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9. 캐스팅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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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진, 소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정들! 훈훈한 봉사 활동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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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은 기사를 보자마자 삐뚤어진 자세로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기사가 누구의 작품인지 알았기 때문에 분노가 올라왔다. 두 사람 사이에서 열심히 일하는 수한의 얼굴이 사진에 떡하니 찍혔다. 남일이 보기에는 일부러 연출한 사진이었다.
남일은 기자의 이름에 적혀 있는 ‘이서영’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서영. 수한과 연이 있는 기자의 이름이다.
‘이건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 같네.’
사실 이제는 다른 직업군으로 옮겼기 때문에 굳이 남일이 수한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남일은 수한이 신경 쓰였다. 특히나 이 기사처럼 남일을 도발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거지?’
아니다. 수한은 처음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할 때부터 그랬다. 남일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수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봐서는 수한은 평생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남일은 얼마 안 가 들어오는 남자를 노려봤다. 소원에게 새로 붙인 매니저였다. 물론 그는 수한의 예상대로 매니저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감시자였다.
“그래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지?”
“거리가 상당해서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계약이 어느 정도 남았느냐 물은 것 같습니다.”
이런 일에는 익숙지 않은 사람을 붙여서 그런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남일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회사에 있는 사람 중 이런 일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가라고 신경질적인 손짓만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가면 당장에라도 새 기획사를 차릴 기세였는데 막상 하는 일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소원과 예진에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기획사와 만났나?’
수한의 인맥이라면 충분히 그리할 수 있다. 게다가 예진과 소원의 지금 위치라면 어느 기획사에서든 탐을 낼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은도 불안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한이 담당 로드 매니저였으니 말이다.
남일은 혼자 불안해하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쓰게 웃었다.
‘그놈이 난 놈은 난 놈이네.’
수한이 퇴사하고 난 뒤 회사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해졌다. 특히나 성민이 수한의 퇴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열정적이게 일하던 전과 다르게 무엇 하나 시원하게 일 처리하는 게 없다. 처음에는 반발심으로 그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일할 의욕을 잃었다.
똑똑. 양반은 아닌 모양인지 성민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성민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무슨 일이지?”
“고주혁이 일본 콘서트 일정을 미뤘으면 한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왜?”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남일은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보였다. 일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큰데 그걸 미루겠다니, 절대 안 될 일이다.
성민이 변했듯이 고주혁도 스토커 사건 이후로 변했다. 조금 더 신경질적이고, 예민해졌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으나, 여러 사건이 반복되면서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
“하여튼 간에 그놈을 거친 사람 중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
굳이 따지자면 잘못은 남일에게 있었지만, 성민은 이제 반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 봤자 남일의 화만 돋울 걸 알기 때문이다. 화만 내면 다행이지, 그 화가 연예인들한테까지 가니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남일의 모습에 성민은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남일은 수한에게 영향받은 다른 사람들을 탓했지만, 사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건 남일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안 된다고 전해. 일정대로 간다.”
“알겠습니다.”
성민이 봐도 고주혁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SSS급 슈퍼스타 이후로 고주혁은 계속해서 성장해 갔다. 그러나 그 성장은 얼마 안 가 멈추었다. 고주혁을 해외로 돌리면서부터였다.
‘중국이 그렇게 가 볼 만하다고 하셔 놓고서는 왜 일본으로 보내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국내 활동보다는 해외 활동을 더 시키면서 고주혁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이 사라졌다. 물론 디지털 싱글로 노래는 꾸준히 냈으나, 처음과 같은 화력은 없었다. 비슷한 화력을 내려면 전과 비슷한 수준의 음악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한이가 작곡가 에이치를 소개해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수한이 중간에 껴 있기 때문에 거절한 거였다. 성민이 들어도 대박인 곡이어서 성민은 여전히 미련을 가졌다. 특히나 그 노래가 엘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혈압이 올라서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아직 음원으로 발매되지는 않았으나, 곧 낸다는 소문도 있어서 더 짜증이 났다.
‘설마 엘 엔터와 그런 식으로 연을 맺을 줄은 몰랐지.’
안 간다고 해서 안심했건만 수한은 한 번이라도 맺은 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수한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한이 직업군에 가리지 않고 모두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 수한과 척을 진 사람이 유일하게 남일이라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엘 엔터에 곡 빼앗겼을 때도 한동안 난리였지.’
누가 보면 전생의 원수라도 다시 만난 줄 알겠다. 성민은 그 정도로 수한을 싫어하는 남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한이 가고 나서 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수한만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남일의 생각과 다르게 성민도 나름대로 수한이 없는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는 것처럼 수한이 없는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이렇게 허할 줄은 성민도 생각하지 못했다.
“실장님! 어떻게 됐어요?”
성민이 조용히 고개를 젓자 암울한 분위기가 되었다. 누가 봐도 고주혁을 혹사시키는 게 맞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중에 고주혁을 안 맡아 본 사람이 없어서 이번 일에 더 신경을 썼다.
“주혁이가 또 화낼 텐데 저희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죠?”
“어떻게 하긴, 참고 넘겨야지. 그래도 때리진 않잖아.”
성민의 말에 다들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웃으라고 하는 말인지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만큼 재미없고, 무서운 말이었으니까. 어쨌든 간에 이 소식을 고주혁에게 전해야 한다니 다들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실장님이 전해 주시면 안 돼요?”
“좋아. 이번 한 번만이다.”
“충성!”
언제부터 고주혁이 이렇게 까다로운 연예인이 된 건지, 인제는 예진을 넘어섰다. 나중에 재원에게 이 소식을 들은 예진이 건방지다며 뭐라고 했다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매니저로서도 예진이 더 상대할 만했다.
성민은 고주혁에게 전화를 하면서 새로 뜬 기사 하나를 봤다. 예진과 소원으로부터 봉사 활동을 하러 간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는데 막상 기사로 보니까 기분이 남달랐다. 수한이 소원과 함께 봉사 활동하러 갔던 것도 생각나고 말이다.
‘어?’
남일이 발견한 것을 성민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성민은 화를 냈던 남일과 다르게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연락이 완전히 끊긴 성민과 다르게 예진과 소원은 수한과 연락을 하고 있었다. 그게 사람을 서운하게 했다.
수한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전해 들은 바로는 돈을 잘 벌어서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그래서 많이 달라졌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 연락할 거면 내가 먼저 해야지.’
수한이 성민에게 연락하지 않은 게 성민을 위한 배려였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성민이라서 먼저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
“네, 기자님.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수한은 이서영 기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홀가분하게 웃었다. 남일이 얼마나 열 받아 있을지 생각하자 웃음이 다 나왔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얼마 전에 봉사 활동을 다녀왔거든요. 그때를 떠올리니까 기분이 좋아서요.”
비슷한 맥락이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유지영은 그러려니 넘어가며 이번에 오디션을 보는 사람들 목록을 보여 주었다.
유지영은 수한이 말한 것을 철저히 지켰다. 수한은 유지영만큼이나 제 말을 따라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앞으로도 그녀와 좋은 인연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기로 했다.
“근데 바쁘시다더니 봉사 활동도 다니세요?”
“아는 사람이 가자고 해서요.”
“소원 씨요?”
수한은 모른 척했던 유지영을 황당하게 봤다. 유지영은 장난친 거겠지만, 수한은 유지영 앞에서 함부로 거짓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적으로 만나지 않는 한은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말이다.
“아시네요. 아니, 그럼 유도한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근데 소원 씨, 여전히 연기자 할 생각 없대요? 요즘 많이들 넘어가잖아요.”
전에도 아이돌이나 가수들이 연기자 쪽으로 많이 넘어가긴 했으나, 요즘에는 더 심해졌다. 그래서인지 아이돌 안 나오는 드라마가 없다면서 불평하는 시청자들도 더불어 늘어났다. 연기를 잘하면 모를까 연기를 못해서였다. 그중 선두 주자를 달리는 건 엘 엔터테인먼트였다.
엘 엔터테인먼트 자체에서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하자 주인공이 하나같이 소속 아이돌이 되었다. 그러니 질색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약속을 잡은 건가?’
수한의 안목이야 업계에서 알아주니 음악이 아닌 다른 면에서 손을 내밀만 했다. 유지영처럼 수한의 말을 잘 들어 준다면야 이미지 타파가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엘 엔터테인먼트가 이후로 망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지는 않았다.
“글쎄요. 소원 씨한테 물어봐야 할 일이지만, 기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분명 소원의 발연기를 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수한은 확신했지만, 이 역시 소원을 배려해서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소원은 연기 쪽은 꿈도 꾸지 않았다. 예진이 걸어온 길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수한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갑작스럽게 잡힌 오디션 일정이라서 짧은 시간을 빼서 왔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한 명씩 말고 한꺼번에 불러도 됩니까?”
“그래도 돼요?”
“네. 오디션 참가자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한 번 보면 알거든요.”
다른 곳에서도 그런 식으로 진행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유지영은 수한을 믿고 맡겼다.
수한은 안으로 들어오는 얼굴들을 보며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빠르게 주어진 대사를 읊게 하였다.
수한은 연기 능력치가 좋아도 역할과 맞지 않은 연기를 하는 사람들을 봤다. 그중 하나가 지난번에 봤던 서이나였다. 물론 서이나의 경우는 강약 조절과 더불어 해석 문제로 탈락이었으나, 지금은 그녀가 아니면 안 되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유지영의 인사가 끝나고 참가자들이 나가기가 무섭게 수한은 추린 사람 목록을 유지영에게 건네주었다.
유지영은 참가자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급하게 봐서 조금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유지영의 인상에 남은 참가자들만 딱 남았다.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네.’
수한이 급하게 일어서는 사이에 유지영은 복도로 나가 대기하는 사람들에게 합격자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름을 불릴 때마다 반응이 재미나서 보는 맛이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탈락의 쓴맛을 본 사람들도 있어 수한은 약간은 미안해하며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에 수한은 전화를 받은 상태로 주차장으로 갔다.
“네. 이제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럼 곧장 제 방으로 오세요. 미리 차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늘 그랬듯이 아이스커피죠?]
“네, 맞습니다.”
수한은 강우형에게서 온 전화를 끊고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수한은 교통사고 같은 거로 쉽게 인생을 끝낼 생각이 없으므로 안전 운전을 하였다. 그러다가 건너편에서 서이나를 발견했다. 노래를 듣는지 이어폰을 낀 채로 신호등 앞에 서 있었다.
‘연기자에서 가수 쪽으로 옮길 인재라면 저기 있는데 말이야.’
그러나 서이나의 재능은 어딜 가든 아까웠다. 수한은 서이나가 성인이 되기 전에 아이돌이 나오는 드라마의 주연을 맡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 엔터테인먼트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