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9. 캐스팅 디렉터
수한은 들뜬 상태로 원래 숙소에 돌아온 주혁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당장 만들겠다는 말은 아니었으나, 주혁은 그것만으로도 열정이 생겼다. 물론 화르르 불탈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주 조그만 불티라도 괜찮았다.
“감사합니다.”
수한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승택을 보며 쓰게 웃었다. 승택은 주혁과 무슨 대화를 나눈지에 관해 전혀 묻지 않았다. 그저 주혁이 다시 돌아와서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만약 수한이 주혁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알게 된다면 그가 진심으로 고마워할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공연이 다음 주라고요?”
“네. 보고 갈 수 있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급하게 빼낸 일정이라서 쉽지 않았다. 차라리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에 오는 편이 나았다. 수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젓자 불안해하는 얼굴이 보였다. 처음에는 승택만 그랬는데 멀리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혁까지 그러자 수한은 난감해졌다.
“알겠습니다. 시간 내 보겠습니다.”
어차피 성민이 보낸 준 표로 공짜로 일본에 온 거라서 금전적인 부담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시 오는 비용까지 주혁이 대 준다고 하니 곤란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저 때문에 오는 거잖아요. 저 투어 돌면서 돈 많이 벌었어요. 그러니까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수한이 승택을 보며 진짜냐고 묻자 승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혁이 돈 쓰는 건 달가운 상황이 아니지만, 수한이 필요하기는 했다.
승택은 수한을 만나자마자 달라진 주혁의 모습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 주혁과 수한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승택은 놀람의 연속이었다. 주혁이 저렇게 순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승택은 처음 알았다.
“저 비행기를 하도 많이 타서 비행기 마일리지로 비행기도 탈 수 있어요.”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계속 말하는 걸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아직 돈을 모으지 못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수한이 만드는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먼저 손을 내민 게 주혁이었다. 그 호의를 더는 거절하지 못하겠다.
“알겠습니다. 주혁 씨 뜻이 정 그러면 그렇게 하죠.”
“좋았어!”
대놓고 좋아하는 주혁의 모습에 복잡한 표정을 짓는 승택 때문에 수한은 따로 승택과 다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수한의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지 주혁은 연습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며칠 지켜보니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 열정도 되찾은 것 같고.
‘확실히 무대 체질이네.’
몸을 살짝 움직인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 게 있다. 수한은 옆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승택을 향해 말했다.
“이 정도면 잠깐 한국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네요.”
“일본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떠날 때 주혁이를 신경 쓰지 못한 게 커서 죄송합니다. 그 당시에 괜찮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줄 알았거든요.”
“김수한 씨를 아끼니 그랬을 겁니다. 저야말로 김수한 씨가 그렇게 떠날 때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수한이 남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같은 동료라고 하지만, 수한은 유독 튀는 매니저였다. 알게 모르게 수한을 향한 질투도 있던 것이다. 그 질투가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버렸다. 더불어 남일이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기에 다들 몸을 사리는 게 없지 않아 있었다. 굳이 회사 대표와 척을 져서 좋을 게 뭐가 있는가? 오히려 그런 남일에게 반발하는 수한이 대단한 거였다.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3년이나 지난 일에 마음 쓰지 마세요.”
수한도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섭섭한 마음이 들 수는 있어도 원망해야 할 상대가 남일인 건 변하지 않았다. 수한은 이런 식으로라도 3년 전의 일을 잘 풀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수한이 괜찮다고 해도 승택은 고지식한 성품을 가진 사람답게 불편해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은 수한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정 마음이 그러시면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제가 한국에 다녀올 동안 맛집 하나 알아봐 주세요. 개인적으로 초밥을 좋아합니다.”
수한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승택은 이제야 얼굴이 폈다. 그러고서는 알겠다며 많이 알아두겠다고 약속하였다.
***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귀가 울려서 죽겠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는 수한의 돈으로 샀기 때문에 되도록 싼 가격으로 왔다. 주혁이 대 주겠다고 했으나, 그것만큼은 수한이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싼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귀가 너무 아프네.’
높은 데에서 갑자기 아래로 팍 내려와 일어난 통증이라고 했다. 수한은 나약한 육신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비행기 모드를 풀자마자 들어온 연락들에 조용히 혀를 찼다. 몇 시간 끈 것뿐인데도 연락이 장난 아니다.
수한은 그중에서 급한 것들만 살폈다. 유지영의 건은 캐스팅이 끝나서 촬영이 이미 들어간 상태이므로 넘기고, 엘 엔터테인먼트 건도 비슷했다. 대부분이 촬영 들어간다는 소식들이어서 수한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다가 이광무 감독의 영화 관계자에게서 온 전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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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지 않아서 문자로 남깁니다. 감독님께서 직접 보고 싶어 합니다. 내일 시간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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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라면 바쁘긴 했다. 그러나 수한은 없는 시간도 빼야 했다. 그만큼 이광무 감독의 건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되었다. 수한은 그동안 공부했던 배우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의 준비가 부디 쓸모 있기를 바랐다.
‘그 전에 일단 붉은 꽃 대본 리딩 현장에 가 봐야겠다.’
마지막 대본 리딩 현장이 딱 오늘이었다. 수한은 두 연기파 배우들을 떠올리며 크게 기대하였다. 두 사람이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 기대가 되었다.
주차 요금을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공항에 왔다. 수한은 순식간에 자린고비가 된 신세에 쓰게 웃으면서도 여유 있게 바깥을 보았다. 그래도 강남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수한은 잠깐 눈을 붙이며 갈 수도 있었지만, 내일 이광무 감독과의 약속이 부담스러워 그 시간에 조금 더 공부하기로 했다. 내일 잘 보이면 대본도 받을 수 있을 테니 기대가 되었다. 수한은 그렇게 공부하다가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수한 씨, 오늘 대본 리딩 현장에 오죠?]
“네. 지금 가는 중입니다.”
강우형의 비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아무래도 대표 이사다 보니 소소한 일은 강우형의 비서와 이야기하는 편이었다. 수한은 무언가 곤란한 상황이라도 일어난 건가 싶어 미리 긴장하였다.
“왜요? 일이 잘 안 돌아가나요?”
[일단 도착해서 이야기하시죠.]
나쁜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었다. 수한이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하자 한 남자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강우형의 비서였다. 누가 봐도 수한을 기다린 모습이라 수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게 배우들이 감독의 말을 안 들어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남자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무슨 선생님에게 이르는 학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왜 감독의 말을 안 듣습니까?”
“연기 방향이 마음에 안 든대요.”
수한은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감독으로 초빙한 사람을 떠올렸다. 메인 감독을 맡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큼지막한 드라마에서 여러 번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한도 다른 드라마를 통해 그 감독과 인연을 맺었기에 그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감독님 성격도 센 편이 아니라서 배우들에게 휘둘리고 있습니다.”
수한은 왠지 모르게 서이나가 떠올랐다. 자신의 멋대로 해석해서 연기하던 그 신인 연기자 말이다. 수한이 조언을 주었기 때문에 이제 더는 그런 식으로 연기를 하지 않겠지만, 여기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이미 탑스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조언이 먹힐지 의문이었다.
“배우 중 누가 그럽니까?”
“주연 배우 다요.”
수한은 할 말이 없었다. 전윤진은 그렇다 쳐도 차현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아니지. 배우니까 그럴 수 있지.’
애인인 유진과도 공과 사는 구별 하는 사람이 차현이었다. 그의 고집이 연기라면 그럴 수 있다.
“대표 이사님께도 보고 올렸습니까?”
“아직이요.”
그러니까 강우형이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수한보고 처리하라는 말이었다. 드라마를 찍어서 TV 화면에 나가기 전까지는 수한의 일이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니 감독과 배우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상황을 직접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네, 물론입니다.”
수한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도 배우들은 수한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대본을 읽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감독과 작가만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일단 어디 보자고.’
수한은 완결까지 다 보고 캐릭터 분석까지 마쳤기 때문에 대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방향이 맞는지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대사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장면을 연기하는지 알겠다. 지금 장면은 여자 주인공이 죽은 줄 알고 남자 주인공이 세상을 방황하는 내용이었다.
차현은 넋이 나간 얼굴로 대사를 읽어 나갔다. 수한은 차현이 맡은 남자 주인공의 성격을 떠올렸다. 본래 선하고 좋은 사람이다. 세상이 그를 건드리지 않으면 그는 평화롭게 살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차현의 본래 성품과 비슷한 성격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잃으면서 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사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선한 내면이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
다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그게 설사 타인의 생명이어도 취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이 변하지 않은 건 이러한 면 때문이었다.
‘언젠가 이 피의 대가를 스스로 치르겠다.’
그 대가로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보이나, 그 안에 강한 슬픔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연기를 잘해야 하는 거고.’
잘못하면 무뚝뚝한 살인마로 볼 수 있게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수한은 차현의 연기를 주의 깊게 봤다. 이 시간이 단순하게 대사를 읊는 시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 시간은 앞으로 이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 나갈지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하하하. 하하하.”
차현은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수한이 서이나에게 보인 적이 있는 강약 조절이 저 대사만으로도 느껴졌다. 처음에는 허탈하게 그다음에는 광기가 스며들었다. 찰나에 순간 번뜩이는 눈빛에 수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대단하다.’
누가 연기파 배우 아니랄까 봐 그 짧은 대사만으로도 남자 주인공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수한은 감독과 작가가 한숨을 쉬는 것을 발견했다.
‘연기를 잘하기는 하는데 이 방향은 아니라는 거군.’
하지만 그를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뻔하였다. 차현이 그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 화의 마지막은 남자 주인공이 서슴지 않고 타인을 죽이면서 끝난다. 아주 자극적인 엔딩이었다. 그래서인지 차현이 대사를 마치고도 정적이 흘렀다. 그 여운이 남아서였다.
“여기까지 하고 잠시만 쉬겠습니다.”
감독이 무거운 얼굴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작가도 좋지 않은 얼굴로 따라 나갔다. 수한은 자신을 알아본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그들과 먼저 대화해 보기로 했다. 그래야 뭐가 문제인지 확실히 알 테니 말이다. 물론 수한은 문제점을 파악했지만, 그게 저들과도 맞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