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8. 과도기
“뭐?”
성민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수한은 농담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성민을 보며 웃기만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웃음이었다.
“진짜야?”
“네. 안 그래도 언제 말씀드려야 할지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겼네요.”
성민은 잠시 멍하게 수한을 봤다. 물론 이 일이 힘들어서 나가는 사람이 많기는 했다. 그래서 수습 기간을 더 특별하게 두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 수한이 들어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지.’
사실은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처음 남일이 수한을 적대했을 때부터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이 오지 않기를 누구보다도 성민이 더 간절하게 바랐다.
“수한아.”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거든요.”
수한이 웃으면서 말하자 성민은 더 크게 절망하였다. 이제까지 함께 일한 매니저가 많기는 했으나, 수한만큼 성민의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섭섭한 감정이 커졌다.
“엘 엔터 조건이 그렇게 좋아? 옮길 마음이 들 정도로?”
“조건이 나쁘지 않기는 한데 좋은 건 아닙니다.”
“근데 왜?”
“아니, 이직이 아니라 퇴사라니까요.”
성민은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는 더 놀라서 물었다. 이건 더 최악의 상황이 아닌가?
“너 매니저 일 그만두려고?”
“당분간은요.”
수한은 넋이 나간 성민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설마 수한이 매니저 일을 그만둘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기에 나온 모습이었다. 그러나 수한은 여지를 두기는 했다.
당분간이라는 단어로.
“당분간이라면 다른 일을 할 거라는 말이잖아.”
“네. 그래도 이 업계에서 일할 거니까 우연히 마주칠 수는 있겠죠.”
성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수한의 재능은 매니저 일에만 적합한 게 아니었다. 캐스팅 디렉터에도 적합한 재능이 있다. 그리고 또 찾으면 많은 직업군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했던 것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좋아. 어디서 만나든 놀라지 않으마.”
남일이 아니었으면 성민은 열심히 수한을 설득해서 붙잡았을 거다. 그러나 남일이 있기에 붙잡을 수 없었다. 대표를 물러나게 하려면 반란뿐인데 성민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오히려 반란 세력을 진정하게 하면 했지, 반란군의 수장을 할 그릇은 아니었다.
“일단 그 전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행에서 시작해서 성민이 하고 싶어 하는 취미 생활이 수한의 버킷리스트에 적혀 있었다. 성민은 그중에서 배낭여행이 가장 당겼다.
‘나도 그냥 퇴사나 하고 놀까.’
성민의 퇴사 욕구까지 자극하는 목록에 수한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역시 모든 직장인의 꿈은 퇴사였다. 퇴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수한의 수명은 벌써 한 시간이 늘었다.
“후임자가 올 때까지는 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되면 후임자가 늦게 와야 할 텐데 수한이 남일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니 그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나마 이 상황이 나은 건 남일이 수한의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딱히 후임자가 들어올 때까지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거였다.
성민은 처음으로 남일을 원망하고 또 원망하였다.
‘가족만 아니었어도 나도 퇴사했다.’
가족 회사는 둘 중에 하나라고 한다. 경영진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충 회사에서 다니거나, 가족이라서 더 뼈 빠지게 일하거나. 당연히 성민은 후자였다.
속 시원하게 말은 했지만, 성민이 얼마나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알기에 수한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아니다. 네가 좋으면 됐지 뭐.”
말과 다르게 속은 썩어 문드러졌지만, 수한을 더 감싸 주지 못한 게 컸기에 성민은 나가기 전에 술이나 먹자며 수한을 반대로 달래 주었다. 과연 수한이 회사에 미련을 가지게 한 상사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잡일은 다 저 주시면 됩니다!”
수한이 자신감 있게 외치자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들이 보이면서 수한의 속을 후련하게 하였다. 수한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성민은 얼른 자리로 보내 일을 시켰다. 그보다 이제 수한이 걱정하는 건 함께 일했던 연예인들이었다.
‘특히나 걸리는 건 소원 씨인데…….’
수한 때문에 가온 엔터테인먼트에 온 것이니 수한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로 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
“이해해요.”
“이해해.”
동시에 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수한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수한은 원래는 소원만 보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현장에 예진이 진입하면서 수한은 두 사람 모두에게 사과하게 되었다.
수한이 살짝 불만스럽게 예진을 보자 그 시선의 의도를 파악한 예진이 먼저 말했다.
“왜 난 안 보려고 했어?”
“아닙니다. 따로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수한의 빠른 대답에 예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예진과 별개로 소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해한다는 말과 다르게 마음은 안 그럴 테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 일도 관둔다고 했다며?”
“네. 당분간은 백수 생활을 즐기려고 합니다. 별개로 재원 선배님 입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해 달라고 했어. 따질 거면 나한테 따져.”
어서 따져 보라는 듯이 턱을 올리는 예진의 모습에 수한은 할 말이 많았지만, 참기로 했다. 어차피 당분간 보지 못할 테니까 굳이 싸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 수한을 소원이 신기하게 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되게 사이가 좋은 것 같아요.”
“그렇지?”
“그럴 리가요.”
빠르지만, 상반되는 대답에 예진의 눈꼬리가 올라갔지만, 수한은 못 본 척하며 소원에게 미안해했다.
“그래도 매니저 일을 하는 건 아니라니까 안심은 돼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긴 우리 버리고 가서 다른 연예인 돌보고 있으면 짜증 나지.”
수한이 몇 번이나 참을 인(忍)을 그리다가 어딘가 위화감이 들어 시선을 살짝 멀리했다. 그러자 예진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원만큼이나 섭섭한 데 티를 안 내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여러분이 방송에 나오면 잘 챙겨 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락은 안 할 거야?”
“입에 발린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긴 그렇네.”
회사를 그만두면서 회사 사람과 연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예진이 연예인이기 때문에 수한은 괜히 말이 나오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수한은 새침하면서도 정감 있게 말하는 예진을 보며 웃었다. 소원만큼이나 예진과도 정이 들어서 따로 찾아가려고 했던 건 진짜였다. 그 말을 예진은 안 믿었지만 말이다.
“그래. 잘 지내.”
“아직 후임자가 들어오려면 멀었으니 바로 가는 건 아닙니다.”
“그래. 잘 지내.”
“와, 너무하시네요.”
“이게 마지막은 아니잖아. 그렇지?”
어딘가 미련이 있어 보이는 얼굴에 수한은 이것만큼은 흔쾌히 말할 수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같은 업계에서 일한다고 해도 다 마주치는 것도 아니지만, 예진이 그리 말하니 정말로 현장에서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원 씨는 제가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네?”
“농담이야. 그럼 잘 지내.”
농담이 아닌 것 같았지만, 소원에게 따로 할 말이 있기에 수한은 예진을 먼저 보냈다. 다행히 재원이 어떻게 약속을 안 건지 몰라도 예진을 데리러 와서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다만 수한은 두 사람을 보내기 전 재원을 힘껏 노려봤다. 재원도 찔리는 게 있는지라 몸을 움츠려서 그나마 수한의 마음이 나아졌다.
차에 타자 소원과 단둘이 되었다. 수한이 곧장 시동을 걸지 않자 소원이 의아해하며 수한을 봤다.
“소원 씨께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한은 소원이 욕을 한다면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소원이 묻는 건 뜻밖에 내용이었다.
“저하고도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요. 소원 씨는 예외입니다. 우리 프로젝트 에이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에이치로 활동하시려고요?”
소원의 눈이 커지면서 흥분된 얼굴이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작곡가 에이치가 하는 활동의 십 분의 구는 소원이 하는 거다. 수한이 하는 일은 그저 나머지 1을 채워 주며 방향성을 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저리 반응을 보이니 수한은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도 하고, 이것저것 해 볼 생각입니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조금 전에 우울해하던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소원은 금세 신난 얼굴이 되었다. 그야 당연했다. 소원이 수한에게 원한 게 이런 거였으니까.
가온 엔터테인먼트가 중소 기획사이다 보니 수한이 소원에게만 집중하기에는 부족한 환경이었다. 소원이 원한 건 1대1로 자신만 담당하는 거였으니 실망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했으니까. 그나마 수한과 작곡을 함께 하면서 그 불만이 해소되었던 상태였다. 그러나 수한이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작곡가 에이치 일을 함께한다고 하니 소원에게 이보다 신나는 일이 없었다.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인 거 아시죠?”
“알죠. 절대로 비밀 지킬게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소원은 입을 지퍼로 잠그는 시늉까지 했다. 그 몸짓이 귀여워서 수한은 웃으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근데 막상 보고 나니까 언니한테 많이 밀리시네요.”
“언니라면 예진 씨요?”
“네.”
소원의 앞에서는 늘 당당한 수한이 예진의 앞에서는 쪼그라드니 기분이 묘했다. 귀여운 것 같으면서도 불쾌감이 없지 않아 들었다. 예진 앞에서만 편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렇게 보여도 마음이 여린 분이라서 다 맞춰 줘야 합니다.”
“그건 인정해요.”
그러나 결국, 승자는 소원이었다.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한 예진과 다르게 소원에게는 연락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더불어 하던 일도 계속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오빠.”
수한은 소원을 집에 데려다준 후 곧장 다른 곳으로 차를 돌렸다. 원래 이런 식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수한은 회사 차를 개인적인 용도에 사용하였다. 물론 핑계는 고주혁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거였다. 성민은 알면서도 눈 가리고 아웅 하며 봐주었다.
‘어차피 퇴사해서 나갈 놈이니까.’
이게 퇴사하는 사람의 특권이 아닐까 싶었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수한은 가온에서 내준 숙소로 차를 몰고 갔다.
‘확실히 다르긴 하네.’
“수한 형!”
미리 연락했기에 기다리고 있었는지 고주혁이 빠르게 뛰쳐나왔다. 수한은 그 일이 있었던 후로도 여전한 고주혁의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미안해했다. 다 자신의 탓 같았다.
“그게 왜 형 탓이에요? 아니에요. 왜 하필 또 미성년자야. 아니었으면 제대로 벌 받게 했을 텐데.”
고주혁은 능글맞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겼다. 그게 방어 기제라는 걸 알면서도 수한이 할 수 있는 건 다음에는 절대 봐주지 말자고 다독여 주는 것뿐이었다.
“형, 기획사 차리면 바로 연락해요.”
“네?”
“위약금 내고서라도 형 기획사에 갈 거니까요.”
말만 해도 든든했다. 수한이 진심이냐고 쳐다보자 고주혁은 허세가 가득한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안 본 사이에 래퍼와 친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 몸짓이 고주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네, 물론이죠. 절 키운 건 형인데 의리를 버릴 수는 없죠.”
수한은 순간 울컥했다가 울지 않기로 했다. 더 높게 날아오르게 하는 것으로 보답하면 되니까. 그러면서도 이 순간을 잘 견디는 고주혁이 기특해서 웃음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정적인 회사를 차리면 그때 고주혁 씨께 손을 내밀겠습니다.”
“좋아요.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수한은 그 뒤로도 지훈과도 따로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시은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바빠 전화로 안부를 전하였다. 지훈은 수한과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저도 매니저님처럼 이 회사에서 나가려고요.”
결국은 일어났던 일이 되풀이되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이지훈이라는 미래의 탑스타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김수한이라는 미래의 거물이 될 사람도 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