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9. 캐스팅 디렉터
화보 촬영 현장은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스튜디오도 처음 오는 곳이어서 수한은 살짝 낯설었지만, 보이는 사람마다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다. 그런데 스태프들 얼굴이 낯이 익다. 아니, 정확히는 낯선 사람과 눈에 익은 사람이 있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분인데?”
수한뿐만이 아니라 상대방도 수한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수한은 머리를 빠르게 굴려 순발력을 발휘했다.
“매니저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화보 촬영 현장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아! 맞아! 기억났어요! 성예진 씨 매니저분!”
예진의 이야기가 나오니 수한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매니저 일을 그만뒀어도 이런 반응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수한에 관한 기억이 좋았는지 눈에 익은 스태프 중 한 명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그때 예진 씨 기분이 무척 좋아서 얼마나 촬영이 수월했는지 몰라요.”
“모두가 고생하신 덕분이죠.”
공을 스태프들에게 돌리자 수한을 모르는 사람들까지 웃으면서 수한을 봤다. 그보다 아직 전윤진은 안 온 모양인지 화보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근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전윤진 씨와 만날 일이 있어서요.”
수한은 매니저 일을 할 때도 늘 가지고 다녔던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캐스팅 디렉터’라고 적힌 명함에 다들 흥미롭게 수한을 봤다. 이 직군에 관한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지 명함을 받고 나면 늘 이런 반응이었다. 수한은 그 호기심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다.
“근데 전윤진 씨는 안 왔습니까?”
“늦잠을 잤다네요.”
한숨 쉬는 목소리에 수한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면 매니저가 굉장히 힘들어질 텐데. 수한은 어제 봤던 그 매니저를 보고 걱정했다. 늦은 건 연예인이지만, 그 일정이 밀린 것에 대한 책임은 매니저가 지게 되어 있다.
“원래 지각 자주 하기로 유명하잖아.”
“그래서 영화만 찍잖아. 그나마 일정 관리가 수월해서.”
“이 정도면 본인도 문제점을 알 텐데 고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영화로도 잘나가는데 뭐 하러 고치려고 하겠어. 옆에서 알아서 다 맞춰 주는데.”
“이래서 잘나가면 좋아. 신인 때 생각하면 지각은 꿈도 못 꿨을 텐데.”
뒷담을 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여서 수한은 그 자리에서 잠시 빠져나오기로 했다. 전윤진을 캐스팅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저런 현장에는 빠지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말리기에는 내가 그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
수한은 혹시 모를 좋은 인연이 생길지 몰라 열심히 인사하고 다녔다. 덕분에 몇몇 스태프들은 수한을 전윤진의 새로운 매니저로 오해했지만, 수한은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전윤진, 도착했대.”
그 목소리에 수한까지 긴장하며 대기했다. 화보 촬영이 끝난 후에 시간을 내준다고 했으니 조용히 있다가 전윤진 매니저가 신호를 줄 때 다가가면 된다.
“분명 알람 맞추고 잤는데 일어났는데 꺼져 있었다니까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진짜예요.”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전윤진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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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진 – 스타성: S, 연기력: SS, 가창력: C, 춤: C, 인지도: S, 기타: E, 성장 가능성: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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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진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뜨는 능력치에 수한은 경악했다. 연기력도 SS가 뜬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지훈이 편곡한 곡이 SS가 뜨기는 했으나, 그건 곡 주인이 해서 특별한 경우라 생각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SSS도 나오는 거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전윤진의 능력치는 대단했다. 수한은 전윤진이 영화 속에서 연기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영화 쪽이 남자들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보니 전윤진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한정되어있다. 수한은 그 한정된 역할이 아니었으면 전윤진이 연기로 더 날아다녔을 거라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30대라고 하지만 아직은 초반이기에 젊다면 젊은 나이였다. 물론 연예계에서는 아니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안 늦을게요.”
지각과 별개로 전윤진은 한때 남자 연예인들의 이상형 1위였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수한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스태프 입가에 걸린 함박웃음에 속으로 웃었다.
어제 봤던 전윤진 매니저가 함께 들어오면서 수한을 발견하였다. 수한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자 왜 이렇게 일찍 왔냐는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전윤진의 시선도 수한을 향했다.
“아는 사람이에요?”
“오면서 말했던 그 사람이야.”
“아! 그 대본 주러 왔다는?”
전윤진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성격인지 수한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웃음을 쳤다. 얼마나 눈이 예쁘게 접히는지 저 눈웃음 하나에 넘어가지 않은 남자가 없으므로 수한도 살짝 가슴이 떨렸다.
“조금 이따가 촬영 끝나고 봐요.”
“네, 알겠습니다.”
직접 찾아와서 캐스팅하는 정성이 나쁘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호의적인 전윤진의 반응에 수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윤진이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전윤진 매니저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신기하다는 얼굴로 수한의 곁에 다가왔다.
“매니저 일 했었다면서요? 지나가는 스태프한테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그럼 이런 현장이 처음은 아니겠네요?”
“처음은 아닌데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그 까칠하다던 성예진 씨 담당이었으면 마음고생 많이 했겠네요.”
예진의 성격에 관한 소문은 대체 어디까지 퍼져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한은 예진을 제 사람으로 품어서 그런지 이제는 나쁘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사랑스럽다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아닙니다. 오히려 불만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 주니 편합니다.”
“하긴 그편이 편할 수도 있겠네요. 윤진이는 괜찮다, 괜찮다 하다가 나중에 터지는 타입이라 힘들거든요.”
“배려가 많은 성격인가 보네요.”
“네. 너무 착해서 걱정이죠. 물론 일에 관해서는 그 어떤 때보다 냉정합니다.”
수한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주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져서 수한은 입 안이 썼다. 그러면서도 돌려서 말하는 배려에 수한은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전윤진 매니저는 전윤진만큼이나 배려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알겠습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네. 그러면 저는 다시 윤진이한테 갈게요.”
수한은 스태프들의 일을 도우면서 전윤진이 화보 촬영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예진과는 확실히 다르긴 했다. 예진이 도도한 컨셉을 가진 커리어 우먼의 모습으로 화보를 촬영했다면 전윤진은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물씬 나는 애인의 모습으로 촬영을 했다.
‘역시 배우에 따라 다른 건가?’
아니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수한은 얼마 전에 성숙한 분위기로 잡지 화보를 낸 소원을 떠올리고는 웃음이 나왔다.
소원은 예전과 비교하면 세 살을 더 먹었지만, 워낙 동안이라 나이 먹은 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화보는 어린아이가 엄마 화장을 따라 한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팬들도 귀엽다고 난리였지.’
솔직히 말해 소원의 가수로서 정체성을 말하라고 하면 헷갈리기는 했다. 솔로 가수이지만, 소원의 팬들은 아이돌 팬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소원은 아이돌 방식으로 팬 서비스를 했다.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 감시자를 붙이다니.’
수한은 남일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얼른 돈을 모아 기획사를 차려 그의 사람들을 데려오는 게 답이었다.
“김수한 씨!”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전윤진 매니저가 얼른 오라고 손짓을 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 수한은 그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수한은 준비해 둔 대본을 꺼내 조심스레 전윤진의 손에 올려 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제가 글 읽는 속도는 빠르거든요. 금방 읽고 말해 드릴게요.”
전윤진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옆에 있던 전윤진 매니저가 한술 더 떠서 말했다.
“고 삼 때 수능 봤을 때는 언어 영역에서 1등급을 받았다고 해요.”
자신의 연예인을 자랑스러워하는 게 매우 보기 좋았다. 좋은 매니저 같다.
수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 말대로 대본이 빠르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휘리릭 넘기는 소리가 들려서 누가 보면 대충 읽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한은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전윤진을 발견했다.
드라마라는 걸 듣기는 했는지 전윤진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전윤진은 눈을 반짝이며 수한을 봤다.
“너무 재미있어요!”
수한은 대본을 두 손으로 꽉 잡는 손길에서 전윤진이 이 역할을 꼭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전윤진의 매니저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영화와 다르게 드라마는 밤샘 촬영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사전 제작으로 촬영하기로 했습니다.”
수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윤진이 매우 반짝이는 눈으로 매니저를 봤다. 물론 전윤진도 드라마 촬영 현장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일정도 힘들뿐더러 쪽 대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감정을 잡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수한이 가져온 대본은 그 모든 것을 참작할 정도로 큰 매력이 있다.
“이거 어디까지 나온 대본인가요?”
“완고까지 다 나온 대본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가 쉽지 않으나, 강우형은 단단히 준비해 두었다. 그동안 망한 콘텐츠로 인해 날린 돈을 생각하니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강우형은 각색해도 어느 정도로 할 수 있게 여지도 두었다.
“제작사는 어디예요?”
이번 질문은 전윤진이 하였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게 제작사였다. 제작사가 어떤 곳이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로 수한이 전윤진에게 직접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엘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수한이 길게 끌지 않고 단번에 말하자 당혹스러운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서 설마 연예 기획사 이름이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기획사가 얼마 전에 음주 운전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면 곤란하겠는데요.”
전윤진보다 전윤진 매니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한이 슬쩍 전윤진의 반응을 살피니 실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대본은 너무 좋은데…….”
대본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전윤진의 미련이 강하게 느껴졌다. 연기도 잘하는 사람이 감정도 솔직하게 내놓자 더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윤진 매니저도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뜻밖에 말을 꺼냈다.
“차라리 그 대본을 가지고 다른 제작사에 찾아가는 건?”
“안타깝게도 이 대본을 산 게 엘 엔터테인먼트라서요.”
“아…….”
다시 우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수한은 그 우울한 분위기를 물리고자 신뢰감이 드는 얼굴로 말했다.
“만약에 전윤진 씨가 한다고 하시면 전부 전윤진 씨에게 맞춰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부요?”
“전윤진 씨가 걱정하는 게 잠이라면 그 잠에 관해서도 맞춰 드리겠습니다.”
이건 강우형과도 약속한 내용이었다. 늦잠을 자는 게 문제라면 촬영을 늦게 시작하면 된다. 수한은 전윤진보다도 더 동요하는 매니저를 보고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얼마나 잠 때문에 고생했으면 저런 반응일까?
“잠깐만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요.”
전윤진도 매니저의 반응을 보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전윤진의 위치면 맞춰 주겠다는 곳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말이 바뀌니 문제였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제작사가 철저히 을인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철저한 을이라고 하니 강하게 당겼다. 전윤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직 물어보지 않은 사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 주인공은 누구로 생각하는데요?”
“차현 씨입니다.”
수한은 별처럼 빛나는 전윤진의 눈동자에 그녀가 수한의 캐스팅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전윤진 매니저는 한숨만 연신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