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9. 캐스팅 디렉터
“우리 오랜만에 보는 것 같죠?”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대표님은 현장에서 사시는 겁니까?”
현장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유지영이 신경 쓴 티가 확 났다. 요즘 괜찮은 현장만 와서 그런지 수한은 원래 나빴던 제작 현장이 점점 머릿속에서 잊혀 갔다. 물론 얼마 안 가서 깨졌지만 말이다.
수한이 현장에 도착하자 현장에서 수한을 반긴 사람은 유지영만이 아니었다.
“연기는 할 만합니까?”
“재미있어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재미 위주로 말하는 경향이 있는 서이나였다. 유지영부터 서이나를 챙겨서 그런지 표정이 굉장히 밝았다. 게다가 둘 사이가 친근해 보이기도 했다.
“힘든 점 있으면 여기 있는 유지영 대표님께 말씀드리면 됩니다.”
“안 그래도 잘해 줘서 괜찮아요.”
수한은 자신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유지영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유지영은 서이나를 다른 작품에도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수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그게 좋을 수도 있겠으나, 배우 인생을 하면 글쎄였다.
“유 대표님이 차기작 함께하자고 하면 무조건 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라는 뜻입니다.”
“아! 네. 그래야죠.”
“저기요. 김수한 씨?”
웃고는 있지만, 이를 꽉 악무는 게 보였다. 수한이 매니저 일을 그만뒀다고 해도 마음에 든 배우를 내버려 둘 만큼 모진 성격은 아니었다. 수한은 왜 부르냐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자 앞에서는 말을 막 할 수 없기에 유지영의 속만 탔다.
수한은 현장을 둘러보다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열심히 도왔다. 그래서 수한에게 불만이 생긴 유지영이라도 수한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유지영은 다른 화제로 대화를 돌렸다.
“지아가 조만간 만나자는데 시간 괜찮아요?”
“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근데 작가님 차기작은 언제 쓰신답니까? 주변에 저 포함해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아는 사적으로 만나자고 한 거거든요. 수한 씨, 인제 보니 완전 일 중독자네.”
유지영이 탐탁지 않게 말해도 수한은 그저 웃기만 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명확하니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지아, 지금 차기작 쓰고 있는 거로 알아요.”
“그렇습니까?”
“지아한테 대본 좀 달라고 할까요?”
“주시면 감사하죠.”
“하긴 그편이 지아한테는 좋을 수도 있겠네요. 계속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니까 많이 부담스러운가 봐요.”
그러고 보니 수한이 미국을 다녀오는 동안 유지아 작가의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끝마치게 되었다. 시청률도 요즘 드라마치고 잘 나왔고, 공중파 1위로 끝마쳤으니 좋은 성과였다. 물론 그다음에 방영한 ‘붉은 꽃’에 비교를 안 당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로맨스는 없었다’처럼 칼을 갈고 나온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보겠다는 건 아니지만, 좋은 작품이 나오면 저도 좋으니까요.”
유지아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인간의 따뜻함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로맨스는 없었다’도 처음에는 스릴러이지만, 뒤로 갈수록 인간의 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아무튼, 차기작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여 기대감이 생겼다.
“지아한테 말 전달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간 약속은 작가님이 원하시는 대로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일정이야 수한이 조절하면 되니까 되도록 맞춰 주고 싶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수한은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유지아 작가에게서 온 메일이었다. 내용은 최근까지 쓴 차기작이었다. 수한이 돌아가는 사이에 유지영이 연락한 게 틀림이 없었다.
‘이 사람은 바뀌는 게 없네.’
이쯤 되면 유지아 작가의 성격이 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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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잘 안 써져서 매니저님이 한번 확인해 주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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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이 매니저 일을 그만둔 지 벌써 3년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유지아 작가는 한번 입에 붙으니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글이 잘 안 써진다고? 슬럼프인가?’
잘은 모르지만, 창작자들 사이에 이런 일이 흔한 거로 알기에 수한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 역시 택시를 잡았기에 수한은 택시를 타고 가면서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이게 뭐지?’
직접 종이로 뽑아 봐야 능력치를 알겠지만, 무언가 애매했다. 수한은 자신이 졸려서 그런 건가 싶어 눈을 연신 비벼 봤지만, 글이 눈에 익을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해졌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수한은 목적지를 수정하여 인쇄소에 가기로 했다. 이 눈으로 직접 능력치를 확인해 봐야 수한이 피곤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유지아 작가의 작품이 재미없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합니다.”
수한이 택시에서 내리자 벌써 어둠이 찾아왔다. 그런데도 인쇄소는 하얀 조명을 켠 상태로 운영 중이었다. 수한은 곧장 프린트를 출력한 뒤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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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 대중성: C, 화제성: C, 평균 시청률: 3%, 성장 가능성: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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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씁쓸한 미소가 나왔다. 이럴 때 대중적인 안목을 가진 게 슬프긴 하였다. 유지아 작가가 급하게 메일을 보낼 만했다.
‘그래도 작가님도 자신의 문제점을 알기는 하네.’
아는데도 고치지 못하고 나아갔다가 망하는 드라마가 부지기수였다. 아마도 그리될까 봐 두려워서 수한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요청한 게 아닐까 싶었다.
수한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이 글의 문제점을 찾는 것이었다. ‘로맨스는 없었다’를 쉽게 고친 이유는 원본이 가진 장점이 확 눈에 드러나서였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잘 모르겠다.
‘창작자들이 이래서 머리를 싸매는구나.’
대중이야 그냥 나온 것을 재미있게 보면 되지만, 창작자는 어떤 요소가 재미있는지 분석하고 써야 하니 골치가 상당히 아팠다. 그래도 보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수한은 집에 돌아와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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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살이 빠지셨네요?”
“역할 연구 좀 하느라.”
지나가는 길에 들린 예진의 집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수한은 살짝 당황했다. 수한이 안 보는 동안 예진은 생활에서 먼저 몰입하는 배우가 되었다. 예진의 말로는 아직 캐릭터의 느낌이 제대로 안 잡혀서 그렇다는데 수한의 생각은 달랐다.
‘완벽히 그 캐릭터인데?’
안 그래도 말랐는데 살을 더 빼니까 뼈밖에 안 남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보이던 예진의 강한 눈빛이 보이지 않았다.
“굶어서 살 빼는 편입니까?”
“운동해서 빼면 이 캐릭터의 모습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렇기는 했다. 예진이 맡은 역할은 먹지 않아서 마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집 밖으로도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 몸의 근육이 있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한때 나한테 도움을 청할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진은 배우로 잘 성장했다. 수한은 미국에서 예진이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 와서 어색하게 웃었다. 선물 잘못 사 왔다. 수한이 쇼핑백을 뒤로 돌리니 부스럭 소리가 났다. 덕분에 예진이 그 선물의 존재를 알아챘다.
“선물 사 왔어?”
“네. 일본에서 제가 너무 얻어먹어서요.”
“하긴 네가 많이 얻어먹기는 했지.”
아니라고 하기에는 예진이 대부분 돈을 썼다. 예진은 수한이 가져온 초콜릿을 살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살을 빼고 있는 상황에서 살이 찌는 음식을 들고 왔으니 그런 반응이 당연했다. 그러나 곧바로 초콜릿을 까는 모습에 수한이 더 당황했다.
“유통 기한이 좀 되어서 나중에 드셔도 됩니다.”
“됐어. 하나 정도는 괜찮아.”
성민이 하는 말이었으면 과연 하나로 끝나겠냐고 비꼴 수도 있었겠지마는 예진이라서 수한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수한보다 더 절제가 강한 예진이니 믿기로 했다. 예진은 초콜릿 하나만 입에 넣은 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그렇죠?”
“내가 이 초콜릿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인터뷰에서 본 기억이 있어서요. 그래도 제가 한때 예진 씨 매니저였잖아요.”
특히나 성격이 까다로운 예진이라서 사소한 것 하나라도 더 알려고 외웠던 기억이 났다. 그 노력 때문인지 지금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그 말을 듣는 예진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
‘안이 덮나?’
라고 하기에는 수한도 눈치가 영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하나 먹어 보라고 하는 예진이 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가격이 꽤 비싼 편이라서 살 때 고민했는데 그 고민이 무색하게 맛있다. 깔끔하게 단 게 예진이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살 빼는 건 좋은데 건강하게 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너보다 더 경력이 오래됐거든.”
수한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고,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재원도 없이 방문한 거라서 남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었다. 그전에 수한은 한 가지 더 산 선물을 내밀었다.
“뭐야?”
“순돌이 옷이요.”
동물 옷이 작아서 그런지 만들기도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니 그렇게 비싼 게 아닐까 싶었다. 예진은 초콜릿보다 순돌이 옷을 더 기뻐했다. 수한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웃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인사를 건넸다. 예진은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수한을 붙잡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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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월화극 평정하다, 시청률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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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사가 뜨면서 불편한 공기가 회장실 안에 돌았다. 그러나 한 사람만큼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강우형이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이수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기사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회를 달라고 해서 기회를 줬더니 단번에 성공해 버렸다. 그동안 나이수가 들인 노력이 무색하게 말이다.
“축하하네.”
“제가 축하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엘 엔터테인먼트가 축하받을 일이죠.”
그 말이 맞기는 했다. 대중들의 시선이 싹까지는 아니어도 조금은 바뀌긴 했으니까. 망한 드라마만 내놓다가 드디어 감 잡았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이수는 이 반응이 달갑지 않았다. 마치 강우형이 옳고, 나이수는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고 이놈을 위주로 뭉치는 세력이 등장했다고 하던데.’
그토록 열심히 막아 왔던 일이 물밑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강우형이 나이수 앞에서는 겸손하지만, 밖에 나가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드라마를 만들면 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4화가 지나갔는데도 화제성이 커지면 커졌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대본을 사 온 건지 나이수도 팔짱을 끼며 드라마를 보다가 시간이 훅 지나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번 건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
“그럼 다음 드라마도 제게 맡겨 주십시오.”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에 나이수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제작하는 사람도 콘텐츠가 흥할지 망할지 잘 모른다고 하였다. 망할 줄 알았던 드라마가 흥하는 경우가 있고, 수십억 투자했더니 망하는 드라마가 있어서 더 그랬다. 물론 상영회 반응이 좋기는 했으나, 이러다가 뒤집힌 일도 있어서 나이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더 놀랐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만약 다음 드라마까지 성공하면 큰일이다. 나이수는 저 자신감의 근원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강우형의 안목이 좋아서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동안 봐 왔던 게 있기에 절대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