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9. 캐스팅 디렉터
“오빠 눈이 왜 그래?”
“내가 뭘?”
예진은 유난히 눈을 크게 뜬 재원의 모습이 굉장히 거슬렸다. 누가 봐도 거짓말 못 하는 사람답게 전화를 받은 뒤부터 보인 변화였다. 남에게 별 관심이 없는 예진까지 알아챌 정도이니 보는 사람마다 재원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매니저분 눈이 유난히 크시네요.”
“네. 제가 좀 큽니다. 하하하.”
예진은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재원이 누군가를 찾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진이 먼저 손을 뻗어 수한을 가리켰다.
“김수한. 저기 있어.”
“아! 수한아!”
왜 창피함은 자신의 몫인지 예진은 정말로 이유를 몰랐다. 그래도 막상 수한을 보니 지나치게 커졌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다만 예진과 수한을 번갈아 보는 눈이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무슨 전화를 받았길래 그래?’
예진은 재원이 전화를 받을 때 유독 정중하게 받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렇다면 재원의 윗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다는 것인데 성민에게 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굽신거리는 느낌이 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서남일 대표?’
그러고 보니 재원으로부터 남일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고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수한이 얽혀서 그런 반응인 것 같았다. 예진은 조용히 두 사람을 응시하다가 어디서 많이 본 70대 노년의 남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성예진입니다.”
“아! 영화로 봤어요. 이광무요.”
예진도 까칠하게 대할 상대와 아닌 상대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았다. 이광무 감독 앞에서는 아무리 예진이라도 멋대로 굴 수 없었다. 예진이 이광무 감독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에 재원과 대화를 나누던 수한이 어느 순간 예진의 옆에 서 있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오늘 오라고 불렀습니다. 이 기회에 감독님과 만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잘했어. 같이 연기할 배우들이 어떤 사람들이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눈빛이 좋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이광무 감독은 배우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때 분노하는 성격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수한은 대놓고 예진을 챙기지 않았다. 그보다 예진은 이광무 감독을 보며 신기해했다.
매번 멀리서만 지켜봤지, 이리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은 아니, 그녀가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진짜로 호랑이 느낌이네.’
수한의 표현력이 부족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예진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면서도 더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광무 감독의 모습에 역시 더 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그녀의 배우로서 위치가 그 정도였다.
‘김수한 말대로 내가 대표한테 갑질하려면 더 높게 올라가야지.’
예진이 마음을 단단하게 먹는 순간에도 재원은 쉽게 예진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일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각본 여기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배우들을 만나 볼 예정인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저쪽에서 읽고 계시면 따로 부르겠습니다.”
매니저 일을 할 때의 습관이 붙은 건지 수한은 담요를 따로 가져와 예진에게 건네주었다. 예진은 얼떨결에 담요를 받다가 멀리서 가만히 서 있는 재원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수한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모습이 정말로 거슬렸다.
“오빠.”
예진이 조용히 이를 악물고 재원을 부르자 그제야 정신 차린 재원이 예진의 옆에 섰다. 예진의 분위기가 극도로 나빠진 것을 느끼고는 다른 곳을 보는 척했지만, 예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오빠, 지금 내 매니저로 온 거야? 아니면 감시자로 온 거야?”
“뭐?”
갑자기 큰 소리를 낸 재원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봤다. 예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사르르 웃었다. 예진에 관한 소문을 아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여배우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졌다.
“서 대표가 시켜서 지금 그러고 있는 거잖아.”
예진은 이를 악물면서도 미소를 유지하였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재원에게 크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재원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미안한 얼굴을 했다.
예진이 이광무 감독과 만난다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면서도 막상 현장에 와서 딴짓하고 있으니 매니저 자격 상실이었다.
“미안. 내가 잠시 정신이 획 돌았나 봐.”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정신 차려. 서 대표 이야기는 조금 이따가 하고.”
“알겠어. 예진아.”
재원은 시무룩해지면서도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자신이 매니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서였다. 그보다 예진은 얘기만 주고받았지 제대로 된 각본은 처음 받았기에 긴장한 마음을 내려놓으며 봤다.
‘내 캐릭터가 이런 거구나.’
왜 수한이 영화를 보고 캐스팅하기로 마음먹은 건지 알게 되었다. 독립 영화 찍었을 때의 캐릭터와 속성이 비슷했다. 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서 별짓을 다 했던 기억이 나서 예진은 복합한 감정을 느꼈다. 그 별짓이 지금의 결과물을 만들었으니 헛된 짓이 아니었다.
“예진 씨.”
갑자기 이름을 불린 탓에 예진이 고개를 들으니 여유 있는 모습에 수한이 눈에 들어왔다. 준비 다 되었으니 어서 가자고 말하는 탓에 예진은 재원과 함께 수한을 따라갔다.
예진의 자리는 눈에 띄지 않은 구석이었다. 예진이 심사 위원석에 앉기에는 이광무 감독 옆으로도 대단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들과 연기하게 될지 보러 온 거니까.’
예진은 그 가운데 수한이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수한이 조금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소탈하게 입은 편이지만, 옷맵시가 좋아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훈훈한 느낌을 주었다. 수한을 보는 이광무 감독의 눈빛이 좋은 것을 보아 감독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매니저 일 하는 것만 보았지, 다른 일 하는 거 보니까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러다가 예진은 딱 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재원의 표정이 이상하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수한과 예진을 번갈아 보는 게 아닌가?
‘아니, 또 혼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래.’
이건 뭐 매니저로 온 건지, 감시자로 온 건지 구별할 수가 없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금발의 외국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예진이야 외국에 살다 온 경력이 있어서 다른 외양의 사람들이 보여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재원은 달랐다.
‘헉. 외국인이다.’
금발을 한 연예인을 보긴 했어도 그건 다 염색이었기에 느낌이 다르긴 했다. 그러나 재원은 생각보다 뽀얗지 않은 피부들에 또 놀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옆에 있는 예진이 더 피부도 하얗고, 예뻤다. 절대 내 새끼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한국에 직접 와 주셔서 우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 사람 중에 수한이 가장 아랫사람이므로 수한이 직접 영어를 했다. 그 발음이 서툴기는 해도 뜻은 명확하게 전달되었기에 들어온 배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수한과는 만난 적이 있기에 편하게 여긴 탓이었다.
예진은 그 과정을 쭉 지켜봤다. 누구 하나 수한을 불편하게 여기는 배우가 없었다. 이광무 감독 앞에 섰을 때는 긴장하더라도 수한이 입을 열면 다들 긴장이 조금이라도 풀렸다. 예진이 아는 수한의 매력이 방출되는 순간이었다.
‘조금 멋있네.’
매니저 일을 할 때보다 저 일을 하는 게 더 잘 맞아 보였다.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좋게 나간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저리 혼자서 날아다니는 게 더 나아 보였다.
모든 배우를 만나고 나자 수한은 그 자리에서 이광무 감독과 의견을 나누었다. 이미 눈으로 확인한 게 있으나, 그래도 연기를 보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어 그 의견들을 이광무 감독에게 온전히 전해 주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이광무 감독도 수한과 크게 생각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모든 사람이 나간 후에야 예진을 보게 되었다. 예진도 마침 수한을 보고 있었기에 시선이 딱 마주쳤다.
“잘 보셨습니까?”
“다들 연기가 장난 아니더라.”
“그렇죠?”
한국말로 연기하는 게 아니어서 감정이 덜 와닿을 수도 있으나, 달리 수한이 미리 연락한 연기자들이 아니었다. 다들 연기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최소 연기력 B다.’
S급은 오지 않았으나, 필요한 역할에는 맞는 연기를 했다. 수한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함께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 한 명에게는 한국까지 날아온 수고가 있으니 다른 기회를 줘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였다.
그 한 명은 스티브 헌트였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흥미를 느껴 보지 않을까 했다. 그와 별개로 예진의 시선이 전과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 수한은 의문을 가지며 예진을 봤다. 확실히 이광무 감독과 만나서 그런 건지 여배우 특유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래서인지 수한이 알던 예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실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진짜 적응하기 힘들겠는데?’
“각본은 어떻든가요?”
“너무 좋던데. 그리고 네가 왜 나를 지목한 것인지도 알겠어.”
“그렇죠? 감독님과는 나중에 다시 시간을 잡아 볼 테니까 그때까지 잘 연구해 두세요.”
평소 연기를 대하는 예진의 모습을 생각하면 잘 해내리라 믿었다. 수한이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재원을 보자 재원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재원을 건드리니 재원이 화들짝 놀라며 반응하였다.
“어? 어! 왜?”
“선배님,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재원이 고개를 돌리자 재원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예진이 있었다. 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예진이랑 할 말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수한아. 다음에 밥 한 끼 하자.”
“네, 알겠습니다.”
재원은 예진에게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알면서도 암울한 얼굴로 예진을 데려갔다. 그러면서도 수한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는 예진을 보니 정신이 다 아찔했다.
‘아이고. 예진아.’
솔직히 말해 남일이 미리 말해 둔 게 없었으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하지만 알아차린 걸 어찌하겠는가?
차로 가자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재원의 무거운 한숨 소리에 예진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재원은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오빠.”
안 그래도 오늘 일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기에 예진이 입술을 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재원은 자신이 먼저 말하고 싶었다.
“너 김수한 좋아해?”
“뭐?”
예진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순식간에 하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반응에 재원은 눈을 감으며 차 시트에 몸을 기댔다. 아니, 수한을 좋아할 수는 있다. 근데 아까 그 현장을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김수한은 예진이한테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하나도 없잖아!’
수한을 재원도 좋게 보기는 해도 둘 중에 한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재원은 예진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진이 수한을 짝사랑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재원을 더 심란하게 하는 건 예진의 반응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서 대표지? 서 대표가 그런 말을 해서 오늘 그렇게 반응한 거야?”
주혁의 때와 비슷하게 질색은 하는데 그게 재원의 눈에는 정곡을 찔려서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같았다. 다시 한번 흘러나오는 재원의 한숨 소리에 예진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소용없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 그렇게까지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래.”
결국에는 인정하는 모습에 재원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다만 다음에 수한을 보게 되면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었다. 매니저가 아니라 언제 예진의 아버지가 된 건지 재원의 속은 부글부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