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9. 캐스팅 디렉터
데이빗 랩. 이미 유명한 탑스타였다. 탑스타답게 온갖 추문이 따라오지만, 다른 건 몰라도 두 가지는 충족하는 배우였다. 하나는 얼굴이었고, 하나는 연기였다. 나이는 30대 후반이지만, 워낙 관리를 잘해서 30대 초반으로도 오해받을 잘생긴 얼굴의 소유자였다.
‘내 안 좋은 기억력이 이럴 때 발휘될 줄은 몰랐네.’
데이빗 랩은 다른 건 몰라도 연기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달리 상 복이 없었다. 누군가는 저 외모만 유지되면 됐다고 말하겠지만, 데이빗의 생각은 달랐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사실 나중에 이광무 감독에 출연하는 거였지만.’
그 인연을 당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여겼다. 예전이라면 이런 소소한 것들을 걱정할 수한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광무 감독과 만날 사람인데 먼저 만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여겼다.
수한은 특히나 이번 이광무 감독의 작품이 연기력을 보이기 좋은 작품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 있게 데이빗 랩에게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절대 굽히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수한의 뒤에는 있는 건 거장 이광무 감독이다. 절대 먼저 굽힐 필요가 없다.
<안녕하세요.>
데이빗 랩은 누가 탑스타가 아니랄까 봐 후광이 비쳤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이 엄청났다. 굳이 수한이 능력치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 스타성이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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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랩 – 스타성: SS, 연기력: S, 가창력: A, 춤: A, 인지도: SS, 기타: S, 성장 가능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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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알아주는 탑스타여서 그런지 등급도 그냥 S가 아니라 SS였다. 수한은 데이빗이 오기 전부터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긴장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편한 얼굴로 데이빗을 맞이했다.
<캐스팅 디렉터 김수한입니다. 제가 데이빗 씨에게 메일을 보낸 사람입니다.>
<오, 그분이시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동안 다른 배우들에게 무시받은 게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탑스타라고 조금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차피 데이빗도 오디션을 보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데이빗은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후광이 비치네.”
“네. 키도 크고 잘생겼죠. 하지만 우리가 봐야 할 건 외양이 아닙니다.”
이광무 감독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수한이 외모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말하는 거였다. 그걸 이광무 감독도 잘 알았다. 얼굴은 보지 않고, 절대적으로 연기만 보겠다는 수한의 의지를 강하게 느꼈기에 이광무 감독은 웃으면서 여유를 부렸다.
‘순식간에 몰입하네.’
대사 없이 표정을 보기만 해도 연기를 잘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수한은 저 사람이 무조건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기대를 담아 이광무 감독을 보는데 이광무 감독은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어?’
그 표정을 수한만 본 건 아니라서 데이빗은 연기를 마친 후 살짝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게 왠지 마음에 들었다. 이광무 감독은 턱을 매만지며 날카롭게 데이빗을 보았다.
<이름이 데이빗 랩?>
<네. 그렇습니다.>
<연기가 좋은데 조금만 톤을 다르게 할 수 없을까요?>
서툴지만, 열심히 공부한 티가 나는 영어가 들렸다. 수한은 솔직히 말해 놀랐다. 이광무 감독이 영어 할 줄 안다는 건 지금 처음 안 사실이었다.
‘외국에 살다 온 경력은 없는 거로 아는데.’
그러니까 더 대단해 보였다. 그러니까 외국 영화에 도전하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 열정이 놀라웠다. 데이빗도 그 열정에 놀란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톤을 다르게 하였다. 톤 하나 달라진 것뿐인데 인물이 달라졌다. 이광무 감독은 계속해서 연기 지시를 하였다.
데이빗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더니 이런 식으로 연기 조절을 하는 게 재미있는지 이광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끝내 이광무 감독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자고 하면 할 생각이 있나요?>
<이런 걸 늘 하는 건 힘들겠지만, 재미는 있겠네요.>
이광무 감독이 무사히 데이빗의 흥미를 끌어냈다. 데이빗은 이미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졌기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스티브와 정반대의 위치였다.
그 이후부터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데이빗이 들어온다는 소문이라도 돈 것인지 거절 의사를 밝혔던 배우들도 다시 하겠다고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괘씸죄라도 물고 싶었으나, 그럴 처지는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더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들어온다면 대환영이었다.
‘만약 감독님께서 고집을 부렸으면 안 됐겠지만.’
자기 작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이광무 감독이었다. 수한은 왜 그가 거장이라 불리는지 이번에 한 수 배웠다. 그 존경심이 수한의 행동에 묻어 나온지라, 안 그래도 수한에게 호감이 있던 이광무 감독은 다음에도 수한을 고용할 생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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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 당분간은 푹 쉬었다가 다시 보지.”
“아닙니다.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촬영 시작하면 현장에 들르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캐스팅을 모두 마쳤다. 특별히 문제가 생기면 수한이 나서야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이광무 감독은 수한보다 더한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보는 눈이 같단 말이야.’
후보군은 수한이 정해서 올리지만, 결국에 뽑히는 사람을 보면 같았다. 수한은 자신의 할 일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광무 감독에게 필요한 건 선택에 대한 확신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네. 그러면 조심히 들어가세요.”
수한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사우나부터 들렸다. 외국물을 먹어서 그런지 한국물에 몸을 흠뻑 적시고 싶은 마음이었다. 한창 직장인들이 회사에 있을 시간에 가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수한은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근 후 내일 있을 일정을 생각했다.
‘감독님은 푹 쉬라고 했는데 푹 쉴 시간은 없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만 리다. 수한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스윗걸즈를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수한과 함께했던 아이들이다. 비록 그들을 보호하다가 사고를 당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래. 적어도 그 애들이 왔을 때 자금이 넉넉한 소속사를 만들어야지.’
과거라고 해야 할지, 미래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시기를 수한은 3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다른 연예인들은 몰라도 스윗걸즈는 수한의 손으로 다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그 시기가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말이다.
수한이 목욕을 다 하고 나왔을 때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가진 게 오랜만이기에 여유를 가졌더니 늦장을 부리게 되었다. 수한은 집으로 걸어가면서 온 연락들을 보며 웃었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니지.’
수한은 오늘 방송 확인하라는 메시지를 보고 의문을 그리다가 생각이 났다. ‘붉은 꽃’이 오늘부터 방영이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기도 했고, 너무 빨리 편성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촬영은 다 마치고 편집에 들어갔다고 하니 수한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가 본방송을 보기로 했다.
‘재미있네.’
‘붉은 꽃’이 공중파 편성을 받아 다행이었다. 케이블에서도 지금 드라마를 만들고 있으나,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수한은 이 시기가 잠시라는 것을 알았다.
‘대기업에서 돈 쏟아 내는 것에는 답이 없지.’
특히나 드라마 현장은 늘 제작비에 쪼들려 산다. 공중파 방송에서는 처음 제작비 반을 주고, 방영 후에야 반을 주니 돈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케이블은 처음부터 제작비를 화끈하게 뿌리니 케이블 드라마가 질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런 시기가 아니니까.’
어쨌거나 전윤진과 차현이 만나니 연기력이 미쳤다. 상영회 때 느낀 거지만, 오랜만에 보니 더 그렇게 느껴졌다. 둘뿐만이 아니라 조연을 뽑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인지 연기 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덕분에 몰입감도 장난이 아니어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음 편 예고가 나가고 있었다. 편집을 어떻게 손본 건지 상영회 때보다 더 잘 빠졌다.
감독이 수한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능력자였다. 수한은 이 사람을 감독으로 뽑은 강우형의 안목에 감탄하였다.
‘됐네.’
이제 두 배우를 이광무 감독과 연결해 줄 이유가 없어졌다. 이미 드라마는 대박 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 일정을 확인하려고 했던 수한은 갑자기 오는 전화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상영회 때 안 온 사람들한테까지도 전화가 오네.’
그럴 만한 게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데이빗 랩이 캐스팅되었다는 소문까지 돌아 버렸다. 수한의 캐스팅 능력에 다들 눈이 돌아 버렸다. 예의도 없이 이 밤에 전화한 걸 보면 답이 나왔다. 그래도 수한은 프리랜서라는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다.
“네. 김수한입니다. 명함에 드린 메일 주소를 통해서 문의하시면 제가 조금 더 편하게 답을 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막무가내로 같이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일을 보냈는데 잘 갔냐고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후자 쪽으로 마음이 가는 게 당연했다. 기본을 지키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작품을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편히 자기는 힘들겠네. 어차피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정신이 맑지만.’
수한은 밤새 메일을 보며 괜찮은 것과 아닌 것을 선별해 냈다. 이 일을 오래 할 생각은 아니지만, 거절해도 거절의 이유를 제대로 달아 주는 게 낫다고 여겼다. 물론 그 반응도 천지 차이라서 수한은 받아들일 사람은 받아들이고, 아닌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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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월화극 시청률 1위, 첫 방부터 시청률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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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전화가 빗발치게 많이 오더니 그 결과물이 나왔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오니 기적이라는 말이 나왔다.
수한은 시청자 반응을 살폈다. 하나같이 호평이었다. 영화만큼이나 드라마도 입소문이 대단했기 때문에 수한은 대본이 말해 준 시청률을 기대하였다.
‘이 정도면 관심 꺼 둬도 되겠네.’
다른 작업에 들어가도 될 것 같다. 물론 이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은 유지영의 영화 촬영 현장에 방문하는 거였다. 유지영이 그렇게도 찬양하는 서이나도 볼 겸해서 말이다.
‘다른 것보다 시차 적응이 힘드네.’
밤에 멀쩡했던 정신이 팍 죽으면서 죽음과 같은 잠이 밀려들어 왔다. 그래서 수한은 오늘 운전은 하지 않기로 했다. 잘못해서 졸음 운전으로 훅 가면 그동안 해 왔던 고생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러나 영화 촬영 현장 장소가 그리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래. 돈은 이럴 때 써야지.’
일본에서 택시를 마음껏 타고 다녔던 때가 떠올라서 수한은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수한에게 연락한 사람 중 하나가 예진이다. 나중에 통화하려고 미룬 것이 지금 떠올랐다.
‘조만간 만나서 선물 드려야겠다.’
일본에서 얻어먹고 다닌 것을 잊지 않았다. 수한은 예진을 위한 선물을 생각하며 택시를 잡았다. 꽤 먼 거리에 차비가 상당히 나올 것으로 보이자 택시 기사는 기분 좋게 운전을 했다. 수한은 가면서도 종종 졸음을 쫓아내지 못해 고개를 여러 번 꾸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