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9. 캐스팅 디렉터
랜드마크이다 보니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보지 않는 사각지대는 있었다. 수한이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가자 서이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따라갔다.
“그래서 제가 탈락한 이유가 뭐예요?
“그 생각이요.”
“네?”
서이나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며 인상을 찌푸리자 수한은 서이나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웃었다. 그 웃음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이상하게 나쁘지 않아 서이나는 신기해했다.
서이나가 당황한 사이에 수한은 자신이 본 서이나의 연기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대에 서이나 씨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서이나 씨가 20대가 되어도 마찬가지겠죠. 서이나 씨의 연기는 감정이 굉장히 강렬해서 보는 사람에게 좋은 몰입도를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면에서 보면 더 좋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본 게 있어서 미래의 일을 곁들였다. 지금의 서이나에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수한은 한때 그녀의 팬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연기자로서 성공하는 모습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심 비슷한 것을 가졌다.
“잠깐만요. 그거 다 칭찬이잖아요.”
“네, 칭찬입니다.”
서이나는 이걸 뭐라고 받아야 할지 들여야 할지 몰랐다. 생각 때문이라면서 또 연기에 대한 칭찬은 엄청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의문만 생기고, 의문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저기요, 말을 똑바로 해줘야 제가 들을 거 아니에요?”
단순한 성격답게 서이나는 팍 질러 버렸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10대다운 모습이었다. 수한은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으나, 그건 단순히 수한이 서이나에게 호감을 품었기 때문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서남일이 날 볼 때 그랬으려나.’
수한에게 전혀 호감을 품지 않았으니 수한이 하는 일이 다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고 수한은 남일을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하는 패악질이 들려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으니까.
아무튼, 서이나의 이런 태도는 그녀의 행보에 있어 결코 좋을 게 없었다. 이러한 태도가 연예계로 나가 실컷 깨지면서 고쳐질 거라 생각하니 쓴웃음이 먼저 나왔다.
“서이나 씨는 오디션을 보며 한 번도 떨지 않았습니다.”
“네, 맞아요.”
“왜 그랬죠?”
“제가 합격할 거라고 자신했으니까요.”
그건 지금도 바뀌지 않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제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나오는 당연한 행보였다. 그러나 수한은 그게 원인이라는 것처럼 서이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설마 그거라고요?”
“그것도 그 마음에서 비롯된 거겠죠. 오만.”
“잠깐만요. 그러니까 제가 오만해서 떨어진 거라고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서이나가 황당해야 할 차례였다. 실력만 있으면 됐지, 고작 그런 이유라니까 이해가 안 되었다. 서이나가 들은 탑스타 중에는 거만한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그게 문제라면 그들은 어떻게 탑스타가 되었단 말인가?
“이해가 안 돼요.”
“제 기준이니까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정도면 답이 되었죠?”
수한이 그럼 가 보겠다고 말하며 등을 돌리자 서이나는 억울한 마음이 치솟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떨어졌다는 게 믿기지도 않았고,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수한을 다시 붙잡게 되었다.
“저기요!”
“네, 서이나 씨.”
수한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평온한 얼굴을 하자 서이나는 오기가 생겼다. 오만한 마음으로 오디션에 참가했던 건 인정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고작 그거 하나로 떨어졌다니까.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과연 연기만 잘한다고 되는 걸까요?”
“네?”
“서이나 씨가 연기를 잘하는 건 인정합니다. 그래서요?”
흥분한 서이나와 다르게 수한은 차분하게 감정을 정리하며 말을 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 공격적으로 와닿았다.
“네?”
“연기만 잘한다고 주연을 맡을 거면 지금 탑스타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야 할 겁니다.”
그 말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조연 역할을 하는 사람 중에 주연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그 반대가 많을까? 당연히 조연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연이 되지 못하는 건 모자란 게 있어서였다.
“그게 오만한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서이나 씨, 여기까지입니다.”
“네? 뭐가요?”
“저는 서이나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제게 이런 식으로 따지면서 이유를 묻는 건 여기에서 그만두십시오.”
기본적으로 다정한 성격이나, 정해진 선이 있다. 서이나는 그 딱 자르는 선을 이제야 인식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사실 이 정도면 수한도 최선을 다해 서이나를 상대한 거였다. 서이나가 욕심이 안 나는 건 아니지만, 수한으로서는 서이나가 간절하지는 않았다.
서이나의 매니저도 아닌데 서이나가 조금 더 쉬운 길을 갈 수 있게 안내하는 건 수한의 일이 아니었다.
서이나가 지금 당장은 수한을 미워한다고 해도 나중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연예계는 수한만큼의 친절도 베풀지 않을 정도로 삭막하고 돈밖에 모르는 곳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나길 바랍니다. 서이나 씨.”
수한은 그 말만 하고 가려고 했다. 수한이 무의식적으로 던진 미끼를 서이나가 물지 않았으면 아마 그대로 가서 소원을 만났을 거다. 그러나 서이나는 미끼를 물어 버렸다.
“그럼 관계가 있는 사람이 되면 되겠네요. 어차피 저는 미래의 탑스타가 될 거니까 미리 빚을 만들어 놓는다고 생각하세요.”
자신감이 넘치는 그 발언에 수한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수한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미래에서 봤던 서이나는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사람이었다. 그 자존감이 어리다고 해서 낮을 리가 없었다.
“왜 제게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서이나도 동감하였다. 왜 수한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서이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건 서이나의 강한 운이 작동한 거였다. 친척이 말한 대단한 사람이 수한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동한 결과가 되었으니까.
다른 것보다 서이나는 왠지 이 기회를 놓치면 죽어라, 고생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수한을 붙잡게 되었다.
수한 또한 좋은 기회가 왔는데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미래의 탑스타가 스스로 빚을 만들어놓겠다는데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서이나 씨가 제가 말한 것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다면 빚이 아닌 거로 합시다. 괜히 어린 사람 등쳐 먹는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요.”
“좋아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물론 그 빚을 어떤 식으로 갚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서이나는 수한이 하는 말이 개소리라면 절대로 빚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오디션 기회를 한 번 더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서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신나서 대답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수한이 뭔데 오디션 기회를 함부로 준다, 만다 하는 것인가? 그 의문에 대답하듯이 수한은 곧장 핸드폰을 들어 유지영의 이름이 입력되어 있는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혼자 보는 게 아닙니다. 경쟁 상대가 있습니다.”
“경쟁 상대요? 그게 누구인데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 사람과의 연기 대결에서 이기면 합격하는 거로 하죠.”
“좋아요.”
수한은 서이나의 순진함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는 무조건 좋다고 해야 하는 게 아니다. 만약 수한이 연기의 대가라도 데려오면 어쩌려고 저렇게 다 좋다고 하는지. 만약 여기서 수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서이나는 고생을 어마어마하게 했을 거다. 아니, 이미 미래의 서이나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서이나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한은 곧장 유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김수한입니다.”
[또 전화하셨네요. 아까 그 전화는 뭐였어요?]
“오디션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 참가자가 있어서요. 그 참가자가 저한테 와서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하네요.”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지영은 듣자마자 그 참가자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재미있게 받아들였는지 흥미로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요? 기회 주려고요?]
“네. 대표님도 아까워하셨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을까요?”
[뭐. 그런 거 하라고 김수한 씨를 데려온 거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믿어 주시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하겠습니다.”
수한이 전화를 마치고 서이나를 보자 지나치게 반짝이는 눈망울이 보였다. 오디션 현장을 가다 보면 이런 눈빛을 많이 보게 된다. 수한은 그때마다 눈동자들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너머에 있는 열정들이 하나같이 빛나고 멋졌다.
‘이러니까 다시 매니저 일을 하고 싶네.’
아직도 수한에게 지금의 시간이 당분간의 시간이지만 말이다. 이런 보석들을 발견할 때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한이 명함을 건네주자 서이나는 쓰여 있는 직함을 의아하게 봤다.
“캐스팅 디렉터예요?”
“네. 프리랜서입니다.”
그제야 수한이 어떤 자격으로 서이나를 떨어뜨린 건지 이해가 되었다. 서이나가 소중하게 명함을 잡아서 가방에 넣자 수한이 핸드폰을 들며 말했다.
“기간은 그리 많이 주지는 않을 겁니다. 일주일입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볼 수 있어요. 대사 다 외웠거든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사만 외운다고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서이나 씨도 알고 있잖아요.”
서이나는 가만히 서서 눈을 연신 깜빡였다.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는 말을 해서 놀랐다.
수한이 따로 연락하겠다는 말만 하고 떠나려고 하자 서이나가 다시 수한을 붙잡았다. 수한이 또 할 말이 있느냐고 쳐다보자 이제는 서이나도 민망해졌다. 도대체 몇 번째 붙잡은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 진짜 마지막으로요. 어떤 배우의 연기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세요?”
수한은 그 질문을 듣기가 무섭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연기를 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연기자로서 대중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다. 누군가는 왜 그 사람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수한으로서는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성예진 씨요.”
당연히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배우들의 이름이 나올 줄 알았기에 긴장했던 서이나의 표정이 단번에 풀렸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성예진이라 한 것 같은데요?”
“잘못 들은 거 아닙니다. 제대로 들었습니다. 현재 제게 이상적인 연기자는 성예진 씨입니다.”
수한은 일그러지는 서이나의 얼굴을 보며 그래서 그녀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진이 얼마나 노력파인지 모르니 저러는 거다. 수한은 더불어 시은의 이름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저 상태로 준비하게 하는 게 낫겠지.’
그래야 깨달음이 커질 테니 말이다. 수한은 그럼 일주일 후에 보자고 하는 서이나의 인사를 웃으면서 받아 주었다. 그러다가 미친 듯이 온 전화 수에 깜짝 놀랐다. 소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팬 사인회 현장으로 돌아가니 이미 팬 사인회는 끝난 후였다.
‘이걸 또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소원과의 약속에 자주 늦게 되는 수한이라서 수한은 죄인이 된 심정으로 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