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9. 캐스팅 디렉터
소원과는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원이 직접 돈을 들여 카페를 통으로 빌렸기 때문에 남의 눈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 그런 의미에서 수한은 3년간 소원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체감하였다.
‘물론 연예인들에게는 이런 돈이 크지 않겠지만.’
기획사를 차리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는 수한의 처지에서는 돈 한 푼이 더 아쉬웠다. 물론 수한이 몰고 다니는 외제차를 생각한다면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수한의 차가 적어도 수한이 무시 받지 않는 데 한몫했다. 외제차 정도는 몰고 다닐 정도로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 준 셈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수한이 차고 다니는 시계도 명품 시계였다.
그보다 수한이 지금 봐야 할 것은 소원의 눈치였다. 더불어 카페 건너편에서 지켜보는 남자까지.
‘소원 씨의 새로 바뀐 매니저인가?’
처음 보는 얼굴이니 그래 보이긴 했으나, 조금 찝찝하여 수한은 경계를 살짝 올린 상태로 소원을 봤다.
“이해해요.”
처음 매니저 일을 관둔다고 했을 때 들은 말인데 왜 지금은 그 의미가 다르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팬을 만나고 나서인지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글쎄요. 본인 하기 나름이겠죠.”
수한이 말을 얼버무리자 소원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수한은 순순히 결과를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확실히 매니저 일 할 때와는 달라졌어요.”
“달라지기 위해서 매니저 일을 관둔 거니까요.”
확실히 매니저 일을 관둔 수한은 조금 더 자유로웠다. 그 전까지는 무언가 경계를 그어 놓고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 경계를 마음껏 드나들었다.
“그래서 오빠가 투자할 정도로 연기를 잘해요?”
“소원 씨와 마찬가지로 위에서 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탑스타가 될 거라 확신하는 수한의 말에 소원은 시무룩해졌다. 그 말은 소원보다 더 높게 올라갈 거라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가수의 위치와 연기자의 위치가 조금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한은 되도록 소원에게 신비주의 이미지를 씌우려고 노력했다.
“배우가 오래가는 이유는 이미지 소비가 적어서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수한이 싱어송라이터로 소원을 미는 이유와 비슷했다. 남의 손에 좌지우지될 필요 없이 소원이 직접 히트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중요했다.
“맞아. 예진 언니한테 연락 왔는데 영화에 들어간대요.”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이번이 첫 영화인데 걱정 안 돼요?”
“네. 예진 씨라면 잘 하겠죠.”
수한이 계속해서 참견한다면 작품 보는 안목이 늘지 않을 게 뻔하였다. 그런 배려를 알아서인지 소원은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예진과 연을 끊은 이유가 예진을 믿어서라면 소원은 아니라는 소리니까.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소원 씨한테 제가 배우는 처지거든요.”
“그래도 이제는 웬만해서는 혼자 할 줄 아시잖아요.”
3년이 지나도 소원은 여전히 수한의 좋은 작곡 선생님이었다. 덕분에 이제 소원이 없어도 수한은 어느 정도 작곡을 할 줄 알았다. 물론 소원처럼 풍성한 음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본음으로 대중에게 좋게 들리는 노래 정도는 만들 줄 알았다.
소원이 보기에는 수한의 대중적인 감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수한의 능력을 부러워했다.
“제가 얼른 소원 씨께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굳이 빨리 독립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소원이 귀여워서 수한은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 소원이 보내온 곡에 관하여 피드백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조금 더 하이라이트를 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원 씨도 아시다시피 대중들은 귀에 익는 멜로디를 좋아합니다.”
“네, 알고 있어요.”
소원이 보낸 곡 중 몇 개는 소수의 사람이 좋아할 법한 음악이었다. 수한은 그런 곡은 수록곡으로 제안하였다. 소원이 앨범을 내면 줄 세우기를 하기는 하지만, 너무 대중적인 음악만 한다는 평이 있어서 수한은 그 지적을 고려했다.
‘물론 장르가 소원 씨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소원은 수한의 피드백을 열심히 적은 뒤 복잡해진 머리를 달콤한 음료로 달랬다.
“근데 소원 씨 매니저는 어디 갔습니까?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요.”
“매니저가 새로 바뀌어서요. 어차피 오빠 모르는 사람으로 바뀌어서 먼저 가라고 보냈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 수한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소원이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건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게 있다는 말이었다.
“소원 씨 계약 만료 기간이 얼마 안 남았죠?”
“네. 맞아요. 1년도 채 안 남았어요.”
“그렇군요.”
수한은 찝찝해했던 것에 정체를 알게 되어 웃음이 나왔다. 이 인간, 악독해지면 악독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았다. 소원의 옆에 매니저를 둔 게 아니라 감시자를 두었다. 소원으로 인해 돈을 많이 벌었으니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그럼 오늘 나와 만난 이야기도 하겠네.’
캐스팅 디렉터로 일하는 동안 은근하게 방해해 왔던 것을 알기에 수한은 쓰게 웃으며 어떻게 남일에게 엿을 먹여야 할지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소원 씨, 우리 봉사 활동 갔던 거 기억하십니까?”
“아! 네. 기억해요.”
“그러고 보니 가온에 있는 연예인들 데리고 봉사 활동 한번 하자고 실장님과 이야기했었는데 결국 못하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예진 언니도 그거 오래 기다렸어요.”
재원이 있기에 예진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다. 하긴 재원 같은 매니저를 다른 데서 만나기 쉽지 않을 거라 수한은 생각했다. 예진이 어느 정도 계약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한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좋네요. 우리 그러면 날 잡아서 예진 씨도 함께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아요! 언니도 좋아하겠네요!”
예진이 좋아할 거라고 웃는데 보면 소원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혹시 봉사 활동 장소를 저희가 정해도 되나요?”
“네, 좋습니다.”
수한은 카페 너머로 여전히 소원을 감시하는 남자를 보았다. 거기까지도 따라와 줄지 모르겠다. 와 주면 고마운 거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수한은 소원과 헤어지고 돌아가는 길에 이서영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동안에도 꾸준히 관계를 유지한 사이이기에 어색한 분위기는 없었다.
***
“어때요?”
“연기가 언제 또 이렇게 늘었어?”
수한과 약속한 일주일이 되었다. 서이나는 수한과 만나기 전 주어진 대본으로 연기 선생 앞에서 연습하였다. 강렬하면서도 확 닿는 감정 연기에 연기 선생은 희대의 천재를 만났다는 듯이 반응하였다.
“이나야, 성공하면 절대 나 잊으면 안 돼.”
“당연하죠.”
오만한 태도가 문제라고 하였으나, 서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말해 주변에 이런 식으로 칭찬하는 사람밖에 없는데 겸손해지는 게 이상했다.
연기하면 연기할수록 제 것이 되어 가는 역할에 서이나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연기하면 어떨까요?”
“좋지! 감정이 더 와닿아.”
“이 정도면 누굴 상대하든 이기겠죠?”
“물론이지! 연기의 신을 데려오지 않는 한 확실해.”
서이나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수한이 이상적이라고 했던 예진을 떠올리고는 저절로 비웃음이 튀어나왔다. 하다못해 예진을 데려오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
‘그래. 외모로도 내가 꿀릴 게 전혀 없는걸.’
온몸으로 연기 연습을 했기에 땀을 잔뜩 흘렸다. 땀이 옷에 엉겨 붙는 바람에 원래 학원에서 바로 출발하려고 했던 서이나는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제작사로 갔다.
일부러 택시를 타고 왔기에 몸은 한결 가벼운 상태였다. 긴장하지 말라고 청심환까지 건네받았지만, 청심환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에야말로 내 본 실력을 보여 주고 말겠어.’
제작사 건물은 두 번 온 곳이지만,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작은 건물이었다. 누가 신생 기업 아니랄까 봐 참 작았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미련 두지 않는 건데.’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연기로 수한의 코를 납작하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서이나는 당당하게 턱을 세우며 제작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도 느꼈지만, 대표가 감각이 있기는 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좋은 향이 나 적어도 방문자에게 냄새로 불쾌감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인상을 주면 줬다.
한 계단 위로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지영이 서이나를 반가워했다. 지나치게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는 탓에 서이나는 자신이 유지영과 약속을 잡았나 잠시 착각했다.
“저기 김수한이라는 분과 약속이 있는데요.”
“알고 있어요. 지난번에 오디션 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지난번에 말을 밉게 했는데도 개의치 않아 해서 서이나는 내심 안도했다. 사실 말을 그렇게 내뱉고 갔어도 마음에 걸리긴 했다. 더불어 그렇게 했다니까 부모님께 혼나기도 했고.
“어서 오세요.”
서이나는 수한을 보자마자 의문이 그려졌다. 정장 차림이었던 지난번과 다르게 편한 얇은 티 하나와 청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옷을 다르게 입으니까 어려 보였다.
“와, 김수한 씨.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겠네요?”
“제 목표는 조금 더 어리게 보이는 거였지만, 역시 얼굴은 어떻게 할 수 없겠죠?”
대학생보다 조금 더 어리다면 고등학생을 말하는 건데 서이나가 보기에도 그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서이나는 대결 상대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어디 있지?’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디션 현장에는 수한과 유지영, 그리고 서이나가 다였다. 대놓고 두리번거리는 탓에 수한까지 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 찾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랑 연기 대결할 사람이요.”
그 말에 유지영도 궁금해졌는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러고 있으니 조금 모양새가 웃겼다. 수한이 대놓고 시원한 웃음을 보이자 서이나는 인상을 찌푸렸고, 유지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의문을 보였다.
“그 대결하는 상대는 언제 오는데요?”
“누구예요? 그건 저한테 말 안 해 줬잖아요.”
그와 함께 오디션장의 문이 열렸다. 세 사람이 문을 보자 오디션 심사를 같이 봤던 사람들이 보였다. 수한은 그들을 향해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뒤 심사위원 자리에 앉혔다. 그들은 유지영과 다르게 연기 대결할 상대를 아는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저, 김수한 씨?”
“저기요. 이렇게 늦는 거면 이미 탈락한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예민해진 상태인데 대결할 상대가 보이지 않자 서이나의 예민도가 올라갔다. 수한은 그런 서이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니요. 늦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이나 씨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유지영은 대결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은 얼굴이었지만, 서이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수한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 대결 상대가 바로 접니다. 서이나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