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9. 캐스팅 디렉터
“안녕하세요. 김수한입니다. 예전에 뵌 적 있죠?”
수한이 옆에 비어 있는 세미나실로 들어가자 당황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수한이 배우들 관련하여 무슨 소리를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커서였다.
“네. 반가워요.”
수한은 떨떠름하게 인사하는 감독의 모습에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작가도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배우들과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맞아요.”
수한은 두 사람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로 챙겨온 비타민 음료 두 병을 꺼냈다. 수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감독과 작가는 의문을 그리며 수한을 봤다.
“제가 뭐라 하려고 따라온 게 아니라 두 분이 고생이 많으신 것 같아서 온 겁니다.”
“아…….”
“여전하시네요.”
작가와는 지난번에 인사하고 처음 만난 거지만, 감독과는 인연이 있어서 감독은 금세 경계를 풀고 수한이 준 비타민 음료를 마셨다. 비타민 음료는 어떤 면에서는 수한의 상징이 되었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늘 먼저 건네주었으니까.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는데 저 두 사람, 처음부터 고집대로 한 겁니까?”
작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고집대로 연기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확 굽히고 나오니 이 현장을 만만하게 본 게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그러니까 확 깼다. 수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이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혹시 대본도 고쳐 달라고 합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어요.”
작가의 말에 수한은 쓰게 웃었다. 지금 ‘아직’이라는 말이 붙었다. 그 말은 그런 일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대본이 바뀌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두 분이 어떤 상황에 있는 건지 알겠네요. 일단 오늘은 대본 리딩을 일찍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저대로 연기하게 둔다고요?”
“그렇다고 제가 대화한다는 이유로 쉬는 시간을 길게 가질 수는 없잖아요.”
아무리 수한이 대단하다고 해도 배우들의 눈에 그저 캐스팅 디렉터일 뿐이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는 사람도 아니고, 프리랜서이니 고까워 보일 수 있다.
“배우 두 분은 제가 따로 만나 보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탐탁지 않은 얼굴이지만, 특별한 대안은 없기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수한은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먼저 전윤진에게 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획사가 사라진 차현과 다르게 전윤진에게는 기획사가 있기에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대본 리딩 끝나고 시간 될 것 같아요.”
전윤진은 수한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그녀의 매니저는 처음만큼이나 수한을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수한이 무슨 이유로 전윤진과 시간을 잡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전윤진의 매니저는 정색하며 수한에게 말했다.
“저랑 잠시 대화 좀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수한도 눈치가 좋은 편이기 때문에 전윤진의 매니저가 왜 그를 부르는지 이해하였다. 수한이 복도로 나오자 전윤진의 매니저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윤진이한테 이상한 소리 할 거면 하지 마세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겁니까?”
“감독과 이야기하고 온 거 다 압니다.”
수한은 설마 했는데 역시나 예상한 말을 하는 전윤진 매니저의 말에 쓰게 웃었다. 이래서 전윤진이 멋대로 구는 거였다.
“죄송하지만, 이게 제 일이라서요. 만약 제가 하는 소리가 이상한 소리라면 전윤진 씨는 배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뭐라고요?”
“배우에게 감독 말을 따르라고 하는 게 어떻게 이상한 소리가 됩니까.”
수한은 순한 인상을 집어던지고 꽤 강압적인 얼굴이 되었다. 달라진 수한의 분위기에 전윤진 매니저는 살짝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기죽지는 않았다. 영화판에서도 이런 일이 쌔고 쌨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판이 여기보다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수한이 모를 리가 없었다.
“혹시나 오해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여기는 영화판이 아닙니다.”
“네?”
“영화에서처럼 강제적으로 뭘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수한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전윤진 매니저의 표정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영화계 돌아가는 사정이야 빤히 알고 있었다. 특히나 여배우들에게 야박한 곳이 영화계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전윤진이니 갖은 일이 있었을 거라 추정되었다.
“일단은 감독님과 작가님을 먼저 매니저님부터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고 나서도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수한은 단호하면서도 자신 있는 얼굴을 하였다. 이 드라마는 수한에게도 중요한 드라마이니 어떻게서든 성공해야 한다. 그 간절함이 통한 건지 전윤진 매니저는 한 발짝 물러서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솔직히 말해 수한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당장 믿으라고 하기에는 지난 경험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삼자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전윤진이 팔짱을 끼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언제 복도로 나온 건지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일부러 전윤진이 존재감을 감춰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윤진 씨가 원하는 방법대로요.”
수한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전윤진의 미소가 진해졌다. 전윤진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여러 번 까딱였다. 그러고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 모양이다.
“실패하면 이광무 감독님과 연결해 줘요. 저는 그거면 될 것 같아요.”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성공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감독님과 기 싸움하는 건 그만두셔야겠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네.”
전윤진은 수한의 옆에서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한 그녀의 매니저를 발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매니저는 전윤진의 고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아요. 김수한 씨 말대로 하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을 들었으니 차현 씨도 감독님 말에 따라 줄 거예요.”
전윤진이 차현을 언급하기가 무섭게 차현이 구석에서 나와 순한 웃음을 보였다. 고집을 피우는 사람으로는 전혀 안 보이는 부드러움이 있다.
“저는 전윤진 씨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 조건이면 저도 좋을 것 같네요.”
거장이라 불리는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들어가는 게 절대 쉽지 않기에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특히나 두 사람은 영화 쪽에서 더 일을 많이 하기에 더욱더 탐나는 감독이 이광무 감독이었다.
수한은 두 사람의 반응에 이광무 감독의 존재감을 크게 느꼈다. 그러면서도 빨리 퍼진 소문에 대해 회의감도 생겼다.
‘정말 동네방네 다 소문났나 보네.’
설마 배우들이 자신을 통해 이광무 감독과 닿으려고 할지 몰랐기 때문에 수한은 이광무 감독의 일을 반드시 따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약속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릴 테니까. 어쨌거나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 약속을 했으니 두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기만 하면 됐다.
“그럼 대본 리딩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연기가 달라졌다. 이미 몇 번 감독에게 말을 들은 게 있던 건지 차현이 연기를 할 때마다 감독의 눈이 반짝였다. 수한은 그 현장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고는 밖에서 대기하는 강우형의 비서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
[일단 맡기신 일 해결했습니다.]
[이 일은 이사님께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보너스가 나올 수도 있다는 말과 같아서 수한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면서도 다른 변수가 생길지 몰라 수한은 이 현장이 끝날 때까지도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
수한은 카페에 들러서 달콤한 커피 한 잔을 시켰다. 피곤이 턱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카페인으로 잠을 쫓아내기 위해서였다. 어제 너무 긴장하고 잤더니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 생각했는데 주위에서 주는 압박이 긴장감을 심어 주었다.
‘그래. 그냥 다른 보통의 사람들과 비슷한 거야.’
하지만 이광무 감독의 일을 맡는 순간 딸려 오는 것들이 만만치가 않았다. 수한은 일부러 잘 보이기 위해 정장을 입었기에 깔끔하게 맨 넥타이가 목을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수한은 열심히 커피를 마시며 카페인으로 몸을 달랬다.
수한은 출발하기 전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들어온 보너스에 기분이 완전히 좋아졌다. 열 카페인보다 하나의 돈이 더 잠 깨는 데 효과적이었다.
‘강우형 이사님이 이런 쪽으로 화끈해서 좋단 말이야.’
남일과 비교하면 강우형이 훨씬 상사로 좋았다. 물론 비서의 말을 따로 들어 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수한은 거울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넥타이를 매서 깔끔하기는 했는데 너무 회사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넥타이만 빼기로 했다.
수한은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약속 장소는 카페였다. 그 결과 약속한 시각보다 1시간이 더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그래도 늦게 오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서 수한은 이광무 감독과 만나기 전에 미리 자신이 공부한 것을 복습하기로 했다. 아니, 만약 계산대 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 그리 했을 것이다.
“여기요.”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70대는 되어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벙거지 모자를 쓴 데다가 옷차림이 깔끔한 편은 아니어서 노숙자가 아닐까 경계하는 눈초리들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르바이트생도 노인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여기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니라서 그런가?’
프랜차이즈 카페였다면 누가 신고라도 해서 눈치를 볼 텐데 개인 카페라서 그런지 고객의 눈치를 보는 아르바이트생이 없었다.
“이봐요.”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은 척하니 수한이 더 답답했다. 결국, 수한은 자신이 먼저 노인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다. 수한은 웃으면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무슨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니, 커피 좀 주문하려는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잖아요.”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수한의 존재에 안심이 된 건지 조금 전까지 딴짓하던 아르바이트생들이 계산대 앞에 섰다. 성별 가릴 것 없이 모두 그러고 있어서 수한의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인이 우선이라 노인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 왔네요. 드시고 싶은 거 말씀하시면 돼요.”
“아이스 바닐라 라떼. 샷 추가해서.”
노인의 입에서 전혀 나올 것 같지 않은 메뉴 이름이 나와서 아르바이트생의 당황하는 눈치가 보였지만, 수한은 어서 주문해 달라고 눈짓을 보냈다. 수한은 계산대 화면에 뜨는 메뉴를 확인하고 노인을 보았다.
“여기요.”
카드까지 들고 다니는 요즘 문명에 적응한 노인이었다. 벙거지 모자 아래에 있는 얼굴을 보니 노인은 옷차림과 다르게 깔끔하게 얼굴을 정리한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노인에게서는 좋은 향기도 난다.
‘그냥 이 사람의 패션이구나.’
특이하지만, 이해는 되었다. 홍대에서 이런 차림을 한 청년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봤으니까. 나이 든 사람이라 해서 선입견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수한은 아르바이트생이 건네주는 진동 벨을 받아서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진동 벨이 울리면 나오시면 돼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쪽은 뭐 마실 거요?”
“네?”
“카페에 왔으면 마시려고 온 거 아니요?”
수한은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벙거지 모자 아래로 날카로워진 노인의 눈초리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수한은 같은 거로 시킨 후 노인이 건네주는 카드를 받았다. 초면에 이렇게 얻어 마셔도 되나 싶었지만, 이상하게 느낌이 좋았다.
수한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잔을 받아 먼저 자리로 돌아간 노인의 앞에 가서 앉았다. 노인은 수한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한 잔을 마시더니 흡족한 얼굴을 하였다. 아르바이트생의 행동은 불쾌했으나, 커피는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그 가운데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감독님.”
수한의 말에 이광무 감독의 눈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