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18화 (118/186)

118   10. 터닝 포인트

“이게 다 뭔가요?”

“이번에 붉은 꽃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차기작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잡지도 못하는 시간은 굉장히 빠르게 움직였다. 수한은 ‘붉은 꽃’ 종방연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새삼 시간의 빠름을 실감하였다. 그리하여 수한은 강우형의 부름에 이끌려 엘 엔터테인먼트에 오게 되었다.

‘굳이 회사까지 부르지 않아도 되는데.’

수한이 고개를 들자 미소를 짓는 강우형이 보였다. 그런데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수한은 싸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그를 티 내지 않고 따라서 웃었다.

“그래서 다른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려고요?”

“회장님께 이번 일이 절대 운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으나, 수한은 왠지 강우형이 초조해 보였다.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수한은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걱정되었다.

“일 많이 하는 건 좋은데 건강부터 잘 챙기시죠.”

“그런 말을 하는 김수한 씨도 건강 안 챙기기로 유명한 것 같은데요.”

수한은 오늘 아침에 챙겨 먹은 홍삼과 멀티 비타민을 떠올렸다. 건강 안 챙기는 것치고는 너무 잘 챙겨 먹어서 문제였다. 심지어 이번에 예진이 고맙다는 인사로 홍삼까지 많이 보내 줘서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이렇게 나이가 드는 것을 느끼는구나.’

이런 식으로 절대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수한은 그 오해를 풀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오메가3 하나 챙겨 주면 감사하겠다는 농담 같은 진담을 하였다.

“그게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죠. 한 박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챙겨 주시는 김에 소속 연예인들도 잘 챙기셨으면 좋겠네요.”

“그거야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죠.”

그런 것치고 너무 몸에 나쁜 약을 먹지 않았나 싶었다. 수한은 마약을 한 엘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었다. 대체 그 안에서 얼마나 힘들기에 마약에 의존하며 살아가느냐 말이다. 젊은 청춘들이 말이다.

“근데 대본은 이게 다인가요?”

“왜요? 부족합니까?”

“아니요. 엘 엔터테인먼트라면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을 텐데 해서요. 특히 이번에 드라마가 잘되어서 더 많이 있을 줄 알았죠.”

사실 앞에 놓인 대본 중에 만족스러운 등급이 없어서 돌려서 말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을 강우형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이 눈이 없는 한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이 사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절대 엘 엔터테인먼트에 호감이 있는 걸그룹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수한도 남자인지라 걸그룹이 보이면 눈길이 가는 건 당연했다. 더불어 이 업계가 빠르게 흘러가기 때문에 요즘 트렌드도 잘 알아야 해서 신곡이 나오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다.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변명 같네.’

예진에게 이 생각을 들킨다면 너무 한심하게 볼 것 같아서 쓴웃음이 나왔다. 더불어 소원은 자기 팬이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할 것 같아서 수한은 대본 보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역시 엘 엔터테인먼트가 대형 기획사이기는 했다.

‘능력치는 별로여도 하나같이 재미있네.’

소설 읽듯이 재미있게 읽는 수한과 별개로 강우형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수한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긴장을 풀었다. 이런 모습만 본다면 수한이 딱히 큰 욕심을 가진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 탓이었다.

‘기우였나.’

짧은 기간 동안 강우형은 장준환의 뒤를 캐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온 게 없었다. 강우형이 그의 뒤를 캐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챈 탓이었다. 적이 많은 사람답게 그런 눈치는 아예 타고났다. 그러니까 강우형은 더 안달이 났다.

‘대체 김수한을 데리고 뭐 할 생각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조용히 다가오는 게 이처럼 끔찍한 일인지 강우형은 처음 알게 되었다. 우습게도 강우형은 이 기간 사이에 남일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강우형과 남일의 다른 점은 남일처럼 대놓고 적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강우형의 적의가 향하는 곳은 수한이 아니라 장준환이었다.

“여기 달콤한 커피 없습니까?”

강우형의 속과 다르게 수한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커피를 달라고 하였다. 그사이에 느껴지는 공백에 강우형은 웃음이 나왔다. 역시 수한은 강우형의 마음에 쏙 드는 인재였다. 경쟁 상대가 아닌 그의 아래로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김수한 씨. 오늘 저녁에 약속이 따로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 더 수한의 속내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수한은 갑작스럽게 잡힌 저녁 약속에 당황했지만, 강우형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곳이었다. 처음에 차를 타고 갈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는데 차에서 내리니 확실했다.

‘여기는 장준환 씨랑 같이 식사한 곳이잖아.’

비싼 값을 하는 음식의 질에 수한은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장준환도 수한을 부담스럽게 하지 않아서 소화제를 먹은 게 무색하게 밥을 잘 먹었다. 정말 맛있게 먹은 그 식당에 또 한 번 오게 되니 수한은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여기 온 적 있습니까?”

“네. 이광무 감독님이 아는 분을 소개해 줘서요. 여기 진짜 맛있던데 이사님 덕분에 또 입이 호강하네요.”

수한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강우형은 살짝 놀랐다. 비밀로 만난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더불어 수한은 장준환과 만난 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의미를 부여한 강우형이 무색하게도 말이다.

“그럼 전에 먹던 거와 같은 것을 먹죠.”

“그때 제가 주문한 게 아니라서요. 이사님이 자주 드시는 거로 드시죠.”

수한이 편하게 말하자 강우형은 장준환이 시켰을 법한 코스를 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장준환과 수한이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강우형은 수한과 이 자리에서 마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 자리는 어떻게 보면 상징성이 있는 자리이기에 강우형은 수한을 경계하였다.

장준환이 미래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만 데려오는 곳이니까.

처음에는 자신과 동등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불쾌감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으로 반감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수한과 마주 앉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얻어먹어서 기분 좋다는 얼굴이라 반감 든 게 무색하네.’

장준환과의 자리에서도 딱 이랬을 것 같아서 강우형의 초조함도 살짝 해소되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절 데려온 건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인가요?”

밥이 나오기 전에 먼저 본론을 꺼내 수한의 모습에 강우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한이 보기에는 그런 의미가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수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며 나온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회장님!”

강우형이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인 탓에 수한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일어섰다가 장준환을 발견하였다.

“이사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인사나 할까 해서 왔는데 여기 또 제가 아는 사람이 있었네요.”

수한은 깍듯한 강우형의 태도에 놀란 얼굴로 장준환을 보았다. 거물인 건 알았는데 강우형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게다가 회장이라고?’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은 나이수였다. 수한은 강우형이 나이수에게도 저렇게 깍듯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준환이 더 큰 거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어지면서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을 함께 보니 기분이 좋네요.”

“그렇습니까?”

“다음에는 제가 식사 자리를 마련할 테니 함께 봅시다.”

장준환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수한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으나, 강우형의 눈빛이 바뀐 거 하나는 알게 되었다. 그 눈빛에서 보인 초조함에 수한은 강우형이 느끼는 초조함의 정체를 알게 되어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가?’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장준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날 투자해 달라고 말한 것도 반쯤 농담이었는데 강우형의 저 태도가 수한에게 다른 길을 알려 주었다.

***

유지아 작가는 수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가였다. 수한은 훌륭하게 나온 대본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수한의 조언을 훌륭하게 받아들인 탓에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하나, 다른 느낌이 났다. 아니, 사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재미있다는 게 포인트였다.

‘작가마다 잘 다루는 소재가 있긴 한가 보네.’

특정 장르만 잘 쓰는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했다. 데뷔는 로맨틱 코미디로 시작했으나, 성공하는 드라마는 장르물인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신내림이라도 받았냐는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데 수한은 적성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유지아 작가의 경우에는 로맨틱 코미디도 잘 쓰고, 장르물도 잘 쓰는 편이었다. 다만 감정선에 대한 개연성이 약한 편이었다. 어떤 작가는 처음부터 개연성을 망가뜨리는 막장 전개로 하여서 사랑을 받았으나, 아마 그 작가에게 계속해서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쨌거나 자기가 잘 쓰는 장르를 잘 살렸네.’

수한은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을 빛냈던 유지영을 떠올렸다. 신생 회사이다 보니 이것, 저것 하면서 이름을 알려야 할 시기였다. 아마도 유지영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하지 않더라도 자기와 연이 닿아 있는 제작사에 권할 게 분명하였다.

‘김수한 씨가 캐스팅 담당자라고 하면 좋아하겠네요.’

수한에게 영업한다고 뭐라 한 것치고는 수한을 이용할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요즘 수한이 이쪽에서 잘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좋아해야 할 판이었다. 수한은 그런 유지영이 싫지 않았다. 일을 못하면서 벌이기만 하는 사람이었으면 싫어했을 텐데 유지영은 일을 잘하였다.

수한은 약간의 피드백을 하며 메일을 보내고는 소원이 보내 주는 음악에 신경을 썼다. 주혁과 약속한 것을 수한은 잊지 않았다. 물론 주혁은 보내 주는 것마다 최고라고 해서 문제였다.

‘이런 식으로 메일로 주고받기만 하니까 불편하기는 하네.’

지난번에는 남일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만났으나, 지금은 조금 사정이 달라졌다. 수한은 얼마 전 실례를 무릅쓰고 이광무 감독에게 연락하였다. 한창 영화 촬영 중이라 안 받을 것 같았던 이광무 감독은 단번에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어. 그 친구 만나 보니 어때?]

“그냥 돈이 많은 사람으로 보였어요.”

수한의 농담 섞인 대답에 이광무 감독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이광무 감독의 개그 취향에 맞았다. 그러고 보면 수한이 무언가 말할 때마다 뭐가 그리 웃긴지 이광무 감독은 수한을 굉장히 좋아했다.

수한은 연하보다는 연상에게 더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그래서 전화한 이유는?]

“절 왜 만나자고 한 건지 궁금해졌어요.”

[왜냐니. 투자하고 싶어서겠지. 요즘 이름이 자주 들리던데 그 이유 때문일 거야.]

가능성을 보고 인물에게 투자한다는 거였다. 특히나 돈이 많은 인사이니 어딜 투자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인물에게만 투자하였다.

“감독님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

[내가 지금은 잘나가지만, 한때 크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지.]

전에 인터뷰 기사로 본 기억이 있다. 이광무 감독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이것, 저것 조사를 하면서 보게 된 기사였다.

[그때 내게 손을 내밀었지. 자세한 이야기는 영화 마치고 술 한잔 마시면서 하지.]

“네. 끝나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당장 나오라고 해도 가겠습니다.”

[하여튼 간에 입에 발린 말은 잘해. 그래서 자넬 좋아하지만.]

수한은 그 전화를 끊고 난 뒤 생각이 많아졌다. 잘만 하면 기획사를 차릴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돈도 이 정도면 많이 모았고, 주혁의 계약 기간도 곧 끝나 가니 수한이 차리는 기획사 1호 연예인으로 주혁을 데려올 수 있다.

‘그때까지는 지금 하는 일들을 마무리해야 하지만.’

수한은 다른 것보다 이광무 감독이 직접 만남을 주선해 준 것에서 마음이 기울여졌다. 일단 장준환을 다시 만나 그 테스트라는 것을 받아 봐야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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