여자가 보였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존재감. 정지원 작가였다.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김수한입니다.”

“엘 엔터테인먼트죠?”

“네. 그렇습니다.”

수한은 김민영 보조 작가가 안내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뭐 마시고 싶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는 물을 대답했다. 그러자 다른 보조 작가가 가서 물을 가져왔다.

“이번에 제 대본이 당선되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원래 이런 공모전에는 신인을 뽑는 게 관례인데 그래도 돼요?”

정지원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수한은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이광무 감독 앞에서도 이제는 편한 수한이다. 정지원 작가에게 굳이 쫄 필요가 없다.

“공모전에 들어온 다른 작품으로도 드라마를 만들 예정이니 그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요.”

수한의 입으로 직접 을(乙)을 자처하라는 이야기와 다름이 없었지만, 수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꼭 성공해야 할 드라마는 맞지만,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저희는 필명만 보고 결정한 거라서요. 그래서 전화를 드리고 크게 당황한 입장입니다.”

“그런데도 진행하겠다고요?”

“일단은 신인의 필명이지 않습니까. 작가님께서 공모전에 응모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 한은 변동 사항은 없을 겁니다.”

한마디로 신인 필명으로 냈으니 신인 작가 취급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수한은 인상을 찌푸린 정지원 작가를 봤지만, 그저 미소만 지으며 볼 뿐이었다. 그 반응에 정지원 작가도 수한이 예사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전해 들은 바로는 엘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된 사람은 아닌 거로 아는데, 맞죠?”

“네. 맞습니다. 엘 엔터테인먼트 소속은 아닙니다.”

정지원 작가가 직접 조사한 건 아니고, 김수한이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해서 그녀의 밑에 있는 보조 작가들을 시켜 조사하게 했다. 그러자 나온 결과물이 상당했다. 왜 이제까지 정지원 작가와 만난 적이 없는지 의문이었다.

‘하긴, 나는 배우를 직접 지목하는 편이지.’

캐스팅 디렉터도 있지만, 촬영 장소를 알아보며 캐스팅 디렉터의 일도 함께하는 직종이 또 따로 있기에 수한을 만날 일이 없기는 했다. 게다가 정지원 작가는 조연으로 나올 배우까지 직접 지목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수한과 만날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 이쪽 요구도 적당히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네. 일단은 들어 보고 판단하겠지만, 배우 캐스팅에 관해서는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어째서죠?”

“투자자가 그리 원하기 때문입니다.”

투자자라는 말에 정지원 작가도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리 그녀가 방송국에서도 갑(甲)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투자자 앞에서는 아니었다. 남의 돈으로 예술을 하지 않겠다는 게 그녀의 신념이지 않은가. 수한은 그를 알고서 말하였다.

“다만 그 외의 것은 작가님께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 맞춰 준다니 그것참 재미있는 말이네요.”

정지원 작가의 탐탁지 않아 하는 반응이 대놓고 전해졌으나, 수한은 표정 변화 없이 정지원 작가를 보았다.

정지원 작가는 정면으로 수한의 눈빛을 보고 기분이 묘해졌다. 어떤 면에서는 너무 냉정해 보이기도 하나, 눈빛은 참 따뜻해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 수한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옆에 있는 김민영 보조 작가를 판에 넣었다.

“본래 필명의 주인인 김민영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마 수한이 김민영 보조 작가를 지목할 줄 몰랐기에 김민영 보조 작가의 대놓고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곧 하고 싶어 죽겠다는 솔직한 감정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보조 작가 경력이 길어지다 보니 초조한 것이다.

“민영아.”

“네. 작가님.”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 정지원 작가의 말이 곧 법이다. 정지원 작가의 말을 잘 들어야 좋은 환경에서 드라마를 시작할 수 있기에 김민영 보조 작가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수한은 왜 유지아 작가가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 그 작가님 정신력이면 저런 환경을 못 버티지.’

“생각해 보니 가장 중요한 배우진을 못 들었어요.”

“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처음 주연 배우 이름부터 말하자 정지원 작가의 얼굴에 경악이라는 글자 새겨졌다. 엘 엔터테인먼트 드라마라고 할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그 예감이 현실로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조연으로 갈수록 그 격했던 감정이 차분해졌다. 조연진은 생각한 것보다 괜찮았다.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만, 연기는 나쁘지 않다고 평가받은 아이돌들이었다.

“이래서 시청률은요?”

“시청률보다는 화제성을 노리는 게 목표입니다.”

대본의 능력치를 보면 시청률도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지만, 수한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정지원 작가에게 좋은 패를 쥐여 줄 필요는 없다.

“솔직히 말하면 거절하고 싶네요.”

“작가님 대본에 자신이 없으신가 봐요.”

“뭐라고요?”

수한이 웃으면서 도발을 하자 정지원 작가가 금세 흥분했다. 누가 예민한 작가 아니랄까 봐 툭 치자 화르륵 반응한다. 옆에서 불길함을 느낀 김민영 보조 작가가 진정하라고 옆에서 달랬지만, 수한이 다시 한번 도발하였다.

“본래 진짜 재미있는 대본은 누가 연기를 해도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허-.”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인상을 찌푸리는 게 단단히 화가 난 게 틀림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는 작품마다 대박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에게 저런 말을 하니 화낼 만했다. 하지만 그녀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다고 제가 그래요. 합시다. 내 작품이 그렇게나 재미있으니 그걸 증명해 보겠다고 할 것 같아요?”

방송국에서도 대접받는 정지원 작가다. 엘 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이런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거절의 말을 하려는 정지원 작가의 앞에서 수한은 대본 하나를 꺼냈다.

“그. 래. 요. 난. 할. 수. 있. 어. 요.”

로봇이 대본을 읽는 마냥 딱딱하면서도 어조 없는 수한의 말투에 정지원 작가는 황당해하며 수한을 봤다. 수한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대본을 읽어 나갔다. 대본은 정지원 작가의 대본이 아니었다. 유지아 작가가 이번 공모전에 낸 대본을 수한이 살짝 고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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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이돌 – 대중성: A,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4.3%, 성장 가능성: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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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이 고친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여기서 유지아 작가가 조금 더 수정을 본다면 더 좋게 고칠 수도 있었다.

수한이 유지아 작가의 대본을 읽은 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처음에는 뭔 짓을 하는 거야 했던 정지원 작가가 어느새 집중해서 수한의 연기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말투, 어조였지만, 이상하게 다음 내용이 궁금해졌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그녀의 습성이 어디 멀리 가지 않았다.

수한이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뒤 대본을 덮고 나서야 정지원 작가는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다음 화는요?”

“공모전에 낸 내용은 여기까지라서요.”

“왜 그걸 안 뽑고 제 걸 뽑았는데요?”

정지원 작가가 봐도 매력적인 대본이었다. 수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유지아 작가에게는 나중에 반드시 사과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말이다.

“작가님 대본이 더 재미있으니까요.”

수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했는지 정지원 작가는 한숨을 내쉬며 김민영 보조 작가를 보았다. 정지원 작가만큼이나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첫 작품으로 큰 대작도 좋지만,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지원 작가가 김민영 보조 작가를 밀어주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다. 처음부터 대작한다면 경력 면에서는 좋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두 번째 작품이었다. 언제까지 정지원 작가가 도와줄 수는 없지 않은가.

정지원 작가도 수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는지 머리가 복잡해 보였다. 여기서 이렇다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조급한 감이 있었다.

“알겠어요. 생각해 보고 따로 연락을 드리죠.”

“좋은 대답이 나오길 기다리겠습니다.”

“진짜 뻔뻔하시네요. 원래 이랬어요? 아니면 요즘 잘나간다고 오만해진 거예요?”

“원래 이랬습니다. 이 업계에서 지나친 겸손은 독이 되더라고요.”

특히나 이번 작품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수한은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수한의 열정적인 눈빛이 싫지는 않았는지 정지원 작가는 곧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이랑 함께 일하게 되면 되게 피곤하겠다. 민영아. 절대 지려고 안 하네.”

수한은 사람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탑으로 갈수록 그들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수한이 만나 본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편이어서 수한은 신기하게 느꼈다. 그러나 그들이 수한을 받아 준 데에는 수한이 실력자인 것도 한몫했다.

“근데 연기 경력 있어요?”

“네?”

“일부러 발연기 한 거 티 나서요.”

아무래도 이 바닥에서 오래 있다 보니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면 그런 것도 보이나 보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 연극배우를 한 적 있습니다.”

“그럼 나중에 그쪽 특출해도 별말 안 할 거죠?”

반드시 넣을 거라는 눈빛이 보여 수한은 흔쾌히 작가님이 원하면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정지원 작가가 승낙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수한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되었다.

***

나이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보고서를 보고는 놀랐다. 수한이 낸 성과가 생각보다 대단해서였다. 김민영 보조 작가가 정식으로 메인 작가가 되면서 그 뒤를 정지원 작가가 보조하게 되었다. 설마 이번 프로젝트에 스타 작가가 들어올 줄은 몰랐기에 나이수는 감탄했다.

‘이 정도로 능력이 좋은 친구라고?’

달리 장준환이 추천한 게 아니었다. 이 정도면 믿고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불어 왜 강우형이 그리 자신만만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아직 명확한 확신은 안 들지만, 수한을 믿고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 일을 해 주는 걸 보면 온전한 강우형의 사람은 아니라는 건데?’

조금 더 지켜보면서 수한의 능력을 봐야겠지만, 강우형과 다르게 수한은 전혀 나이수에게 위협이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자 나이수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 친구를 내 밑으로 데려온다면 내가 꿈꿨던 것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수한이 안다면 경악하며 도망갈 거라는 사실을 나이수만 몰랐다.

나이수의 꿈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어려웠다. 그의 꿈은 아이돌 국가를 만드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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