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112화 (112/186)

112  9. 캐스팅 디렉터

합격자가 발표 나고 몇몇 배우는 지나치게 기뻐했고, 몇몇 배우는 차분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 가운데 홀로 우울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스티브 헌트, 유일한 탈락자였기 때문이다.

<다음에 다른 작품에서 보게 될 거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네. 그렇겠죠.>

미국 연예계도 넓다면 넓지만, 그래서 더 좁은 구석이 있었다. 넓은 만큼 다양한 곳에 또라이가 분포되었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들과만 작업하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마피아나 마약으로 골치가 아픈 부분이 많아서 더 그랬다.

‘물론 한국도 이제는 마약 청정국은 아니니까.’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 순간 연예인들의 마약 스캔들이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마약상들을 잡는다고 하여도 그게 윗선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꼬리 자르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스티브는 애써 웃었지만, 유일한 탈락자였기에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처음에 올 때만 해도 탈락하면 한국 관광이나 하자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 내키지 않았다.

그때 처음 스티브를 공항에서 맞이했던 수한이 다가왔다. 눈에 익은 인사라 스티브는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스티브, 저와 잠깐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보나 마나 스티브를 위로해 주려고 말을 건 게 틀림이 없어서 스티브는 애써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수한이 스티브를 불러 세운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국 드라마요?>

<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티브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솔직히 말해 합격할 거라고 자신 있어서 한국에 온 거라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한의 제안이 흥미롭기도 하였다. 어차피 미국에서는 배우로서 자리를 잡는 중이고, 자리를 잡게 되면 이런 식의 모험은 할 수 없으니 그의 도전 정신이 고개를 쳐들었다.

<제가 출연할 만한 드라마가 있나요?>

이럴 줄 알고 수한은 미리 준비해 두었다. 그것도 스티브가 하기에 적합한 드라마를 말이다. 미국에서는 조금이라도 알려진 배우이다 보니 서브 남자 주인공으로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수한이 일부러 자문을 얻어 구해 온 영어로 번역해 온 대본이었다. 일일이 이렇게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한 번은 읽어 보게 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티브의 능력치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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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헌트 – 스타성: S, 연기력: A, 가창력: B, 춤: B, 인지도: D, 기타: A, 성장 가능성: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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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수한은 해외 스타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티브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 눈은 믿었다. 비록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는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수한은 또 다른 연을 만들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스티브에게 제안하였다.

<고민을 조금 해 봐야겠어요.>

<네, 물론이죠. 그동안 함께 서울 관광을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스티브를 위해서 한국 맛집을 따로 찾아 뒀거든요.>

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스티브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잠깐 시선이 위로 향하는 게 수한이 제안한 것을 고민해 보는 것 같아 수한은 천천히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수한은 몰랐다. 스티브가 한국이 키운 해외 탑스타가 될 줄을 말이다.

***

“네, 알겠습니다. 만족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수한이 바쁜 이유는 일하는 데 있어 한 가지 일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 돈을 바짝 모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갑자기 요청해 온 의뢰라 당황했는데 서울 관광을 다 하고 난 후 스티브에게서 긍정적인 답안을 받아서 수한은 겨우 숨을 돌렸다.

‘솔직히 스티브를 보자마자 그 역할이라 생각했단 말이야.’

이어서 수한이 한 일은 스티브에게 한국말 공부하기에 좋은 학원을 추천해 주는 거였다. 너튜브가 발전이 잘 되어 있기는 해도 강사가 일대일로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수준이 달랐기에 수한은 물어물어 좋은 학원을 알아냈다.

스티브에게 후기를 들어 보니 강사가 굉장히 친절하고 설명을 잘 해 준다며 좋아했다.

‘피곤해 죽겠네.’

수한은 홍삼 한 봉지를 입에 담으며 움직였다. 그다음으로 가야 할 곳은 ‘붉은 꽃’ 촬영 현장이었다. 수한은 고전 괴담 중 하나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쥐가 사람의 손톱을 먹으면 손톱 주인으로 변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분신 하나 늘리고 싶네.’

‘붉은 꽃’이 시대극이다 보니 주 촬영장은 따로 지어 둔 시대극 세트장이었다. 얼마나 한 장소를 돌려 막기를 많이 한 것인지 시청자로서 볼 때 그 마을이 그 마을이었다. 물론 한양이라고 생각하고 찍는 거면 일관성이 있어서 나쁘지 않지만, 촬영 현장이 열악하기는 했다.

“복장 멋있네요.”

“그렇죠? 저도 무사 복장이 저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차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몇 번이나 거울로 복장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수한이 전윤진을 보니 전윤진은 고운 한복을 입고 있었다. 수한이 인사를 건네자 반가워하며 수한을 맞이했다.

“이광무 감독님이랑 다음 달에 미국 간다면서요?”

“아니, 드라마에만 집중해야 할 분이 너무 다른 것에 정신 팔린 거 아닙니까?”

“궁금하니까 그렇죠. 근데 우리가 한 약속은 못 지킬 것 같네요. 천만다행으로요.”

“그렇죠?”

촬영 속도는 생각보다 빠른 편이었다. 남자주인공이 무사가 되는 건 초중반 부분인데 한 달도 안 되어서 벌써 이 장면 촬영이었다. 촬영이 빠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감독이 크게 고집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은 촬영해 보고 괜찮다 싶으면 더 찍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겼다.

“다른 것보다 이런 드라마가 성공해야 좋은 사례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전윤진이 봐도 촬영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밤샘 촬영을 하지 않으니 다들 상태가 좋았다. 무엇보다 작품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전윤진은 이광무 감독을 소개받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가지면서도 크게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솔직히 작품 망해서 이광무 감독을 소개받는 것보다 작품이 성공해서 이광무 감독의 눈에 띄는 게 훨씬 나았다.

“컷! 다음 장면 갈게요!”

두 주연 배우를 포함해서 베테랑 배우들이 참여한지라 NG도 거의 없이 지나갔다. 드라마 팬들이 보면 안타까워할 현장이지만, 무엇보다 배우들이 편해했다.

어떤 감독은 손 하나 찍는 데 몇 시간을 소비해서 나중에는 생방송을 하게 만드니 확실히 비교되었다. 그 촬영 현장도 분명 사전 제작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배우로서는 블랙리스트지.’

수한도 배우를 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제작자와 배우가 있으면 배우에게 이입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촬영 현장은 너무 좋았다.

수한은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질 동안 감독에게 다가갔다. 일이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궁금해서였다. 이미 방영 날짜가 잡혔으니 그 일정에 맞출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오히려 방영 날짜에 맞춰 촬영이 끝날 것 같아요.”

“굉장하시네요.”

“제가 굉장하다기보다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하죠.”

처음 불안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감독의 얼굴에 핀 자신감에 수한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자신감이면 됐다. 수한은 다음 화로 연결된 대본을 보며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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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 대중성: S,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24%, 성장 가능성: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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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아니다. 시청률이 2% 더 올랐다. 평균치는 해 줘야 대본에 따른 능력치가 나온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했기에 수한은 배우들을 탁월하게 잘 골랐다고 여겼다. 특히나 주연 배우들이 수한과 약속을 하면서 철저히 감독이 원하는 대로 해줬기 때문에 더 촬영이 수월하게 흘러갔다.

“1화 편집본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가니까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함께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배우분들도 함께 보는 거죠?”

“그래야겠죠. 그래야 자기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좀 더 명확하게 알겠죠.”

수한은 피곤해하는 감독에게 비타민 음료와 음식을 챙겨 주었다. 굳이 수한이 할 일이 아닌데도 그리하니까 감독이 편하게 수한을 봤다.

“진짜 변한 게 없네요. 사실 일등 신랑감은 차현 씨보다는 수한 씨인데.”

“그런 식으로 저 띄워 줘도 나올 건 없습니다.”

누군가 종종 연애는 안 하느냐고 묻는데 솔직히 말해 지금은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해야 할 일이 있고, 이루어야 할 일이 있다. 그걸 하기 전까지는 호감을 품을 사람은 있을지언정 고백까지는 가기 힘들지 않을까 했다.

‘무엇보다 내가 시간이 없잖아.’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이 원활하지 않을 걸 아는데 수한은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상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한 사람만 일방적으로 기다리게 하는 사랑은 좋지 않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조만간 연락할게요.”

그 조만간이라는 기간 동안 편집실에서 고생할 감독과 조연출들을 생각하니 수한은 마음이 먼저 짠하였다. 그래서 수한은 연출 쪽에 관심이 있어도 그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

“좋네요.”

다행히 미국으로 가기 전에 ‘붉은 꽃’ 편집본이 나왔다. 편집본은 총 4화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 이유 때문인지 감독의 얼굴이 유난히 수척해 보였다.

원래는 1화만 할 생각이었는데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서 4화까지 다했다고 한다. 편집본이야 빨리 나오면 나올수록 좋아서 나쁘지는 않았지만, 수한은 감독의 건강을 걱정했다.

수한은 그 와중에 소강당 같은 데 모여서 상영하는 것을 보려니 웃음부터 나왔다.

‘무슨 극장에 온 기분이네.’

좌석도 영화관처럼 단 차이가 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들게 하였다. 대부분을 앞자리에 앉게 했기에 졸지에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 온 건 주연 배우뿐이라 촬영 일정에 두 사람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오늘은 조연 촬영분을 몰아서 하나 보네.’

이미 완결 고가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다른 드라마 현장처럼 스태프를 쥐어짜면서 촬영하지 않아서 여유는 있었다.

수한은 캄캄해진 가운데 손을 꼭 잡은 두 사람을 보았다. 차현과 유진이었다. 누가 사랑꾼 아니랄까 봐 대단했다. 옆에서 전윤진이 어색하게 웃는 게 보이면서 수한은 몇 번이나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애초에 차현의 옆에 앉은 게 잘못이었다.

수한이 딴 데 시선을 돌린 것도 잠시였다. 본격적으로 편집본이 상영되면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대충 찍은 수준이야?’

구도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수한은 살짝 놀란 눈으로 감독을 보았다. 감독은 퀭한 눈을 하면서도 만족스럽게 화면을 바라보았다.

수한은 보면 볼수록 이 드라마가 안 뜰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도 연출인데 이야기의 진행 속도도 빠르고, 무엇보다 흡입력이 장난 아니다. 대본으로 보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에 차이는 매우 컸다.

‘와, 이 눈 너무 정확해서 소름 돋았다.’

1화가 끝나고 나니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수한은 누구보다 가장 기뻐하는 강우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흥행작이 나오게 되었으니 안 기쁠 수가 없었다.

‘근데 회장님은 안 왔네.’

엘 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을 빼고 하는 첫 드라마라서 당연히 올 줄 알았다. 물론 회장의 위치에 있으니 바쁘기도 엄청 바쁘겠지만, 이상하게 수한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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