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9. 캐스팅 디렉터
“음…….”
강우형은 답지 않게 긴장하였다. 수한의 앞에서는 늘 여유 있던 그가 진정한 을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류 파일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서 강우형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정면을 보았다.
“이번 한 번만이라고?”
“네, 회장님.”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 나이수는 이 기획안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면서도 제 앞에서 굽신거리는 강우형은 마음에 들었다. 강우형의 야심이 크다는 건 나이수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강우형이라 해도 나이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글쎄? 고민 좀 해 봐야겠는데… 근데 안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강우형이 아무리 마음을 감추려고 해도 다 보였다. 나이수는 이런 식으로 강우형을 길들였고, 앞으로 계속 그럴 예정이었다. 나이수가 생각하는 강우형의 자리는 대표 이사까지였다. 반란의 조짐이 보이는 순간, 쳐 낸다. 그게 나이수가 내주는 관대함이었다.
나이수는 이 회사를 자신의 손주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물려줄까 고민을 하였으나, 아들은 한 회사를 이끌 재목이 아니었다. 그나마 손주가 나이수의 피를 물려받아 똑똑했다.
강우형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분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고민해 보시고 좋은 답 주시길 바랍니다.”
강우형은 이럴 줄 알았지만, 실제로 이렇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부정적이다. 수한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기에 강우형의 마음이 더 갑갑하였다. 이러면 수한에게도 할 말이 없다.
강우형은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달려오는 그의 비서에 의문을 그렸다.
“대표 이사님!”
“무슨 일이야?”
“사고가 났습니다.”
사고.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다 싸늘해지는 단어다. 엘 엔터테인먼트가 아이돌 기획 중심 회사이기 때문에 멤버 한 명만 빠져도 팬들의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엘 엔터테인먼트는 그런 팬들의 말을 잘 들어 주는 회사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팬들 사이에서도 이 회사 언제 망하냐는 소리를 들을까?
강우형은 조금 전에 간신히 가라앉혔던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물었다.
“뭐? 무슨 사고?”
“교통사고라 합니다.”
“얼마나 크게 다쳤대?”
“그게 말입니다…….”
갑자기 길게 끄는 목소리에 강우형은 안 좋은 예감을 받았다. 이런 경우 큰 사고 아니면 가해자였다. 전자와 후자, 둘 중에 고르라면 차라리 전자가 나았다.
“음주운전으로 사고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야. 아직도 안 끝났어?”
“사망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최악 중 최악이 나올 수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였다. 그렇게도 범죄는 저지르지 말라고 했는데 머리가 크니까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큰 사고를 쳐 버렸다.
“기사는?”
“막지 못했습니다. 하필 사고 난 사람 중 한 사람이 SNS에 글을 올려 버려서요. 그리고 사고 현장을 블랙박스로 찍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그 블랙박스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겠지?”
“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대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강우형은 눈앞이 다 캄캄했다. 사고 규모도 만만치 않은데 기사까지 막지 못했으니 큰일이다. 강우형이 사무실로 돌아가 주가를 확인하자 예상과 다르지 않게 주가는 빠르게 하락하였다. 하필 또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가장 잘나가는 남자 아이돌이 사고를 쳤으니 안 떨어지는 게 이상했다.
“어떻게 하라고 할까요?”
“사고 친 놈은 어디 있지?”
“병원에 있습니다.”
“왜? 다쳤대?”
“그게 술이 안 깨서 다친 건지 아닌 건지 현장에서 확인을 못 해서 병원에 일단 데려갔다고 합니다.”
아주 가지가지 한다. 강우형은 마음 같아서는 그딴 놈은 우리가 키우는 가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동안 투자한 돈을 생각하니 아주 이가 갈렸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방식으로든 수습을 해야 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내버려 둬서는 안 되었다.
“회의 소집해.”
“알겠습니다.”
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울리는 전화에 강우형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이런 상황인 줄을 알면서도 전화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방으로 와.]
강우형에게 유일하게 반말하는 사람은 회장인 나이수밖에 없으므로 강우형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웃었다.
생각해 보니 강우형만큼이나 이 그룹에 투자를 한 게 나이수였다. 이 그룹은 나이수 스스로 생각하기로도 역작이라 불릴 아이돌 그룹이었다. 그런 그룹이니 나이수가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한데 이상하게 강우형은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했던 상황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잘하면 좋은 기회가 되겠군.’
***
수한은 ‘붉은 꽃’ 드라마 제작에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좋아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엘 엔터테인먼트의 평판이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처 방법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
더불어 걱정이 되는 건 캐스팅 부분이었다. 대중들의 평판뿐만이 아니라 업계에서 엘 엔터테인먼트에 관해서 말이 많이 나왔다.
“제 식구 감싸기 정도가 이 정도면 지나친 거 아니야?”
“그 와중에 자기는 괜찮다고 팬들한테 글도 올렸다더군.”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미친놈 아니야?”
하나같이 공감되는 말들이었다. 특히나 저 팬들한테 글 올렸다는 부분에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사이코패스가 한둘은 아닐 거다. 그의 팬들도 오빠가 다치지 않았으면 됐다고 반응했으니까. 물론 그에 대해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들은 귀를 틀어막고 자기들 세상에만 빠져 있었다. 명백한 현실 도피였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강우형과 잡았던 손을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지.’
가장 힘들 때 도와줘야 제대로 된 빚을 만들 수 있다. 수한이 이번 일에 성공한다면 강우형은 수한에게 큰 빚을 지게 된다. 서이나도 빚을 졌지만, 강우형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우형에게 훗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에는 그 손을 놓지 않는 게 수한이 내린 판단이었다.
‘지난번에 나온다는 곡이 이 그룹으로 가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이 상황에서는 어떤 좋은 노래가 나와도 비난만 쏟아질 게 뻔하였다. 수한은 그런 비난 속에 곡을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수한 혼자 만든 것도 아니어서 소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일단 나는 내 일을 하자.’
이런 힘든 순간이 오히려 수한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강우형이 기회를 잡았듯이 수한도 그 기회를 잘 잡아 자신의 경험을 넓힐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찾아온 것이 푸른 엔터테인먼트였다.
‘영화 배우 대다수가 속해있는 기획사지.’
이 업계는 모든 것이 다 인맥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건 배우도 그 범위에 속한다는 의미였다. 특히나 영화 쪽은 배우가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배우의 전화 한 통이면 바로 캐스팅을 할 수 있으니 영화 쪽에서 수한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수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감당해 내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수한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엔터테인먼트의 건물 규모는 가온 엔터테인먼트와 비슷했다. 아이돌 전문 기획사와 다르게 연습생을 따로 키우지 않는 편이니 연습실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수한이 갈 곳은 명확했다. 매니지먼트 사업부였다.
“안녕하십니까. 김수한입니다.”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업은 매니저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매니저 일이 연예인을 소개하는 거라면 캐스팅 디렉터는 수한 자신을 소개해야 했다.
처음 수한이 들어올 때만 해도 신인 배우가 들어오나 했던 푸른 엔터테인먼트 사람들은 곧 수한이 명함을 나눠 주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다. 잡상인으로 오해해서 나온 반응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명함에 적힌 ‘캐스팅 디렉터’라는 직군을 보고 흥미롭다는 듯이 수한을 봤다.
“김수한? 이름 들어봤어요. 일 잘하는 친구라고 소문 자자하던데.”
“오? 그래요?”
사무실 가장 안쪽 있던 남자가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다들 호의적으로 반응하였다. 게다가 캐스팅 디렉터라면 배우들에게 일을 주는 쪽이라서 먼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근데 캐스팅 디렉터는 직접 명함도 나눠 주나 보네요?”
“프리랜서라서 그렇습니다.”
어느 회사에 얽매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은근 이쪽 업계가 가장 빨리 시대에 적응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아니어서 기획사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먼저 영업을 해 오면 편하기는 했다.
“근데 우리는 제작사가 아닌데?”
“네, 맞습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이 대본을 배우분께 직접 보여 주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제야 수한이 직접 찾아온 이유를 알겠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래도 수한이 먼저 저자세로 나와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누굴 캐스팅하려고 온 거길래?”
“전윤진 씨입니다.”
수한이 이름을 말하자 아- 하는 표정이 보였다. 탑스타이기 때문에 캐스팅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한이 직접 왔다는 건 매력적인 제작사가 아닐 가능성이 있어서 수한의 방문이 이해가 되었다.
마침 수한을 적극적으로 응대하던 사람이 전윤진의 매니저였는지 호감 섞인 얼굴을 했다. 대부분 대본만 딸랑 보냈지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전윤진 씨에게 보여 주기 전에 제가 먼저 대본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가끔 이상한 내용을 대본이라고 보내는 경우가 있어서 이런 경우는 기획사에서 직접 내용을 확인해야 했다. 물론 수한의 인상이 좋아서 이상한 대본을 건네줄 거라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확인할 건 해야 했다. 이 업계에서는 멀쩡한 얼굴로 미친 짓을 하는 또라이도 존재하기는 하니까.
“음? 근데 드라마네요?”
“네. 그래서 제가 직접 찾아온 겁니다.”
수한은 대본을 읽을수록 집중하는 얼굴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건 수한이 보장하는 재미였다. 아니, 정확히는 능력치가 보장하는 재미였다.
안 그래도 갑작스러운 방문자에 모두의 시선이 몰려 있을 때 대본을 다 읽은 전윤진 매니저는 드라마 한 편 잘 본 시청자의 얼굴을 하였다.
“재미있네요. 이제까지 제가 본 대본 중에 가장 재미있어요.”
수한은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가능성이 크므로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제가 직접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꼭 직접 전달해야 해요?”
“네. 그랬으면 합니다.”
대본이 이렇게 잘 나왔는데 직접 가서 전달하겠다는 수한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대본에는 이상이 없어 전윤진 매니저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기다려 보라면서 사무실 안쪽 남자에게 다가갔다.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내뿜는 게 팀장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더니 곧 전윤진 매니저가 수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화보 촬영이 있는데 원하시면 함께 가실래요?”
“그래도 됩니까?”
“네. 물론 화보 촬영이 끝난 후 잠깐인데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수한이 크게 좋아하면서 무조건 괜찮다고 하자 전윤진 매니저도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수한은 허락해 준 팀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표했다. 잠깐만, 인제 보니 수한의 이름을 먼저 알아본 그 사람이다.
‘이래서 이름을 알려야 해.’
연예인이든 아니든 자기 PR이 필수인 시대이다. 수한은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 내일 전윤진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