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9. 캐스팅 디렉터
수한은 지난번과 비슷하게 깔끔한 복장으로 이광무 감독의 저택을 찾았다. 수한은 소탈해 보이고자 비싸 보이는 물품들은 다 뺀 상태였다.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랬으니 나름 일관적인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한입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수한의 이름을 말하니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수한은 드라마 현장에서만 보던 넓은 저택을 신기하게 보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이광무 감독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이광무 감독의 영화 제작을 맡은 제작사 대표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이니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한은 이광무 감독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었기 때문에 제작사 대표의 존재는 그렇게 크게 느끼지 않았다.
“감독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수한은 기대 하나 하지 않는 얼굴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이 사람의 태도와 이광무 감독의 태도가 비슷할까 하는 염려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거실로 가기가 무섭게 안경을 쓴 이광무 감독이 보였다. 오늘은 한복 차림이었다. 이광무 감독과 굉장히 잘 어울리는 옷차림이라 수한은 미소부터 지었다. 수한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이광무 감독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수한은 말을 빙빙 돌리는 것보다 직설적으로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광무 감독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곧바로 자신이 봐 둔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내놓았다.
지난번과 다르게 안경을 썼기 때문에 이번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보지 않았다. 그중에서 이광무 감독의 관심을 크게 끈 사람은 예진이었다.
“누구라고?”
“성예진이라는 배우입니다.”
옆에서 제작사 대표가 동요하는 게 보였지만, 이광무 감독은 흥미로워했다. 이광무 감독으로서는 예진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이 배우를 선택한 이유는?”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 연기를 보여 드리는 게 낫다고 판단합니다.”
수한이 노트북과 USB를 꺼내자 이광무 감독은 수한의 준비성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실 이런 게 기본적인 일이긴 하나, 의외로 기본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이광무 감독 앞에서 그런 사람들이 은근 있었기에 수한은 기본에서 점수를 깔았다.
“흐음.”
왜 수한이 단번에 예진이라 콕 짚어서 말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좋은 눈빛을 가진 배우였다. 게다가 평범하게 서 있는데도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저절로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수한이 슬쩍 눈치를 보자 처음에 예진에 대해 선입견을 품었던 제작사 대표도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은근 아니, 대놓고 연기를 잘했다. 그동안 이것저것 도전하며 고생해 온 예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왜 이런 배우를 나는 처음 봤지?”
“처음에는 연기를 잘 못했습니다.”
수한이 말을 하기도 전에 끼어든 제작사 대표의 모습에 이광무 감독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제작사 대표도 눈치는 있는 사람인지라 자신의 실수를 알고 수한에게 미안하다고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네. 들은 대로 처음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연기에만 만족했던 배우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렇다는 거군.”
“아마 더 성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배우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수한은 이광무 감독이 묘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저지른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사이에 제작사 대표가 끼어들어 수한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 수한 씨 예전에 매니저 일을 했었다죠?”
“네, 그렇습니다. 사실 그때 잠깐 맡은 적이 있는 배우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게 낫다고 여겨 수한은 제작사 대표의 말에 빠르게 대답했다.
“매니저 일을 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1년 일했으니 어떻게 보면 이 일을 더 오래 하게 되었네요.”
이광무 감독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얼마 안 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일할 때는 반말하는 편인데 괜찮아요?”
“그럼요! 얼마든지 말 놓으십시오.”
수한의 신이 난 얼굴에 이광무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솔직히 말해 카페에서 봤을 때부터 이광무 감독은 수한이 마음에 들었다. 나름대로 정리해 온 게 이광무 감독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외국 배우들을 잘 모르는 이광무 감독의 시선에 맞춰 작성한 자료였기 때문에 이해가 더 잘 되었다.
게다가 예진을 포함해서 다른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니 수한이 왜 그들을 원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광무 감독은 수한의 안목에 크게 감탄했다. 하나같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정도로 마음이 잘 맞는 사람이라면 원하는 역할에 제대로 된 배우들을 캐스팅할 거라 믿었다. 왜 수한이 이쪽에서 단기간에 유명해졌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미국은 언제 가실 생각입니까? 직접 가서 보셔야 직성이 풀리시잖아요.”
“그렇지. 두 달 후에 어떤가?”
“좋습니다. 맞춰서 일정 비워 두겠습니다.”
두 달 후면 수한도 일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해서든 조절해야 했다. 그보다 이대로 진행하려는 건지 궁금해서 제작사 대표를 보니 열심히 예진의 필모그래피를 살피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로 진행이 될 것 같아 수한은 부디 예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
***
수한은 길게 하품을 내쉬었다. 지난 일주일간 잠을 안 자고 미친 듯이 영화만 봤으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럴 때 카페인이 도움을 주었다. 수한은 커피를 마시다가 민얼굴로 편하게 들어오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웃어 버렸다.
‘이제는 사람들 시선 신경도 안 쓰나 보네.’
지난번 봉사 활동 때부터 느낀 거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니 예진이 달라진 게 있긴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니셔도 됩니까?”
“오히려 대놓고 다녀야 말을 안 걸더라.”
그 말이 맞는지 힐끔거리는 시선은 있어도 예진에게 쉽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전에는 예진의 기가 세서 못 다가오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여배우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따분한 얼굴을 하며 앉아 있는데도 특유의 아우라가 있어 쉽게 다가올 수 없었다.
“연락받았어. 네가 추천했다며?”
“네. 절대 사심 들어가지 않았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알고 있어. 네가 그런 성격이었으면 벌써 나한테 여러 작품 물어다 줬겠지.”
수한이 예진을 아는 만큼 예진도 수한을 잘 알았다.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인사를 하려고 수한을 불러냈다. 그런데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안색이 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지난주에 무리했나 봅니다. 그게 다 티 나나요?”
“어.”
단호한 대답에 수한은 웃음이 먼저 나왔다. 말은 저렇게 해도 걱정하는 게 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예진의 얼굴이 유난히 빛나 보여서 신기했다.
원래 연예인은 다 이런가? 아니다. 이건 예진이 달라진 거다. 안 보는 사이에 또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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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예진 - 스타성: S, 연기력: S, 가창력: D, 춤: D, 인지도: S, 기타: A, 성장 가능성: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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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연기력이 저렇게 올라간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성장 가능성까지 올라가 있다. 수한은 예진이 어디까지 성장할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봐?”
“예뻐서요.”
“뭐?”
예쁘다는 말을 한두 번 들어 본 게 아닐 텐데 예진은 괜히 헛기침하며 메뉴를 보는 척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귀는 또 빨개져 있어서 귀여웠다. 보면 크게 변한 것 같은데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아무튼, 보답으로 저녁 살 거니까 약속 있으면 취소해.”
너무 뻔뻔하게 말해서 할 말이 없었다. 약속 있으면 취소하라니, 너무 예진다운 말이라서 수한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왜 자꾸 웃어.”
“그러는 예진 씨도 웃고 있잖아요.”
수한이 지적을 하자 예진은 금세 정색하다가도 이 상황이 웃기긴 하는지 마찬가지로 웃었다. 어차피 저녁 약속을 잡지 않은 상태라 수한은 괜찮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예진과 단둘이 무언가를 먹는 것도 처음이었다.
“근데 부담은 안 되세요?”
“너, 당연히 내가 할 것처럼 말한다?”
“그럼 안 할 거예요?”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예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여겼다. 수한이 긴장한 얼굴로 예진을 보자 예진은 새침하게 뭘 먹을지나 정하라고 하였다.
“그럼 비싼 거 먹겠습니다.”
“그래. 내가 잘 아는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
“뭐 먹고 싶은지도 안 물어봅니까?”
“몰라.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
수한은 황당했지만, 그래도 비싼 거 사 준다는데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수한이 자연스레 예진에게서 키를 받자 예진이 황당하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너 차 안 가져왔어?”
“제가 운전하려고 안 가져왔는데요.”
더불어 예진의 앞에서 외제 차 있다고 뽐내고 싶지도 않았다. 재벌 앞에서 로또 1등 당첨자가 나대는 느낌이었다. 예진은 순순히 보조석에 앉았다. 수한은 새까만 예진의 외제 차에 살짝 놀랐다. 당연히 예진처럼 화려한 차를 고를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닙니다. 차 좋네요.”
“별로 많이 타고 다니지는 않아. 순돌이랑 어디 멀리 갈 때만 타거든.”
하긴 소속사가 있는데 뭐 하러 개인 차를 타고 다닐까? 물론 개인적인 시간에 그리하는 연예인이 많기는 했으나, 예진은 집에 있는 편이었다. 나가도 순돌이와 산책하러 나가는 수준이었다.
‘근데 우리 분명 3년 동안 안 본 사이 맞지?’
왜 이렇게 편한지 모르겠다. 더불어 예진의 근황을 다 아는 게 수한은 신기했다. 아무래도 소원이라는 다리가 있어서 알게 모르게 예진의 소식을 계속 접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예진이 나온 모든 콘텐츠를 다 본 것도 아니어서 수한은 새삼 신기하게 예진을 봤다.
“왜? 이번에도 예뻐서 보는 거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예진 씨가 나온 독립 영화를 봤는데요. 아무리 봐도 동일 인물로 안 보여서요.”
연기 관련해서 말하니까 예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쑥스러워하니까 귀여웠다. 수한은 운전하다가 문득 아까 말에 예진이 대답하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영화는 안 할 겁니까? 안 할 거면 제게 말해 주십시오. 새로 사람을 뽑아야…….”
“누가 안 한대?”
수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진의 욱하는 성격이 튀어나왔다. 이게 수한이 아는 예진이라서 수한은 웃음이 계속해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안전 운전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저녁은 뭐 먹습니까?”
“소고기.”
“네?”
“너 고기 잘 굽는다며. 실장님이 알려 줬어.”
정말 가온 엔터테인먼트에는 입이 가벼운 사람들만 있는 게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주소를 보니 성민과 간 적이 있던 한우 구이집이다. 그래서 수한은 운전대를 돌리기로 했다.
“어? 어디 가?”
“이왕 저녁 먹을 거 제가 제대로 아는 곳이 있어서요. 그리로 가시죠.”
“뭐?”
“제가 얻어먹기로 한 거니까 제가 원하는 대로 가겠습니다.”
왠지 예진과는 다른 사람과 갔던 곳에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수한은 예진이 좋아하는 메뉴를 떠올리며 괜찮은 식당을 머릿속에 그려 냈다. 맛집 레이더에 한 곳이 붙잡히면서 수한은 그리로 가기로 했다. 눈치를 보니 예진도 당황은 했지만,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수한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