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9. 캐스팅 디렉터
“축하드립니다. 말씀하신 걸 그대로 지켜 낼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일은 웃으며 축하했지만, 속은 그와 정반대였다. 당연히 망할 줄 알았던 드라마가 이처럼 보란 듯이 잘될 줄은 몰랐다. 남일은 이 일에 수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심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놈한테 진짜 뭐라도 있는 거 아니야?’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때만 해도 그저 운이 아주 좋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실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대표님의 축하를 들으니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군요.”
강우형은 여유 있게 웃으며 잔에 채워진 술을 마셨다. 술맛이 너무 달아서 이러다가 한계치를 넘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도 기분이 들뜬 건 어쩔 수 없는 거라 강우형은 자연스레 수한의 이야기를 꺼냈다.
“김수한, 그 친구가 확실히 능력이 좋기는 합니다.”
“이번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앞으로도 좋은 파트너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친구 이번에 데이빗 랩도 캐스팅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수한은 칭찬하는 것이 곧 남일을 깎아내리는 것이므로 남일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절제하느라 힘들었다. 특히나 수한이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심사가 제대로 뒤틀렸다. 그러나 회장이 두 사람의 앞에 있는 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
그래도 가수 쪽이라도 잘나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주혁은 국내 활동은 거의 못하는 상황이지만, 돈을 잘 벌어 주니 됐다. 일본에서 말썽 피운 것도 잘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뒤에 수한이 있다는 게 굉장한 찝찝한 일이라 따로 감시자를 붙였다.
‘김승택, 그 친구는 고지식한 면이 있단 말이지.’
잠깐이라도 흔들렸던 재원과 다르게 딱 잘라 거절해서 남일이 다 민망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엘 엔터는 강우형이 명령하면 뭐든 할 직원이 넘쳐날 텐데.’
유독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반항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짜증이 올라왔다. 남일은 수한이 가온의 생태계를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남일의 지도력 문제였다.
“그런 친구를 안타깝게도 회사에서 놓치고 말았네요.”
정확한 표현은 내보냈다는 게 맞겠지만, 남일은 아닌 척 너스레를 떨며 술을 마셨다. 술맛이 굉장히 썼다. 마음 같아서는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강우형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데 한국이 법치 국가라서 참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던 회장은 얼마 전에 잡은 약속을 떠올렸다. 회장은 이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도 자금줄을 댄 상태로 인맥이 넓은 편이었다. 그중 하나가 이광무 감독이었다.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굉장히 궁금하군.’
이광무 감독의 소개로 만나는 것이라 수한이 바짝 긴장하고 오지 않을까 생각하며 회장은 천천히 술을 음미했다. 고양이와 개처럼 서로 아웅다웅 다투는 게 은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남일이 먼저 가고 난 뒤 회장은 여유 있게 웃는 강우형을 붙잡았다. 강우형은 안 그래도 기분이 좋았기에 웃으면서 회장을 봤다.
“이번 일에 회장님 도움이 컸습니다.”
“뭐, 나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건 아니니까.”
수한은 강우형의 능력이 좋다고 했지만, 강우형은 회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가 강우형의 자금줄이자 인맥이었다.
“나이수 회장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당연히 화는 나는데 회사는 잘 되어 가니 화는 못 내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럼 더 조심해야겠군요.”
“어째서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요.”
한 대형 기획사의 회장을 쥐로 묘사하는 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으로서는 나이수가 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이수는 그저 두 사람이 사냥해야 할 사냥감이었다.
“근데 저 사람은 언제까지 이 모임에 부를 겁니까?”
“제 안목을 의심하는 거군요.”
“그런 건 아니지만, 제 뒤통수를 치면 쳤지 도움이 될 인사로는 안 보여서 말입니다.”
그 말을 틀리게 보지는 않았다. 남일이 누구보다 강우형을 싫어하니 말이다. 서로 도움이 되라고 만든 자리인데 유치한 기 싸움만 하다가 늘 끝이 났다. 특히나 남일이 나이수에게 한 말이 있어서 회장도 남일을 쳐 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김수한. 그 친구 때문에 변한 건가?’
처음에 남일은 저런 치졸한 성격이 아니었다. 열등감이 있기는 했지만, 저런 식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열등감을 발판으로 성공하는 사람이 남일이었다. 그러나 수한을 만나고 나서 변했다.
“일단은 지켜보죠.”
지켜보고도 영 희망이 안 보인다 싶으면 잘라 내면 그만이다. 정 안 되면 남일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끼워 두면 되니 크게 걱정이 없었다.
강우형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은 한번 한다고 마음먹으면 기어코 해내는 사람이다. 아마 이 사람이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이었다면 강우형은 절대로 반란의 반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이번 드라마의 성공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수한만큼이나 놓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 회장이기에 강우형은 깍듯하게 대했다. 완벽하게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한 모습이었다.
***
수한은 어색하게 거울을 보며 제 몸을 살폈다.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되니 이광무 감독이 지난번에 말했던 지인과 만남을 주선했다. 그래서 약속을 잡기는 했는데…….
‘조금 부담스럽긴 하네.’
다른 사람도 아닌 이광무 감독의 지인이다. 수한은 이광무 감독이 했던 대로 엄지와 검지를 비벼 보았다. 얼마나 돈이 많길래 이광무 감독이 추천한 걸까? 게다가 이광무 감독의 성격이라면 돈이 많다고 다 소개할 사람도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겠지?’
이광무 감독처럼 이상한 방법으로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으며 수한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고급 한정식집이네.’
슬쩍 검색해 보니 음식도 코스로 나오고, 가격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수한은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런 데 한두 번 가 본 것도 아니잖아.’
일 때문에 종종 가기는 했다. 그때마다 부담스러워서 잘 먹지 못했지만 말이다. 평소에도 그러는데 이광무 감독의 지인과 만날 생각을 하니 먹다가 체하지 않을까 걱정이 생겼다.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발견한 약국에 내려서 소화제를 샀다. 청심환을 먹는 건 조금 과한 것 같아서 먹지 않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찍은 주소에 도착하니 한옥으로 만들어진 집이 보였다.
‘우와. 이런 건 드라마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사람도 많이 오는지 주차장이 빡빡한 편이었다. 수한은 오늘 외제 차를 타고 왔기에 최대한 조심히 주차했다. 직접 해 주겠다고 사람도 왔으나, 이런 건 수한이 더 잘했다.
“장준환 씨, 이름은 예약되어 있습니다.”
“아! 네. 따라오십시오.”
보통 이름을 확인하고 안내를 하는데 이 집에 자주 오는 건지 이름을 대기가 무섭게 안으로 안내했다.
수한은 방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부담스러움이 밀려들어 왔다. 단둘이 먹는 건데도 커다란 상이 수한을 맞이했다. 아직 장준환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 나오지 않았지만, 단둘이 이런 상을 쓰려니 벌써 숨이 턱턱 막혔다. 이러니까 정말 드라마 안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배우들은 드라마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걸 봐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수한은 좌식 의자에 앉다가 또 놀랐다. 이런 데는 좌식 의자도 좋은 걸 사용하는지 허리에 착 감기는 게 편했다. 수한은 앞에 놓여 있는 냅킨과 수저를 멍하니 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한입니다.”
“장준환입니다. 일찍 왔다고 왔는데 수한 씨보다 늦었네요.”
이광무 감독의 또래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정장을 빼입고 있어서 이광무 감독의 지인이라 해도 분위기가 확 달랐다. 금융인 느낌이 물씬 들었다. 덕분에 몸이 바짝 굳었지만, 남자의 웃는 얼굴이 편안한 분위기를 내서 수한은 금세 긴장을 풀었다.
“이광무 감독님의 지인분이라니까 신경 써서 일찍 왔습니다.”
수한이 농담 삼아 가볍게 말하자 회장 아니, 장준환은 미소를 지었다. 약속 시각보다 일찍 오는 사람을 장준환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배고프시죠?”
“아! 네. 그렇습니다.”
“제가 미리 주문해 둔 게 있는데 그걸로 식사해도 될까요?”
“네. 특별히 알레르기 반응 같은 건 없어서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아! 매니저 일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이런 데서 드러나네요.”
“그렇습니까?”
장준환은 웃는 수한을 보며 일단 인상은 좋은 친구라 평가했다. 연예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훈훈한 외모를 가져서 보기 좋았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남자든 여자든 잘생기고 예쁘면 보기 좋으니 장준환은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정신력이네.’
강우형과 남일의 대화를 통해 수한이 어떤 식으로 가온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수한에게 매니저 일을 언급하면 당연히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직업을 좋아했다는 얼굴이라 장준환은 수한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둘 중의 하나를 고르자면 지금 하는 일이 맞는 편이죠?”
약간은 사생활을 물어본 질문이었으나, 수한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이 장준환을 놀라게 했다.
“그렇긴 한데 나중에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 중입니다.”
“어째서죠? 이쪽에서 한창 인정받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지금 하는 일은 그 일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수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들이 옮겨지면서 흐름이 끊겼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수한의 얼굴에 장준환은 생각이 많아졌다. 왜 이렇게 솔직하게 다 말하는 걸까? 굳이 따지자면 첫 만남인데 말이다. 그러다가 웃어 버렸다.
“제가 그 일에 투자하기를 바랍니까?”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장준환은 웃음이 크게 터졌다. 강우형도 장준환 앞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젊어서 그런지 아주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 돈을 만지는 사람인지라 장준환은 잠깐만 대화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파악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장준환의 합격선에 들어오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든다고 하여 그 돈을 쉽게 풀어 줄 수는 없었다.
“저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습니다.”
“네. 당연히 그래야죠. 오히려 밑지고 들어온다고 하면 제가 싫습니다.”
장준환은 우선 앞에 나온 물을 마셨다. 그러면서 수한을 관찰했다. 수한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믿고 있는 게 느껴져서 장준환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생각났다.
‘아하.’
그 자신감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강우형이 자신감이 넘치는 이유와 비슷했다. 그건 바로 수한의 안목이었다. 이광무 감독의 마음에도 쏙 들었으니 그 능력은 인정받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더불어 강우형이 대놓고 수한을 탐내고 있으니 흥미로웠다.
“그럼 일단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요.”
“네. 그러시죠.”
수한은 먼저 숟가락을 든 장준환을 발견하고, 앞에 나온 죽을 먹었다. 역시 비싼 한정식집이라 그런지 굉장히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