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9. 캐스팅 디렉터
“일이 그렇게 된 거군요.”
수한은 착잡해진 마음을 차가운 소주 한 잔으로 달랬다. 안 그래도 소주 특유의 쓴맛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수한이 가장 걱정하지 않은 사람이 고주혁이었다.
‘제일 단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것 같았던 사람이 고주혁이었다. 게다가 수한이 담당한 연예인 중 수한과 가장 닮은 사람도 고주혁이어서 방심했다. 그러나 그건 수한이 옆에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중심을 잡아 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급격하게 무너졌다.
아니다. 오히려 잘 버티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직 도망가지는 않았으니까.’
“몸은 진짜로 안 좋은 게 맞습니까?”
“그건 맞아. 요즘 살이 급격하게 빠져서 체력적으로 무리가 왔어.”
고주혁이 덩치가 있는 타입도 아니어서 수한은 괜히 걱정부터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건만. 수한은 성민의 말을 계속해서 듣다가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해외 투어를 돌린다고요?”
“나도 대표님께 말씀은 드렸는데 말이야. 씨알도 안 먹히더라.”
성민이 난감해하며 목덜미를 만졌다. 수한은 자신이 너무 흥분해서 말했나 싶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본인이 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밀어붙이다니. 물론 이건 성민의 잘못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남일의 잘못이다.
‘설마 나에 대한 보복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남일은 절대 사업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수한은 어떻게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대형 기획사가 될 수 있던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직 남자 아이돌은 안 키우지?’
가수 파트를 본격적으로 넓혀 보자고 제안했던 수한 때문에 일어난 반감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습생이라도 키워야 할 가온에서는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그보다 고주혁 씨가 더 걱정인데…….’
해외 투어를 빡빡하게 돌리니 건강에 이상이 오는 게 당연했다. 건강과 돈을 고르라고 하면 수한은 주저하지 않고 건강을 고를 것이다. 아마 그건 고주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못하겠다고 했으나, 남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고주혁 씨를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가능은 한데 아마 만나려면 일본에 가야 할 거야. 너 바쁘다며. 일본에 갈 시간이 있겠어?”
수한은 이 와중에 일본에 가 있는 고주혁을 생각하니 속상했다. 너무 자신이 안일하게 고주혁을 두고 간 것 같아서 미안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가야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 안에서 살살 녹던 소고기가 질겅질겅하게 씹혔다. 수한은 소주를 한 잔 들이켜며 생각했다.
‘고주혁 씨 계약 기간이 어느 정도더라?’
수한이 있을 때 계약했으니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원래라면 7년을 잡고 해야 하지만, 그건 일부러 수한이 의도했다. 그 정도로 수한이 오랫동안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더불어 수한을 대하는 남일의 태도가 불안하여 계약 기간을 짧게 잡았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건 가온이 배우 위주의 회사라서 가능한 일이었지.’
만약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수작을 부렸으면 통하지 않았을 거다. 수한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해 준 성민이 고마워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성민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잔뜩 경계하는 모습에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했다.
“실장님, 돈 좀 가진 거 있습니까?”
“뭐? 보증 서 달라고 하면 그건 못 해 준다.”
“그런 거 해 달라고 하면 절 사칭하는 놈이니 절대 하지 마십시오.”
수한은 다시 입맛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 꽃등심을 시켰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성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수한은 괜찮았다.
‘일단 고주혁 씨부터 만나고 나서 결정을 내려야지.’
당장 생각나는 게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조심스럽다. 수한도 확신이 없으니 일단 고주혁부터 만나기로 했다.
***
“안녕하십니까. 늘 마시던 거로 준비해 두셨네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눈앞에 놓인 달달한 커피를 어서 마시라는 손짓에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막 준비해서 그런지 따뜻해서 좋았다.
“용케 두 배우를 설득하셨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윤진을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윤진의 기획사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다. 영화 하다가 괜히 드라마 해서 망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윤진의 기획사는 트렌디하지 못하다는 이미지를 쓸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수한이 전윤진을 홀린 덕분에 일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다.
전윤진에게 차현의 출연 확정을 이야기하니 그녀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한번, 해보고 싶어요. 실패하면 뭐 어때요. 다음에 좋은 작품으로 대중에게 나서면 되죠.”
수한은 진정한 연기자는 이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윤진의 출연 확정을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전윤진까지 출연 확정을 하게 되니 강우형이 직접 전화해 수한을 회사로 불렀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보너스는 통장에 잘 입금할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감사히 받겠습니다.”
수한이 솔직하게 말하며 웃자 강우형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었다. 어차피 나이수 회장의 허락이 떨어진 일이라 강우형은 보너스를 생각한 것보다 더 크게 넣기로 했다. 그 정도 금액이면 수한과 계속 연을 이어 갈 거라 믿었다.
“근데 차현 씨의 매니저는 우리 회사 사람으로 해도 되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건 차현 씨의 의사를 반영했습니다. 다 맞춰 준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굳이 여기서 유진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수한은 말을 아꼈다.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어서 강우형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보다 강우형이 궁금한 건 다른 거였다.
“이광무 감독님의 영화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수한은 방송가 소문 하나 빠르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강우형이 정보력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니 수한은 숨기지 않기로 했다.
“제안은 들어왔는데 확정은 아닙니다.”
“갈수록 그쪽에서 자리를 잘 잡고 있네요.”
“은근 이 직업이 저랑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수한이 이 일을 오래 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강우형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소식을 저만 들은 게 아닙니다.”
“그럼요?”
“서 대표 그 사람도 함께 들었습니다. 방해할지도 모르니 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결국은 수한을 위해서 말한 거였다. 수한은 잠깐이나마 의심했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쓰게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우형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수한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한번 몬 사람이 아니던가?
“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이광무 감독님 영화 준비해야겠네요.”
“그래도 현장에는 가 봐야죠. 이 일이 캐스팅만 한다고 해서 끝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수한은 커피 한 모금을 다시 마시면서 여전히 어수선한 엘 엔터테인먼트 내부를 떠올렸다. 음주 운전 사건은 마무리될 듯하면서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죽은 피해자 가족이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같아도 그런 태도면 합의 안 하지.’
진심으로 사과하면 모를까 여전히 그 아이돌 가수와 팬은 피해자를 기만하고 있었다. 사과는 했지만, 누가 봐도 형식적인 사과였다. 수한은 그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관여된 일 외에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이상한 오지랖은 부리고 싶지 않았다.
***
‘붉은 꽃’ 대본 리딩 준비를 마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엘 엔터테인먼트 내부의 사정과 다르게 드라마 준비는 차근차근 잘 되어 갔다. 수한은 오늘 난 기사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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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X전윤진 드라마 “붉은 꽃”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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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에서만 활동하던 두 사람이 만나니 기대한다는 반응이 컸다. 물론 트렌디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수한은 무엇보다 대본에 자신 있었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력에도 자신이 있지.’
이 눈이 직접 보증한 연기력이다. 수한은 어떤 드라마가 나올지 진심으로 기대되었다.
딩동.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돈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생각난 김에 금액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왔다. 특히나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너스로 받은 돈이 커서 수한은 웃음부터 나왔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난 뒤 강우형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통장이 강우형과 계속 손을 잡으라고 말했다. 그럴 의도로 보낸 돈이겠지만, 수한은 기꺼이 받기로 했다. 안 받을 돈을 받은 건 아니니까 괜찮았다.
수한은 이 와중에도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빼내려고 머리를 굴리며 비행기 표를 알아봤다. 고주혁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평소의 고주혁이라면 만나러 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텐데 성민의 말을 듣고 나니 안 만나러 갈 수가 없다.
‘노래들이 다 별로네.’
처음 고주혁이 주었던 임팩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수한은 하나같이 낮은 등급으로 뜨는 능력치를 보고는 눈을 감았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주혁의 팬 카페에 가니 회원 수도 많이 줄었고, 유령 회원도 많아졌다. 지난번에 올라온 글이 무려 2주 전이다. 그것도 출석한다는 글이어서 수한은 적지 않게 실망했다. 카페 문화가 사라지고 있어도 이 정도로 글이 안 올라오는 건 문제가 있다.
‘아…….’
광고 글이 제대로 지워져 있지 않다. 건의 사항 게시판에 가니 불만 글이 잔뜩 올라왔지만, 그것도 그대로 방치였다. 말 그대로 고주혁의 팬 카페는 방치의 끝을 보여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잘은 몰라도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고주혁이 주는 수익은 어마어마할 거다. 그러면 더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아주 엉망진창이다.
‘이걸 보는 내 심정도 안 좋은데 당사자인 고주혁 씨는 얼마나 더 힘들까?’
수한은 다른 일정을 미뤄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고주혁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다가 성민에게서 뜻밖에 연락을 받게 되었다.
“비행기 표를 구해 주신다고요?”
[쉿, 비밀이야. 대신 우리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괜찮겠어?]
수한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구해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성민이어도 대가 없이 공짜로 비행기 값을 내줄 리가 없었다. 수한의 빠른 직감이 수한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만들어 주었다.
“솔직히 말씀하시죠.”
[뭐, 뭐가?]
“저한테 바라는 게 있어서 보내는 거 아닙니까?”
눈앞에 성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수한은 팔짱을 끼며 다리를 건들거렸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잠시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얼마 안 가 솔직하게 불었다.
[주혁이가 사라졌어.]
“네?”
[힘들어서 도저히 못 하겠다면서 일본에서 사라졌다고.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수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