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 9. 캐스팅 디렉터
“안녕하세요.”
수한은 자리에 앉자마자 나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전에는 강우형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주눅이 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편해 보이는 모습에 강우형은 3년의 세월을 새삼 느꼈다.
“제가 무슨 일 때문에 부른지 아십니까?”
“대충은요.”
수한이 커피를 한 모금을 다시 마시자 강우형이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예전과 다르게 이 상황에서 갑이 수한이라는 게 재미있었다.
“지금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들고 있는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해외에 파는 것에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아직 한한령이 떨어지기 전이라서 중국에서는 적극적으로 한국 드라마를 수입해 갔다. 그중에서 한류 바람을 가장 강력하게 일으키는 엘 엔터테인먼트에 속해 있는 아이돌들은 콘텐츠를 파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팔 수는 없었다. 그들도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았다. 더불어 국내에서는 아이돌로 배우진을 꾸리다 보니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광고가 붙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김수한 씨를 불렀습니다. 해결책이 있습니까?”
“다른 독에 물을 부으면 되죠.”
수한의 단순한 대답에 강우형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 결정을 위에서 받아 줄 것이냐였다. 우선 회장의 허락부터 받아야 한다.
“엘 엔터 소속 아이돌이 나온다고 해도 최대치가 조연입니다.”
수한의 냉정한 대답에 강우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대본을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을 보면 다들 발을 뺐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는 건 엘 엔터테인먼트 회장이 원해서였다.
“회장님을 설득해야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는 아직 회장님까지 만날 짬은 아니라서요. 잘 설득해 보십시오.”
만약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엘 엔터테인먼트는 무너질 것이다. 지금도 밑 빠진 독에 얼마나 돈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수한은 그 돈을 생각하면 자기가 다 아까웠다. 그 돈이면 수한이 기획사를 몇 개를 차리고도 남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사람이 아직 회사에 남아 있는 건데.’
무언가 바꾸고 싶어 하는 의지는 느껴져서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특히나 강우형과의 관계에서 수한이 무작정 을도 아니기에 수한은 강우형을 대하는 게 편했다.
“제게 이런 식으로 조언을 해 주는 것도 바라는 게 있어서겠죠?”
“네, 그렇습니다.”
빼지 않고 시원하게 말하는 수한이 강우형은 마음에 들었다. 처음 엘 엔터테인먼트를 거절했을 때만 생각해도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질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니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드라마 하나만 대표 이사님 방식대로 만들어 보자고 설득하는 겁니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지 않으냐고 쳐다보는 수한 때문에 강우형은 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할 수 있다. 오히려 못하면 무능력자로 의심을 받을 판이니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그 드라마의 캐스팅 디렉터는 김수한 씨가 하겠죠?”
“맡겨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드라마를 만들게 된다면 유지영의 회사에서 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 유지영의 경우에는 돈을 아끼고자 했기에 오디션을 보는 방식으로 주연을 채택했으나, 이번 경우는 엘 엔터테인먼트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캐스팅을 해야 했다.
‘이름이 있는 배우들이 역할을 맡아야 해.’
이런 경우에는 미리 어떤 배우를 캐스팅할지 정하고 연락을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해 두고 말이다. 이래서 탑스타 계열에 올라가면 배우들이 편해했다. 오디션을 보러 갈 필요도 없이 알아서 구애를 보내니 말이다.
수한은 순간적으로 예진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예진은 여전히 인기가 많기는 하나, 이 일에 적합한 배우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은도 아니었다.
“회사에 대본을 사들인 게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수한이 대본도 골라내는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건지 몰라도 기대에 찬 강우형의 얼굴이 보였다. 수한은 성민이 떠올라서 쓰게 웃다가 얼마 안 가 들어오는 대본들에 입이 벌어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바로 준비해서 가져올 줄은 몰랐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죠?”
“네, 맞습니다. 어려운 시간 내주셨는데 시간 활용을 잘 해야죠.”
“근데 여기에서 봐도 됩니까?”
“상관없습니다. 오늘 일정을 다 빼놨거든요.”
수한이 생각한 것보다 더 각오를 다진 모습이었다. 역시 수한은 강우형에게 어떤 일이 생겼던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렇지 않은 한 엘 엔터테인먼트가 망할 이유가 없었다.
수한은 가벼운 맘으로 왔지만, 강우형의 적극적인 모습에 수한도 진지하게 대본을 보기 시작했다. 수한은 받는 대로 주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 눈에 다 보이긴 하지만…….’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니 대충 넘겨볼 수도 없었다. 수한은 대본을 읽다가 새삼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다.’
능력치가 낮다고 방심했던 대본들도 막상 보니까 다 재미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이걸 왜 산 걸까 의심되는 대본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재미있어서 다음 화 대본도 보고 싶어졌다.
‘이래서 드라마가 망할지 안 망할지 대본만 보고는 모른다는 거구나.’
좋은 대본이어도 연기를 못하는 배우를 만나면 능력치가 떨어진다. ‘로맨스 연대기’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물론 그 작품은 표절이라는 문제가 가장 컸고, 대본을 수정하면서 재미없어진 게 컸지만 그래도 이 사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능력치를 안 봤다면 수한이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대본들이 많았다.
수한은 그동안 대충 봤던 드라마 대본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대본을 쓴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동안 너무 능력치만 보고 판단해 왔던 게 아닌가 싶었다.
“다 재미있죠?”
“그러네요.”
그러나 재미와 별개로 능력치는 개성이 넘쳐났다. 대박작도 있고, 아예 망하는 작품도 섞여 있었다. 수한은 이런 대본을 유지아 작가가 손보면 어떨까 하는 기대도 해 봤다. 정작 그 유지아 작가는 자기 대본 쓰느라 바빴다.
수한은 재미는 재미대로 보면서도 능력치 별로 대본을 분류하였다. 강우형이 흥미롭게 쳐다보자 수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나중에 고르기 편해지라고 분류한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수한이 어떤 방식으로 대본을 고르는지 들었는지 수한이 분류하는 것마다 강우형의 눈이 지나치게 반짝였다.
‘잠깐만, 나 지금 밑천 털리는 중인가?’
수한이 고개를 들자 강우형과 눈이 딱 마주쳤다. 영업 비법을 뺏기는 것 같은 기분인 건 제발 기분 탓이길 바란다. 대본이라고 해 봤자 표지 색이 대부분 비슷하기에 수한은 나가기 전에 섞어 놓기로 했다.
‘일단은 20대 배우는 안 돼.’
능력치가 좋은 것 중에서 20대 주인공은 다 탈락 후보에 넣어 두었다. 인지도를 가진 배우들은 대부분이 30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연기를 잘한다고 대중이 손꼽는 사람들이 하기 좋은 역할을 골라내야 한다.
‘이거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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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 – 대중성: S, 화제성: A, 평균 시청률: 22%, 성장 가능성: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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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TV 세대에서 너튜브 세대로 넘어가고 있으므로 이 정도 시청률은 또 3년 전과는 달랐다. 이 정도면 대박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한은 이 작품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강우형을 보자 대본이 아니라 수한을 보고 있던 건지 기다렸다는 듯이 강우형이 웃었다.
“그 작품입니까?”
“네. 이 작품입니다.”
수한이 대본을 건네주자 강우형은 그 자리에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 낼 필요도 없고, 결정이 나지도 않지만 강우형은 굉장히 신중한 모습이었다.
수한은 강우형이 대본을 읽는 동안 이 역할에 적합한 배우들을 머릿속에 그렸다. 수한이 달리 캐스팅 디렉터로서 3년을 뛴 것도 아니라서 수한의 머릿속에 수많은 배우가 그려졌다. 수한은 그 배우 중에 연기는 잘하나, 나중에 논란이 될 문제를 일으킬 배우들을 가장 먼저 제외했다.
‘나도 시청자인데 그런 사람을 고르는 건 아무래도 찝찝하지.’
나중에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될 시청자에 대한 배려도 함께 있었다. 그러고 나자 배우들이 얼마 안 남았다. 특히 그중에 화제성이 있는 배우를 고르니 이건 선택지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문제는 그 배우들이 드라마보다는 영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수한이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강우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안목은 어디서 키웁니까?”
“그냥 제 취향이 대중적이라 잘 아는 겁니다.”
강우형이 봐도 수한이 고른 대본이 범상치 않은지 강우형은 진심으로 수한을 보며 감탄했다. 이런 사람이니 3년 동안 이 험난한 세계에서 홀몸으로 살아남은 게 아닌가 싶었다.
“이런 인재인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더 높게 제안을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러게 제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수한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자 강우형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수한은 유지영과 마찬가지로 강우형에게 무슨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와도 인연이 길게 갈 거라 생각했다.
“배우는 누구로 할지 생각해 본 거죠?”
“네.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좋다고 하면 직접 접촉해 보겠습니다.”
강우형의 얼굴에 의문이 생기자 수한은 솔직하게 생각하는 배우들을 말했다. 강우형도 막상 그 배우 목록을 들으니 수한의 행동을 이해했다. 특히나 그 사람들은 앞으로 드라마는 안 할 거라고 비공식적으로 선언한 사람들이다. 드라마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고생을 너무 한 탓이었다. 물론 방영하는 당일 날 나오는 쪽대본도 제대로 한몫했다.
“일단 보고를 올리고 허락을 받으면 움직여 보죠.”
“네, 좋습니다.”
애초에 대본을 이런 식으로 고른 게 너무 이른 행동이었다. 가장 먼저 강우형이 회장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이러한 일도 할 수 있는 거였다.
“요즘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부디 그 드라마를 함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한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자, 그 순간 해야 할 말이 생각났는지 강우형이 수한을 불러 세웠다.
“네, 말씀하세요.”
“작곡가 에이치에게 지난번에 산 곡 말입니다. 이번 달 안에 나올 것 같습니다.”
수한과 강우형이 이런 식으로 서로의 신뢰를 쌓은 것에는 작곡가 에이치가 제대로 한몫했다. 강우형은 작곡가 에이치의 노래를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고,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거래하게 되었다. 실제로 낸 곡 중에 그 해를 대표하는 곡으로 대박을 친 노래도 있어서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수한은 남일을 떠올리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네요.”
“그러려고 우리 회사에 곡을 판 거 아닙니까?”
“네. 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셨네요.”
“그래서 성예진 씨와 소원 씨는 소개 안 해 줄 겁니까? 둘 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아는데요.”
수한은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는 강우형을 향해 그저 웃기만 했다.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 웃음으로 이미 답은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수한이 엘 엔터테인먼트 건물에서 나오자 벌써 해가 지는 중이었다. 생각한 것보다 시간을 더 많이 사용했다. 수한은 핸드폰에 쌓인 연락들을 보면서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러다가 갑자기 온 한 메일 때문에 눈을 여러 번 깜빡이게 되었다.
‘잠깐만, 이거 진짜라고?’
수한이 이 업계에서 인정을 받긴 했으나, 모호하다고 생각한 것은 거장이라는 감독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일을 받지 않더라도 인정은 받을 수 있으나, 아무래도 인정받는 정도가 다르긴 했다.
수한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메일로 보내온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왜 자신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외국 영화 찍는구나.’
한국의 거장이 외국에서도 활약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수한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외국 배우들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감독보다 배우를 모르는 캐스팅 디렉터라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