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94화 (94/186)

094   9. 캐스팅 디렉터

처음 서이나의 반응은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멍했다. 사람이 너무 놀란 일을 겪으니 아무 생각이 안 나는 탓이었다.

서이나와 다르게 유지영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수한이 한때 대학로 연극단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이런 식으로 수한의 과거가 위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그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린 서이나가 흥분하며 말했다.

“지금 저 데리고 장난치는 거죠?”

“물론 아닙니다.”

수한이 아무렇지 않게 웃자 서이나의 미간이 제대로 찌푸려졌다. 감정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아니라고는 하는데 아무리 봐도 수한이 장난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 가 볼게요.”

서이나가 곧바로 가려고 하자 수한이 움직이기도 전에 유지영이 먼저 서이나의 앞을 막아섰다. 이런 재미있는 일이 생겼는데 이대로 파하는 건 원치 않았다. 게다가 수한의 연기 실력도 궁금하고. 예상외의 발연기를 보여 준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만요. 이러면 오히려 서이나 씨한테 유리한 상황 아니에요?”

“이게 어떻게 저한테 유리한 상황이죠?”

“서이나 씨, 자신감이 대단해 보였는데 아니었어요?”

“네?”

“저런 풋내기 하나 못 이기겠느냐고요. 서이나 씨가.”

검지로 수한을 가리키며 웃음을 보이는데 누가 봐도 수한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졸지에 풋내기가 되어 버린 수한은 유지영의 말이 맞는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영의 도발은 통하였다. 서이나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면 서이나에게 좋은 기회를 준 거다. 대놓고 서이나를 합격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서이나가 원하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사람을 무엇으로 보고! 내 실력으로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거든?’

자존심 때문에 온 건데 자존심이 도리어 상하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이대로 떠나기에는 아쉬웠다. 무언가 한 가지는 제대로 보여 주고 가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한에게는 소소한 복수라도 하고 가야겠다.

“좋아요. 대놓고 주는 기회인데 그럼 잘 받아먹을게요.”

수한을 바라보는 서이나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눈빛이 지나치게 뜨거워졌다.

“그럼 누가 먼저 할까요?”

유지영까지 자리에 앉고 나자 진지한 분위기가 흘렀다.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자리이기 때문에 지난번처럼 필기구나 물 같은 게 있지는 않았다.

수한이 어떻게 하냐고 서이나를 보자 서이나가 자신 있게 앞으로 나섰다.

“제가 먼저 할게요.”

서이나는 압도적인 연기로 짓밟는 거로 대신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정도는 해야 수한이 자신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에게 이따위 장난질을 하지 않을 거라고 서이나는 굳게 믿었다.

‘사람 간 보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합격시킬 거였으면 떨어뜨리지나 말지, 생각해 보면 이런 게 다 제작사의 갑질이 아닌가 싶었다. 말로만 들은 갑질을 이런 식으로 겪게 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가운데 연기를 제대로 해야 했기에 서이나는 차분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연기 시작하겠습니다.”

서이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빛이 달라졌다. 평범한 10대 소녀라고 하기에는 외로워 보이면서도 씁쓸하며 고독했다. 무리에서 떨어진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 그런데도 강인해 보이는 건 서이나가 의도해서 연기했기 때문이다.

‘원래 해석과 달라지면 어때? 난 이게 더 좋은데…….’

달라진 서이나의 눈빛과 분위기에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감탄사가 일어났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서 서이나는 만족스러웠다. 그 만족감을 기본으로 쌓으며 서이나는 계속해서 연기해 나갔다.

서이나의 강렬한 감정 연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하나같이 서이나에게 빠져들었다. 서이나는 그 가운데 이 현장을 지켜보는 수한을 보았다.

‘그래. 그쪽 보라고 이렇게 연기하는 거라고.’

수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던 서이나는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와 다를 것 없이 시종일관 웃는 수한을 발견하고 놀랐다.

‘뭐지? 왜 웃고 있어?’

서이나의 연기가 만족스러워서 웃는다기보다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라 서이나를 꺼림칙하게 했다. 서이나는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지만, 끝까지 연기해 냈다.

서이나는 무거운 숨을 쉬었다. 씻고 온 보람이 없게 어느새 땀이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서이나는 모호한 얼굴로 심사위원들을 보았다. 그들은 서이나의 예상대로 반응하였다. 한결같이 호평이었다.

“역시 잘하네요.”

“이 역할은 저 아이밖에 할 수 없을 거예요.”

“무엇보다 역할과 나이대가 잘 맞잖아요.”

그들의 눈에는 온통 서이나만 들어왔다. 수한이 어떤 연기를 할지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아니, 그로도 모자라 뒤에서 대기하는 수한이 보이지도 않았다.

서이나는 입가에 비웃음을 달면서도 찝찝함에 속 시원하게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길 거라는 확신은 있어서 기분은 좋았다.

‘애초에 시비는 저쪽이 건 거니까.’

서이나의 이런 표정 변화를 다 지켜본 수한은 현장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기에 유지영이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정돈하였다.

“아직 오디션 안 끝났어요. 연기할 사람 남아있습니다.”

“아! 네.”

이제야 수한을 쳐다보는 탓에 수한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앞에 섰다. 그리고 평소에 내던 진중한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두 번째 참가자, 김수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수한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유지영의 얼굴에 기대의 빛이 스며들었다. 수한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서이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눈빛이었다.

서이나가 무리에서 떨어진 외로운 늑대라면, 수한은 어미를 잃은 새끼 늑대였다.

‘잠깐만, 진짜로 연기하는 거야?’

서이나는 당황해서 시선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서이나의 반응과 별개로 수한은 천천히 호흡을 가지며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뭐야…….’

서이나는 다른 의미로 배신감이 들었지만, 수한의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극적이고 강렬한 서이나의 연기와 비교하면 투박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담백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은 제외했다. 그러면서도 전달해야 할 감정은 정확히 전달하여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강약 조절이 완벽해.’

왜 연기를 안 하고, 캐스팅 디렉터라는 일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한은 좋은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이상입니다.”

수한이 연기를 마치자 저절로 심사위원들에게서 박수가 나왔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아서 그런지 반응은 더 강렬했다.

“김수한 씨가 바쁜 이유가 여기에 있었네요.”

“예전에 연기 공부한 적 있어요?”

“저희가 생각하던 모습 그대로 연기해 줘서 좋았어요.”

수많은 질문에 수한은 어색하게 웃다가 멍하니 서 있는 서이나를 발견하고는 그 앞으로 갔다. 서이나의 표정만 봐도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수한은 굳이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떻습니까?”

수한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서이나를 조용히 지켜봤다. 그래서인지 주변이 다 조용해졌다. 서이나는 어딘가 충격받은 모습을 계속해서 보이더니 많은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나서야 눈을 반짝였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 연기 어땠습니까?”

수한은 단번에 일그러지는 얼굴에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얼굴을 막 써도 너무 막 썼다.

“그래요. 인정한다고요.”

분해 죽겠다는 얼굴인데 어쩐지 즐거워하는 듯했다. 수한이 무엇을 말해 주고 싶었는지 단번에 이해한 모습이었다. 이래서 수한은 천재들을 좋아했다. 한 번 말하면 단번에 알아듣고, 더 좋은 것을 보여 주니까.

“뭐가 문제인지 파악했습니까?”

“네, 완전히요. 제가 부족한 게 너무 많아서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에요.”

인정한 것과 별개로 서이나의 머릿속은 복잡해 보였다. 부족한 것을 토대로 어떻게 피드백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이로써 서이나에게 제대로 빚을 지게 했다. 그러나 수한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럼 다시 연기할 수 있겠습니까?”

“네? 지금요?”

“네, 지금요.”

연기 천재의 한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제안한 거였다. 서이나는 크게 당황했으나, 얼마 안 가 다시 차분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그리고 수한이 했던 대로 바로 호흡을 잡아 감정 조절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면 질투가 안 날 수가 없는데.’

음악 천재는 봤으나, 연기 천재는 시은 이후로 처음 봤다. 그 시은을 봤을 때도 수한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서이나를 보게 되자 질투하는 마음이 올라오기는 했다. 수한이 못 걷는 길에 대한 미련에서 비롯된 질투였다. 더불어 잘못된 것을 바로 고치는 실력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어때요?”

수한은 자신으로 인해 성장한 서이나의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결과적으로 보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재미에 매니저 일을 했다는 게 떠올랐다.

수한은 조금 전에 느낀 것을 다시 상기하는 서이나를 보고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건넸다.

“저는 주연으로 서이나 씨를 캐스팅하고 싶은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야 좋죠.”

“이 연기는 서이나 씨가 아니면 안 돼요.”

일부러 떨어졌을 때의 상처를 거둬 내라고 만든 연출이었다. 다행히 사람들은 수한의 뜻대로 따라 주었다. 그리고 서이나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 보였다.

“저 그러면…….”

“서이나 씨가 괜찮다면 저희 영화 주연 자리를 맡기고 싶은데 어떠세요?”

타이밍을 잘 잡으며 치고 들어온 유지영 때문에 서이나는 당황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야…….”

서이나가 수한을 보자 수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 웃음에 서이나의 마음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주연 자리는 무사히 캐스팅하게 되었다.

“계약은 다음에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하죠.”

“감사합니다!”

감사해야 건 이쪽이지만, 아직 경험이 없는 서이나로서는 첫 작품부터 주연이라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한을 반짝이는 눈망울로 보며 말했다.

“제가 큰 빚을 지게 됐어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나중에 탑스타가 되면 갚을 빚으로 생각하시죠. 지금부터 빚 걱정하기에는 갈 길이 머니까요.”

수한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눈을 가늘게 뜬 유지영이 보였다. 그러나 당장은 서이나가 중요하기에 유지영은 서이나에게 말을 건넸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서이나 씨.”

“저 지난번에 제가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유지영은 서이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 잠시 멈칫하다가 웃어 버렸다. 여기와 일할 기회가 와도 일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설마 서이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건 유지영도 마찬가지였다.

“한 배를 타게 된 이상 당연히 잊어야죠. 물론 속 좁게 다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중에는 그런 사람 없으니 안심하세요.”

유지영의 말에 하나같이 좋은 사람인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유지영과 다르게 수한은 모두를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와 별개로 유지영은 눈에 힘을 주며 수한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김수한 씨, 서이나 씨 가고 나면 저랑 얘기 좀 해요.’

정작 유지영이 의심하는 건 수한이라서 수한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서이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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