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9. 캐스팅 디렉터
“실제로 사귀는 게 아니면 딱히 생각 없어. 사귀어도 별문제는 안 되지만, 불편하기는 하지.”
영화 이야기가 나와야 할 곳에서 연애 문제가 나온다면 불편할 만했다. 수한은 그래도 이광무 감독이 예진의 상황을 이해해 줘서 감사했다.
“그래서 자네하고는 다른 사이는 아니고?”
“당연히 아닙니다.”
수한이 단호하게 말하자 이광무 감독은 자신이 다 아쉽다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수한은 다 좋은데 이런 이야기를 부디 예진의 앞에서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분노의 눈길을 정면으로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인종 차별이야 시상식장 가는 길에도 많이 당해 봤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습니까?”
하기야 수한보다 더 외국에 많이 가본 게 이광무 감독이었다. 대부분 초청 당해서 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인종 차별을 당했다고 하니 수한은 자신의 기분이 더 상하였다. 특히나 이광무 감독이 초연해서 더 그랬다.
“그러고 보니 나 아는 친구가 자네를 소개받고 싶다는데 시간이 괜찮을지 모르겠군.”
“감독님의 아는 분이요?”
“이걸로 알아주는 인사인데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 자네의 실력을 시험해 보라고 조언한 것도 그 친구네.”
두 손가락을 문지르는 이광무 감독의 행동에 수한은 그 사람이 돈이 많은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전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강우형의 이야기에 따르면 수한을 방해한 사람은 남일일 텐데 이광무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감독님 나이대 분이신가요?”
“나보다는 젊은 편이야. 물론 그렇다고 자네만큼 젊은 것도 아니야. 한 50대 후반이겠군.”
그렇다면 남일은 확실히 아니었다. 수한은 강우형이 무언가 오해를 한 게 아닐까 싶었다. 50대 후반에 돈이 많은 인사가 뭐 하러 수한을 방해하려고 하겠는가? 오비이락(烏飛梨落)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감독님께서 주선해 주시는 분이라면 만나고 싶습니다.”
“굳이 급하게 만날 필요는 없고,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소개하지.”
“네, 감독님.”
“그리고 그 여배우 관련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확실히 수한이 이광무 감독의 호감을 제대로 샀는지 이광무 감독은 자애롭게 수한을 대했다. 일할 때만큼은 호랑이라 불리는 이광무 감독이라서 그런지 영화 관계자들은 자기들끼리 수한에 관하여 평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일은 잘하는 친구.’
이광무 감독이 이처럼 인상을 안 찌푸리고 편하게 있는 건 또 처음이라 업계에서 수한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아니, 몇 단계 상승하였다.
수한은 일 처리를 위해 잠시 핸드폰을 봤다가 깜짝 놀랐다. 가기 전에 먼저 연락을 넣어 둔 외국 배우들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답 메일이 온 것이다. 더불어 그 내용에 수한은 깜짝 놀랐다.
“한국에 와서 감독님을 직접 뵙고 싶다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놀란 수한과 다르게 이광무 감독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와 더불어 전혀 놀라지 않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수한은 이 상황을 쉽게 이해했다. 이광무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자주 초청받는 인사였다. 그만큼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배우들이 이광무 감독님의 작품을 탐내는 거였지.’
그걸 이런 식으로 알게 되어 수한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괜히 해외에 나가서 주눅 들고 미리 구부릴 필요가 없었다. 수한의 앞에 있는 사람은 거장 이광무 감독이다.
“제가 잠시 실례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야. 잘 모르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언제 온다고 하나?”
“주중에 오겠다고 합니다.”
“좋아. 그럼 다음 주로 일정을 잡지.”
수한은 신뢰가 가득한 미소에 고개를 숙였다. 수한이 고개를 숙여야 할 상대는 오롯이 이광무 감독뿐이다. 수한은 그 사실을 잊지 않기로 했다.
***
수한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항에 자주 오는 건 아니라지만, 비정상적으로 시끄러운 것 같아서 주위를 살피니 크게는 20대 후반이며 낮게는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들이 출국장 앞에 있었다. 수한은 이런 광경을 음악 방송 앞에서도 본 적이 있기에 대충 상황 파악을 마쳤다.
‘아이돌이 오는구나.’
수한은 외국에서 오는 배우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인천 공항에 온 것이었다. 원래라면 그쪽에서 오디션을 보는 처지라 수한이 마중 나올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멀리서 온 손님이라 나왔다. 게다가 외국 배우라고 한들 수한과 다른 쪽에서 어떻게 연이 닿을지 모르기 때문에 수한은 한국에 있는 동안 잘해 주기로 했다.
그때 플래시가 마구 터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강렬한지 나오는 사람들이 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팬들에게는 그런 배려가 없었다. 그 가운데 수한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는 먼저 손을 흔들었다. 미국에서 떠오르는 스타로 불리는 스티브 헌트였다.
‘이쪽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없구나.’
아직 아이돌이 나오지 않은 건지 카메라를 여러 번 찍는 소리만 들렸다. 어떤 의미로는 민폐여서 수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수한이 먼저 영어로 인사를 건네자 스티브는 밝은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타국에 오다 보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미국 드라마로 익힌 영어 실력이라고 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평소 한국에 관심이 많았었어요.>
<그랬습니까? 그래서 직접 한국에 오신 거군요.>
<언젠가 한 번쯤은 오고 싶기는 했거든요. 덕분에 오게 되었네요.>
신기하다는 듯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호감이 있었다. 오늘은 손님 편하게 가라고 차를 가지고 왔다. 물론 지하철로 서울까지 직접 가는 경험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안타깝게도 관광이 주목적이 아니었다.
<숙소는 잡으셨습니까?>
<네, 물론이죠. 한국은 미국인들이 오기 편하게 잘 만들어 놨더라고요.>
하기야 지하철에서도 외국인들 배려한다고 온갖 언어로 지하철역을 안내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이처럼 편한 관광지가 없었다.
<최근에 출연한 드라마는 잘 봤습니다.>
<꽤 판타지 한 드라마였죠?>
<네. 그쪽으로 관심이 많으신가요?>
<그렇다기보다는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마도 스티브를 포함해서 한국에 오는 배우들이 대부분 도전 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었다. 수한은 이 사람들을 본받기로 하였다. 수한은 스티브를 호텔에까지 데려다준 뒤 따로 시간을 잡아 식사하기로 했다.
<한국 맛집을 알아 두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한은 스티브를 데려다주기가 무섭게 곧장 이광무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한이 느낀 바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광무 감독은 그런 수한의 세세한 점을 좋아하였다.
‘이런 걸 굳이 왜 내게 알려주냐고 화내는 분도 있긴 했지만.’
다행히 이광무 감독은 그편에 속하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합이 잘 맞아서 수한은 이광무 감독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와는 이번으로 연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철저하게 일하기로 했다.
수한은 시간을 확인하고 한 번 더 공항으로 갔다. 한 번에 오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각자 다른 시간에 오기 때문에 수한은 굉장히 바쁘게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한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게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이런 것도 내게 큰 자산이 되겠지.’
수한은 진심으로 그리되리라 믿었다.
***
예진은 기분이 매우 별로였다. 그러나 순돌이 앞에서는 자기 성질대로 다할 수 없었다. 예진이 손을 뻗자 순돌이 순순히 예진의 품에 안겼다. 일 가기 전에 보는 거였다. 그 이후로는 순돌이를 병원에 맡기고 출발하였다.
“예진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내가 언제 긴장한 적 있어?”
까칠하게 대답하는 예진을 보면서 재원은 지금 그러고 있다고 속으로 말하였다. 오늘은 이광무 감독과 만나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예진은 답지 않게 긴장하였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생각나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소문 누가 낸 거래?”
“무슨 소문?”
“내가 고주혁이랑 사귄다는 소문 말이야.”
재원은 그 소문을 듣고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자신을 후회하였다. 예진이 저리 싫어할 줄은 재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난 까칠한 사람은 별로야.”
“그치?”
누구는 주혁을 예진의 남자 판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직접 주혁을 경험해 본 재원으로서는 예진이 훨씬 낫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이미 가온 엔터테인먼트 내에서는 그리 통하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 일본 여행은 재미있었어?”
“나쁘지 않았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만 보더라도 상당히 즐겁게 보내고 온 것 같아서 재원이 다 뿌듯했다.
“다음에는 나도 데리고 가라.”
“그러려고. 그래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안 나지.”
한번 말한 건 잘 지키는 예진이라서 재원은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게 되었다. 물론 그 약속을 지키려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했다. 무엇보다 이광무 감독의 작품을 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근데 꼭 오늘 가야 해? 널 부른 것도 아니라며.”
“김수한이 오늘 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잖아.”
재원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한의 말인데 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예진이 수한의 추천으로 이광무 감독의 작품에 들어가게 된 거라 더 수한의 말을 잘 들어야 했다.
“걔는 진짜 난 놈이야.”
“그래 보여?”
“이 업계에서 자리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성격이 좋으니까 그런 거겠지.”
예진의 말에 재원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예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나 공감하는 말이기도 했다. 예진이 인정할 정도다. 게다가 강단도 있어서 일하는 데 있어서 추진력이 있다.
‘그래서 나가서 잘되는 건가?’
오히려 조직에 얽매이기보다는 혼자서 날아다니는 편이 수한에게 더 잘 맞아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나가길 잘한 것이다. 그러나 찝찝한 건 역시 수한이 쫓겨나다시피 해서 나갔다는 거다.
‘그래도 예진이는 챙겨 주네.’
통 연락을 안 하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은근 잔정이 많은 것 같아서 재원은 수한이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전화가 왔다.
‘응? 대표님이잖아?’
“나 잠시만 전화 받을게.”
“응.”
예진은 차 시트에 편하게 기대서 하늘을 봤다. 예진이 마인드 컨트롤을 할 때 쓰는 법이므로 재원은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네, 구재원입니다.”
[지금 이광무 감독 보러 가는 길이지?]
“네, 그렇습니다.”
[가면 김수한도 있는 건가?]
“네, 아마도요?”
수한이 직접 오라고 했으니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대답한 것인데 핸드폰 너머가 조용해졌다. 재원은 전화가 끊긴 건가 의심하다가 갑작스러운 내용에 놀랐다.
[성예진과 김수한 분위기를 잘 살피고 와서 내게 보고해.]
“네?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야. 둘 사이가 의심돼.]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
재원은 뜬금없는 말에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둘 사이가 의심된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수한이 예진을 추천해서 그런 걸까? 재원은 여전히 수한을 경계하는 남일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이 정도 집착이면 그냥 쫓아내지 말고, 옆에 끼고 있지 그랬냐고 말하고 싶었다.
[둘이 일본도 함께 다녀온 사이야. 이런 데 내가 의심을 안 할 수 있겠어?]
순간적으로 재원의 정신이 확 깨어났다. 그리고 재원은 자신도 모르게 백미러로 예진을 봤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굳이 일본에서 수한이 묵는 호텔을 묻던 것도 그렇고. 물어봐 달라고 할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했다.
평소라면 남일의 말을 듣지 않을 재원이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 말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