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9. 캐스팅 디렉터
“무슨 일이신가요?”
유지영이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수한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순진하게 웃었다. 그러나 누가 사업하는 사람 아니랄까 봐 유지영은 눈치가 빨랐다.
“김수한 씨, 이런 건 연기 못하시네요. 조금 전에 연기력이라면 절 속이고도 남을 줄 알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이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티 납니까?”
“완전히요. 처음부터 저 애 합격하게 할 생각이었죠?”
거의 확신을 품고 말하는 탓에 수한은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다.
“글쎄요. 저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제게 와서 기회를 달라고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수한이 우연이라고 말해도 유지영의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일이 너무 착착 진행되었다. 수한도 그 의심을 알기에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가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이라면 가온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 그렇네요. 죄송해요. 빚이 어쩌고 하길래 의심했어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유지영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반쯤 진담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죠.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합니다.”
수한이 괜찮다고 말하자 의심한 게 미안해진 유지영은 살짝 목소리를 누르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그 화제가 딱 봐도 아까부터 묻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리던 질문이었다.
“근데 연기를 그렇게 잘하는데 연기는 왜 그만둔 거예요?”
“스타성이 없어서요.”
“네?”
“농담입니다. 누굴 돌보는 일을 좋아하거든요.”
수한은 그 말을 한 뒤 제 능력치를 확인하였다. 수한이 연기를 잘한다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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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한 – 스타성: D, 연기력: A, 가창력: C, 춤: B, 인지도: D, 기타: ???, 성장 가능성: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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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의 세월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스타성은 어떻게 해야 올릴 수 있는지 수한도 의문이었지만, 연예인 쪽으로만 풀지 않으면 어떻게든 성장은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작곡 실력이 생겨서 그런가?’
그래도 감사한 점은 3년이 지나도 이 능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근데 지금은 캐스팅 디렉터 일을 하고 계시네요.”
“이 일도 재미있습니다. 매니저 일을 할 때보다 인맥 쌓기가 더 좋기도 하고요.”
이 업계가 인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유지영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넘겼다.
“아! 맞아. 지아한테 연락 왔어요. 이번 작품 끝나면 같이 밥 먹자네요.”
“저야 좋죠.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시간 조절을 해 보겠습니다.”
“주연이 정해졌으니 나머지 배역도 어떻게 잘 정해지겠죠?”
아무래도 주연이 신경을 많이 쓰게 했는지 그동안 마음고생 한 티가 났다. 그러나 수한은 여기서 안도할 게 아니라 여겼다.
“아니요. 제가 보기에는 나머지 배역에도 신경을 많이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네. 그래야 시나리오가 살 겁니다.”
유지영이 보내 준 각본으로 능력치 확인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수한이 이 일을 맡은 건 유지영이라는 인맥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각본의 능력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 연기력이 올라간 이유가 거짓말 때문인가?’
매니저 일을 관두면서 수한은 너무 정의로운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남들처럼 적당히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오는 방향으로 더 철저하게 계산을 했다. 물론 전처럼 남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서이나 씨의 경우는 예상과 다르게 와서 놀랐지만.’
처음 계획은 당장 기획사를 차리는 게 아니어서 시간을 보내며 서이나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업계 생활을 조금 더 겪다 보면 수한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뀔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서이나는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단번에 수한을 잡아냈다.
“저 그럼 이만 가야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수한은 나가면서 핸드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주식 돌아가는 상황을 보았다. 팔 주식들은 팔아 버리고 새로 상장한 회사 중에 미래까지 살아남는 회사를 추려서 주식을 사들였다. 지금 수한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돈을 많이 모으는 거였다.
‘어떤 면에서는 유지영 씨가 부럽기도 하네.’
예전처럼 소규모로 기획사를 차릴 수도 있겠지만, 수한은 조금 더 규모가 큰 기획사를 차려야 했다. 적어도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도 목표했던 금액의 반은 모은 셈이니 더 바짝 허리끈을 졸라매야 했다.
수한은 밀려오는 피곤을 하품으로 날려 보내다가 소원에게서 온 메시지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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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 보호 센터에서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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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예진의 아이디어였다. 그보다 유기견 보호소라면 냄새부터 시작해서 몸 노동이 장난이 아니다. 수한은 이 일로 예진과 소원이 몸살에 걸리지 않을까 염려했다. 아니,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예진 씨, 영화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엎어졌대요. 투자가 잘 안 들어왔나 봐요.]
드라마나 영화나 투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엎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수한이 다 안타까웠다. 소원이 말은 하지 않았으나, 수한은 예진이 들어간다는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여성 주연작이었으나, 시나리오가 약한 게 문제이긴 했다.
‘예진 씨는 도전하는 것에 의의를 둔 것 같지만.’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예진의 도전 정신과 연기력에 수한은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예진을 만나게 되면 진심으로 연기 칭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수한은 집에서 가장 편한 복장을 챙겨 입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깔끔하게 했다. 평소에도 관리를 잘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신경 썼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지저분하게 나타나면 아무래도 그렇지.’
더불어 소원을 몰래 뒤에서 쫓던 그 매니저가 따라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진에 찍힐 가능성이 있으니 수한은 최대한 말끔하게 하고 나왔다.
날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몸 노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곧바로 가면 된다고 했지?’
함께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연예인이다 보니 수한이 굳이 데리러 갈 필요가 없었다. 소속사에서 알아서 챙겨 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연예인이 되면 좋을 것 같은데 대중의 눈은 여전히 무서웠다.
나오기 전에 본 예진의 기사에서 발견된 악플을 보며 수한은 혀를 찼다. 몇 년이 지나도 악플러는 여전했고, 오히려 악독해졌다. 자신의 말로 사람이 죽으면 도리어 좋아할 인격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회가 병들어서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는 건가?’
끝도 없이 싸워야 할 대중을 수한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즐기는 거지만, 수한은 진심으로 싸워야 하니까 애초에 시작점부터 달랐다.
수한은 일부러 외제차는 집에 두고 나왔다. 봉사 활동하러 가는데 사치스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렌터카를 타긴 했는데 평소에 타던 차가 아니다 보니 어색한 게 있기는 했다.
‘그래도 매니저 일 한 짬은 사라지지 않네.’
무엇보다 안전 운전을 우선으로 해서 수한은 주변을 잘 보면서 운전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서 가다 보니 경기도 지역에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구석에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면 몇 시간은 그냥 날렸을 장소였다.
수한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진동하는 냄새에 코를 살짝 막았다. 관리하는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들어가 모든 개를 관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센터에서 미리 입을 옷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수한은 하얀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래서야 정리하고 온 의미가 없겠는데?’
아직 오지 않은 두 사람으로 인해 수한은 먼저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수한 말고도 봉사 활동에 지원한 사람들이 있어서 혼자 외롭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휴.”
“진짜 책임감 없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철창에 갇힌 개를 보며 다들 한숨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수한도 개를 좋아해서 그런지 분노가 샘솟았다. 수한의 눈에는 하나같이 예쁜 개들인데 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서 버렸단 말인가?
수한은 구석에 쌓여 있는 캔 사료를 가져와서 열심히 땄다. 뚜껑이 날카로워서 최대한 다치지 않게 조심하며 빠르게 땄다. 수한의 그 빠른 속도에 함께 일하는 봉사 활동자들은 감탄하며 수한을 봤다.
“일 잘하시네요.”
“잘 안 되는 것들은 저한테 건네주세요.”
함께 일하다 보니 봉사 활동자들과 금세 친해졌다. 수한은 그 가운데 느릿느릿하게 행동하는 두 여자를 발견하고 웃음이 나왔다. 한 여자는 조심해서 까느라 느렸고, 한 여자는 잘 열리지 않아서 흥분한 게 보였다.
‘언제 왔지?’
수한은 핸드폰을 확인하려다가 손에 있는 장갑 때문에 포기했다. 어차피 연락을 못 받을 상황이기는 했다.
‘확실히 연예인이긴 연예인이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몇몇 사람은 소원과 예진을 알아보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특히나 예진은 ‘댕댕이를 부탁해’를 하면서 순돌이를 입양했기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잘 안 되면 저한테 주십시오.”
수한이 먼저 예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예진의 예쁜 눈이 커졌다. 수한이 함께 이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남에게 무관심한 예진다워서 수한이 웃자 예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3년이 지나도 그대로야?”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수한이 깔끔하게 뚜껑을 떼어 내고 예진에게 건네주자 예진이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을 대야에 털어놓았다. 수한이 소원에게도 도움을 줄까 해서 쳐다보자 소원은 이미 스스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쟤가 잘하는 거야.”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예진의 강렬한 시선에 수한은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왜 이렇게 편한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편한 느낌에 수한은 신기해했다.
“잠시! 쉴게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 같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물론 예진은 거의 누울 태세여서 수한이 간신히 말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시끄러워진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푸드 트럭 하나가 근처에 떡하니 있었다.
“어?”
“제가 불렀어요.”
소원이 해맑게 말하자 수한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몰래 봉사 활동하러 온 거 아니었나? 아니다. 오히려 잘되었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대부분에 사람이 소원과 예진을 알아본 상태였다.
“무료니까 많이 드세요!”
푸드 트럭 주인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다들 배가 매우 고팠는지 줄 서서 음식을 받았다. 수한은 그 와중에 몰래 이 현장에 와 사진을 찍는 이서영 기자를 발견하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이래서 이서영 기자와 계속 연을 맺는 거다. 마음에 든다. 그리고 수한은 소원을 감시하러 온 그 남자가 이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내일 기사 보면 아주 난리가 나겠네.’
남일이 화가 날 때 어떻게 하는지 봤기 때문에 수한은 남아나지 않을 대표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화를 받아 낼 성민이 걱정되었으나, 이미 그건 남의 일이 되었다. 성민을 좋아하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모든 일을 신경 써 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도 얼른 먹으러 가요.”
“그래!”
대놓고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얼굴을 드러내는 두 사람 때문에 수한은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원래는 남일에게 엿 먹이려고 만든 자리였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수한에게 치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