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9. 캐스팅 디렉터
서이나는 자신감 넘치게 턱을 세우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합격 결과를 오디션이 끝난 후에 알려 준다고 하니 기다리는 거였다. 서이나는 긴장하여 몸이 바짝 굳은 참가자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는 여자 주인공을 뽑는 자리였다. 그 합격자가 자신이 될 테니 긴장 안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뻔하지.’
원래는 이 오디션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친척 중 한 명이 이 회사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대표가 능력자인데다가 대단한 사람이 붙어서 반드시 성공한다고 했어.’
그 대단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하도 확신하며 말하는 탓에 서이나까지 동요했다.
‘합격자는 분명 나야.’
현장 분위기만 해도 그랬다. 서이나의 연기를 모두가 인정해 주었다. 서이나는 흡족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던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뿐인가? 얼굴도 예쁘게 생겨 누가 봐도 연예인을 해야 할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자신보다 나은 참가자는 없었다.
“그 심사위원 중에 왼쪽 구석에 있던 남자 말이야. 어딘가 낯익지 않아?”
주인공 한 명을 뽑는 오디션인데도 친구끼리 보러 오는 경우가 있는지 친근하게 나누는 대화에 이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그 남자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졌다. 이제까지 오디션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편한 느낌을 주는 심사위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
일반인치고는 잘생기기도 해서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게다가 서이나가 연기할 때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어서 서이나는 더욱더 자신이 합격할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서이나는 자리를 지키며 어서 제 이름을 불러 주기를 바랐다.
“죄송합니다. 오늘 합격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말에 서이나는 다른 의미로 흥분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자신이 있는데 합격자가 없단 말인가?
“말을 잘못 전달받은 건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른 작품으로 좋게 인연을 맺기를 바랍니다. 모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가는 길에 오디션비 드릴 테니 다들 받아 가세요.”
따로 돈을 준다는 말에 잔뜩 실망했던 참가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오디션비를 준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본인이 원해서 온 게 아니냐는 식으로 함부로 대하는 곳이 더 많았던 탓이었다. 그러한 대우는 무명 배우들이 흔히 겪는 서러운 일화 중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훈훈해진 상태로 나가는 가운데 불만이 있는 건 서이나뿐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떨어졌다고?’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니까 더 많은 기회가 있기는 할 거다. 그렇다고 해도 서이나의 현재 감정 상태는 분함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서이나가 현장을 떠나질 못하자 때마침 나오던 유지영이 서이나를 발견했다. 유지영이 아까워할 정도로 좋은 연기 실력을 지녀 미래가 기대되었기에 유지영은 호감을 먼저 품으며 말을 건넸다.
“연기 잘 봤어요. 연기력이 워낙 좋아서 다른 좋은 기회가 있을 거예요.”
유지영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나, 서이나의 귀에는 그것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제 마음이 더 중요한 나이였다.
“글쎄요. 이 회사와 하게 될 기회가 생겨도 제가 거절할 것 같아요.”
같이 하자는 말을 한 적이 없기에 유지영은 황당하게 서이나를 보다가 결국 웃어 버렸다. 그 웃음이 기분 나빴는지 서이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상황은 달라지는 게 없었다.
서이나는 그대로 인사도 없이 다른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나가 버렸다. 물론 나가는 길에 오디션비를 받아가는 건 잊지 않았다.
“어리니까 저럴 수도 있구나.”
“자기가 왜 떨어진 건지 이해가 안 되면 저럴 수 있죠.”
갑자기 끼어든 수한의 모습에 유지영은 피식 웃어 버렸다. 솔직히 말해 유지영이 보기에도 서이나가 아깝긴 했다. 지금도 살짝 미련이 있을 정도로 서이나는 연기 실력이 좋은 아이였다. 그러나 탈락 이유를 적극적으로 피력한 수한 때문에 결국 탈락시키기로 했다.
“김수한 씨, 이 일 책임질 수 있는 거죠?”
“네. 책임질 수 있습니다.”
수한이 자신 있게 웃으면서 말하자 유지영이 알겠다며 서이나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미 인연이 아니게 된 거 미련을 둬서 뭐 하겠는가?
“그럼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유지아 작가님께는 따로 안부 전한다고 전달해 주세요.”
“프리랜서가 되니까 더 바쁘네요. 지아는 요즘 새 작품 쓰느라 바빠서 저도 요즘 못 보고 있지만, 만나게 되면 잘 전달할게요.”
“하긴 3년 사이에 인기 작가가 되셨으니까요. 이해합니다.”
‘로맨스는 없었다’가 크게 성공하면서 ‘로맨스 연대기’는 폭삭 망해 버렸다. 엘 엔터테인먼트의 과한 욕심이 ‘로맨스 연대기’를 완전히 망쳐 버렸다. 더불어 두 작품이 어딘가 비슷하다는 표절 논란이 생겼고, 음성 파일을 공개하기도 전에 최민희 작가가 자폭해 버려서 유지아 작가의 가치가 올라갔다.
‘그때 작품상을 탔었지?’
더불어 그 작품으로 시은도 연기력을 크게 인정받아 최우수 연기상을 타게 되었다. 그때 수한은 자신의 이름을 수상 소감에서 들을 줄 몰랐기에 굉장히 깜짝 놀랐고, 기뻐했다. 시은뿐만이 아니라 다른 연예인들의 수상 소감 속에서도 수한의 이름이 나와 수한은 감사함과 더불어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유지아 작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이어서 ‘네잎클로버’까지 성공시켰다. 그런 이유로 시청자들이 차기작을 기대하는 작가 중에 한 사람으로 뽑히게 되었다.
“다음 오디션 일정 정해지면 연락 주십시오.”
“네, 알겠어요.”
수한은 가기 전에 통화 하나만 더 하고 가기로 했다. 오디션 도중 갑작스럽게 소원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김수한입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저 팬 사인회 시간이 길어져서요. 약속한 시각보다 늦어질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 그러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메일로 주고받으며 음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직접 말하는 게 편해서 수한은 직접 현장 근처로 가기로 했다. 아직 소원이 가온 엔터테인먼트와 계약 중이기 때문에 수한은 겸사겸사 가온 사람도 만나서 인사하기로 했다.
수한은 주차장으로 가려다가 아직 제작사 건물 근처에 있는 서이나를 발견했다.
‘아직 안 갔네.’
아직 어려서 감정 정리가 쉽게 되지 않는 듯했다. 그 연기 실력으로 탈락했으니 어지간히 분했으리라. 수한은 서이나를 합격시켜 주고 싶어 했던 유지영을 알기에 괜히 독박을 쓰게 한 느낌이라 일부러 핸드폰을 들어 유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김수한 씨. 현장에 뭐 놓고 간 거 있어요?]
“저 김수한입니다. 유지영 대표님.”
[네, 김수한 씨인 거 이미 알고 있는데요.]
“제가 아까 너무 제 고집만 부린 게 아닌가 싶어서 사과드리려고요.”
수한이 흘긋거리며 서이나를 보자 서이나가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 누가 봐도 엿듣고 있다는 표정에 수한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좋은 연기 실력과 별개로 감정이 솔직하게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아깝긴 해도 사과받을 정도는 아니에요.]
“저도 서이나 그 친구가 아쉽긴 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역할에 적합하지 않는데…….”
[네?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그럼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수한은 전화를 끊고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뒤에서 강한 시선이 느껴지는데 수한은 그 안에서 분노의 감정도 느꼈다.
‘성격이 되게 단순하네.’
탑스타 서이나에 대한 환상이 어느 정도 있었기에 조금 깨긴 했다. 그러나 저 나이라면 저러는 게 당연했다. 수한은 무너진 환상을 다시 주워 담으며 웃었다. 저 상태도 나름대로 귀여웠다.
그런 수한과 반대로 서이나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아니, 어떻게 이래?’
조금 전에 전화 통화를 통해 수한 때문에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연기를 보면서 그렇게 만족스럽게 웃고는?’
서이나는 눈에 힘을 주며 수한을 노려보다가 그가 끌고 나가는 외제차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차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해도 좋은 차는 외관부터 달랐다. 특히나 서이나는 잘사는 집 딸이라서 그런지 더 분함을 느꼈다.
‘어디 두고 보자고.’
서이나는 오늘 일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중에는 이런 일이 쌔고 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현재로서는 경험이 없어 그 사실을 잘 몰랐다.
서이나는 분노를 온몸으로 드러내며 걷다가 친구에게서 온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원 언니 팬 사인회!’
서이나가 오랜 소원 팬이라는 걸 안 친구가 팬 사인회에 당첨되면서 서이나를 위한 사인을 받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생각한 것보다 더 일찍 끝난 오디션에 서이나는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조금 전에 받은 오디션비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서이나도 몰랐다.
팬 사인회는 서울 도심에 있는 랜드마크에서 했다. 공개 팬 사인회이기 때문에 굳이 팬 사인회 당첨자가 아니어도 현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람 되게 많네.’
날이 갈수록 소원의 인기가 많아지면 많아졌지, 적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요즘에는 남자 연예인의 이상형으로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콘서트 한다고 하면 반드시 가야지.’
이럴 때 잘사는 집 자식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집이 잘살지 않았다면 연기자의 꿈은 꾸지도 않았을 거다. 집안에 여유가 있으니 서이나의 꿈을 밀어주는 거였다. 게다가 연기까지 잘하니 집안에서는 더욱더 안 밀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그 망할 오디션을 봐 준 거라니까?’
가족의 힘을 빌리면 큰 배역에도 떡하니 붙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서이나가 오디션을 본 이유는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자존심 세우기였다. 그러나 수한 때문에 떨어졌으니 그녀의 잘난 자존심이 구겨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 나네.’
백 퍼센트 합격할 거라 믿었는데, 그래서인지 자꾸 미련이 갔다. 게다가 역할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내가 합격했을 거 아니야.’
서이나는 계속해서 그 현장을 떠올리며 걷다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소원을 발견했다.
‘천사다!’
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며 어찌나 예쁘게 웃어 주는지 서이나는 사랑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면서 흐뭇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러다가 반대편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을 발견했다.
‘아니! 저 사람은!’
서이나를 오디션에서 떨어지게 한 그 남자다. 김수한. 서이나는 수한의 이름을 벌써 외웠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꼴에 소원 언니 팬이었어?’
서이나 못지않게 수한은 흐뭇하게 소원을 보고 있었다. 아니다. 오디션 현장에서도 수한은 저 모습으로 참가자들을 보았다. 그래서 서이나는 크게 배신감을 느꼈다.
눈앞에 천사가 있음에도 서이나는 성큼성큼 수한에게 다가갔다. 안 물어보고 싶어도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기요.”
“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서이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다. 물론 수한보다 더 잘생긴 사람도 많지만, 이상하게 반감이 드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주변에서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소원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저 사람은……?”
수한이 아차 싶어 몸을 돌렸지만, 이미 소원의 팬들은 수한을 알아봤다. 그야 모를 수가 없었다. 소원과 관련되어서 갖은 미담을 쏟아낸 매니저가 바로 수한이다. 거기다가 소원이 가장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준 사람이라 소원의 팬이라면 수한에게 하나같이 고마운 감정을 가졌다.
수한이 몸을 빼내기 위해 가려는데 누군가 수한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의문을 가질 것도 없이 서이나가 강렬하게 수한을 보았다.
“저, 알아야겠어요.”
“서이나 씨가 탈락한 이유 말이죠?”
“네. 맞아요.”
“좋습니다. 그전에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네요. 지금은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그 말대로 수한을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서이나는 자존심이 또 한 번 구겨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먼저 앞으로 가는 수한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