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10. 터닝 포인트
공모전 심사는 수한과 엘 엔터테인먼트 관계자가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인사했던 사이지만, 수많은 대본 속에 함께 파묻히니 어느새 친해지게 되었다. 수한은 한 대본을 보다가 멈칫하였다.
‘왜 처음 보는 대본인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지?’
물론 같은 소재이므로 비슷하게 진행하는 이야기가 많기는 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문체에 수한은 자신이 피곤한가 잠깐 의심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보시죠.”
“좋아요.”
집에 돌아가면 강우형이 보낸 대본을 봐야 하니 눈이 매우 피곤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커피로 카페인을 보충하고 다시 대본을 보니 역시 다를 게 없었다. 수한은 설마 아는 작가의 작품인가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 이 표현을 쓰는 작가가 흔하지는 않지.’
수한은 핸드폰을 켠 뒤 얼마 전에 보낸 유지아 작가의 대본을 보았다. 그리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언제 시간을 낸 건지 유지아 작가도 응모하였다. 물론 필명을 다르게 해서 냈다.
‘이런 건 어쩔 수 없구나.’
작가마다 특유의 문체가 있다고 들었는데 유지아 작가는 그 특징이 잘 나오는 사람 중 하나였다. 유지아 작가의 대본이라는 걸 확인하고 보니 대본이 다시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보이는 능력치는 다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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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이돌 – 대중성: B,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3.2%, 성장 가능성: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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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과 시청률은 좋은 편이 아니지만, 수한이 목표로 잡은 화제성으로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적어도 S급은 나와야 비벼 볼 수 있다.
‘발연기를 극복할 정도의 재미가 있어야 해.’
솔직히 재미있기는 했다. 그동안 글 써 온 경력이 이런 데서 드러났다. 다른 장르도 쓸 정도로 실력이 늘기는 했다. 그러나 발연기를 극복하고 볼 수 있는 재미냐고 묻는다면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래도 확실히 완성도는 있는 편이네.’
이제까지 봐 온 대본들을 생각하면 그랬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참여해서 그런지 재미있고, 신선한 아이디어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 뒤를 바치는 힘이 부족했다. 왜 대본 집필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저기 수한 씨. 이거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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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아이돌 – 대중성: A, 화제성: S, 평균 시청률: 7%, 성장 가능성: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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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제목이었다. 가제라고 쓰여 있지만, 만약 드라마로 제작된다면 저 제목으로 될 가능성이 컸다. 아이돌 학교라는 소재가 주어졌으니 단순화된 제목을 뽑은 게 틀림이 없었다.
수한은 대중성뿐만이 아니라 시청률까지 괜찮은 대본에 깜짝 놀랐다. 수한이 찾던 거긴 하지만, 정말로 이 수치의 대본을 찾게 될 줄은 몰랐다.
“근데 이거 읽어 보면 신인이 절대 아닌데요?”
“그렇습니까?”
“네. 보시면 알 겁니다.”
먼저 골라내서 보여 준 만큼 수한도 특별히 신경 써서 읽게 되었다. 그리고 곧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캐릭터의 특성이나 대화나 독특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다 어느 정도 방송에서 내보낼 선으로 쓰고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선은 이런 데서 많이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감독이 어떤 식으로 연출할지도 염두에 두고 쓴 흔적이 있어서 수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지아 작가보다 더 많이 써 본 사람이네.’
유지아 작가도 세 작품이면 많이 써본 건데 이보다 더한 경력의 작가라면 이름이 있는 작가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필명은 처음 보는 게 유지아 작가처럼 이름을 숨기고 도전하는 게 틀림이 없었다.
‘원래 공모전이라면 이런 사람을 뽑지 않는 건데…….’
신인에게 기회를 더 주는 게 관례이기는 했다. 그래서 선배들이 안 나서는 것이기도 했고. 그러나 독특한 소재라서 그런지 기존 작가들의 흥미도 끈 모양이다. 거의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하는 마음으로 신청한 게 틀림이 없어서 수한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래. 신인 작가들한테 미안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지.’
수한의 테스트와 연결된 사안이라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이름 있는 작가여도 새로운 필명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 필명대로 대접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한은 신인 작가에게도 기회를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이 작품들도 따로 시상하죠. 어차피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웹 드라마도 하지 않습니까?”
관계자가 어이없다는 듯 수한을 쳐다봐도 소용이 없었다. 물론 수한은 그 대본 중에 유지아 작가의 것은 제외하였다. 유지아 작가의 대본은 나중에 다르게 써먹을 수도 있으니 굳이 엘 엔터테인먼트에 넘겨줄 필요가 없었다.
‘당장은 섭섭해하겠지마는…….’
그래도 높은 능력치의 대본들을 엘 엔터테인먼트에 넘겨주는 것이니 엘 엔터테인먼트로서도 손해 보는 건 아니었다.
이제 수한에게 남은 건 캐스팅이었다.
***
“작가님, 이번 작품도 잘 봤습니다.”
“뭘요.”
정지원 작가는 환하게 웃으면서 뻗어오는 손을 잡았다. 다음 작품도 잘 부탁한다는 말에 또 보자는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또 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야 날 대접하는 쪽으로 갈 거니까.’
정지원 작가는 밖에서 겸손하게 구는 것과 다르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녀가 썼다 하면 안 되는 작품이 없었으니 오만해질 만했다.
“작가님, 집으로 모실까요?”
“드라마도 끝났는데 회식이나 하자.”
“네, 작가님.”
바로 통보한 거지만, 정지원 작가의 밑에 있는 보조 작가들은 공손히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지원 작가의 말이 곧 그들에게 법이기 때문이다. 정지원 작가의 밑에서 잘 배워야 입봉도 편하게 할 수 있으므로 다들 두근두근하며 정지원 작가의 말에 따랐다.
애초에 정지원 작가면 방송국에서도 갑(甲)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었다. 정지원 작가를 데려오기 위해 방송국끼리도 경쟁을 벌인다는 사실을 정지원 작가가 가장 잘 알았다.
정지원 작가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나, 가끔 개방된 곳에서 술 마시는 건 좋아했다.
“요즘 드라마가 뭐가 재미있더라?”
“나는 붉은 꽃이 재미있던데.”
“끝에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네.”
‘붉은 꽃’이라면 정지원 작가도 잘 아는 드라마였다. 드라마 작가이면서도 그녀는 드라마를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자신의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드라마를 챙겨 봤기에 다른 장르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그래서 그 공모전에도 내본 것도 있고.’
아이돌 학교라니 재미있는 소재가 아닌가. 미국 드라마를 본 적이 많아서 그런지 학원물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기는 했다. 게다가 정지원 작가는 아이돌도 좋아했다. 생방송을 놓치면 그녀의 밑에 있는 보조 작가들이 알아서 링크를 보내 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이번 공모전은 딱 정지원 작가가 좋아하는 소재만 모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날 뽑지는 않겠지.’
나름대로 실험작이기는 했다. 이전에 쓰던 대로 안 쓰고 변형을 많이 시켰다. 많은 시청자가 정지원 작가에게 바라는 건 신데렐라 이야기이지만, 정지원 작가도 쓰고 싶은 건 다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본의 노예가 된 이상 남의 돈으로 예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지원 작가는 대중들이 원하는 작품만 썼다.
‘뭐 날 뽑는다고 해도 생각해 둔 건 있으니까.’
그때 한 보조 작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작업실이 아닌 외부이므로 그 정도는 정지원 작가도 그냥 넘어가 주었다. 어차피 그 핸드폰으로 연락 올 데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작업실에 울렸더라면 예외는 없었다.
대본을 쓸 때의 정지원 작가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다.
“저, 작가님.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필명은 정지원 작가의 보조 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찬 보조 작가의 이름으로 하였다.
김민영 보조 작가. 어차피 독립할 때가 되었으니 혹시나 정지원 작가의 작품이 뽑히게 되면 경험이라도 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주 아이디어도 김민영 보조 작가가 냈으므로 따지고 보면 정지원 작가 혼자 쓴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일단 받아 봐.”
정지원 작가의 명령에 김민영 보조 작가가 전화를 받았다. 얼마 안 가 커지는 눈동자에 정지원 작가는 미소를 지었다. 김민영 보조 작가에게 입봉의 기회가 찾아왔다. 좀 비양심적이긴 하나, 정지원 작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아 걔는 한창 잘나가는데 민영이는 아직도 보조 작가 일을 하고 있으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지.’
보조 작가들 사이에서 금지어가 된 유지아 작가의 이름을 정지원 작가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정지원 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금지어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운 좋게 좋은 언니를 둬서 이 업계에 작가로서 발을 들인 거로 알고 있다. 솔직히 작가로서는 재능이 있기는 하나, 정신력이 너무 약했다.
‘조건을 예민하게 걸어야겠네.’
‘붉은 꽃’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 작품보다는 좋게 대접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정지원 작가는 제 이름을 대도 좋다고 말하였다.
***
수한은 전화를 끊고 나자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안 그래도 이름이 있는 작가일 거라 생각은 했는데 여기서 정지원 작가의 이름이 튀어나올지는 몰랐다.
“정지원 작가라니…….”
못해도 회당 1억은 받는 스타 작가로 알고 있다. 더불어 유지아 작가가 그 밑에서 보조 작가로 일한 적이 있어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해도 안 가질 수 없는 작가였다.
‘역시 공모전이라 그런가?’
평소에 내던 스타일로 쓰지 않았다. 그래서 정지원 작가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통화해보니 자신의 이름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건 반대하였다. 다만 김민영 보조 작가의 힘을 바쳐 주는 용도로는 사용하였다.
‘이거 만만치 않겠는데?’
모르긴 해도 김민영 보조 작가가 한 말들은 정지원 작가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 걸 거다. 전달받은 말들부터 까다로워 수한은 정지원 작가의 비위를 맞추는 데 조금 힘들 거라 예상했다. 그 오만하고 거만한 방송국에서 대접을 받는 작가가 정지원 작가가 아닌가?
일단은 따로 찾아가서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쪽에서도 일정 맞춰 보고 연락하겠다고 하여 수한은 기다리기로 했다.
‘스타 작가가 껴서 좋기는 한데 뭔가 느낌이 싸하네.’
안정적이나, 그 예민함을 감당해야 하니 걱정부터 되었다. 그러나 일단 직접 만나 봐야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수한은 장준환에게 이 일을 보고하려다가 말았다.
‘보고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
괜히 설레발 쳤다가 엎어진다면 수한의 무능력만 증명하는 꼴이 된다. 수한은 얼마 안 가 온 문자에 쓴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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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후 두 시쯤에 시간이 되신다고 하니 그때 아래와 같은 주소로 오시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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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맞추자고 하더니 통보였다. 수한은 이 일 처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은 가 보기로 했다. 스타 작가의 작업실로 직접 가는 것이니 그 작업실이 어떨지 개인적으로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