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8 8. 과도기
“수한아,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서…….”
“내가 틀린 말 했나?”
성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일이 말을 끊었다. 자신과 다른 게 대체 뭐냐며 따지는 모습에 수한은 말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수한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 연예인들의 상황을 이용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따진다면 수한도 뭐라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수한과 남일의 차이라면 그저 당사자의 허락을 받고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였다. 그 당사자가 나중에 수한을 원망한다면 수한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그 말을 남일에게 들으니 그건 자기 정당화하려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 짧은 의심을 남일이 파고들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내게 따질 수는 없는 거야.”
성민이 듣기에는 개소리지만, 수한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성민은 아무 말도 못 하는 수한의 모습에 싸한 느낌이 들어 안절부절못했다.
“대표님도 그만하세요. 이게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내가 대체 뭘 했다는 거지?”
성민은 할 말이 많았다. 한 기획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말단 직원과 이런 식으로 입씨름하는 게 말이 된다고 보는지 묻고 싶었다. 성민이 어떻게 해 보려고 수한을 보자…….
“그럼 실례했습니다.”
수한이 대표실에서 나가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아 다행인 일인데 성민은 남일이 짓는 승자의 미소가 달갑지 않았다.
“좋습니까?”
“그래, 좋지. 왜? 불만인가?”
“네.”
남일에 대해서는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를 존경하게 된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수한과 엮이게 되면 이토록 실망할 일만 생기게 된다.
성민의 부정적인 감정이 남일에게도 닿은 것인지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올라왔다.
“설마 김수한 때문에 내게 이러는 건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네요.”
성민은 그 말을 끝으로 대표실에서 나왔다. 대표실 안에서는 책상을 쿵 하고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성민은 못 들은 척하며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수한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성민이 오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한이 제대로 동요했다. 그게 이상하게 좋지 않은 예감을 안겨 주었다.
***
“그럼 수고하세요.”
딸랑딸랑. 편의점 문이 닫히면서 종소리가 울렸다. 수한은 걸어가면서 추워진 날씨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집이 있는 골목 근처로 가자 곳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한은 그 사람들을 피해 걸어가다가 담배 비닐을 뜯어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쥐었다.
많은 생각이 들면서 스트레스가 쌓인다. 수한이 담배를 입에 물려는 순간, 망설여졌다. 이왕 손 안 댄 거 계속 안 피우는 게 건강에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사 온 담배가 무색하게 담배 꽉 안에 다시 넣어 두었다.
하아- 입김을 불자 하얀 연기가 휘날렸다. 날씨가 추워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을 체감하며 수한은 과거로 돌아와 자신이 한 것이 무엇이 있나 떠올려 보았다.
‘나쁘지 않은 1년이긴 했네.’
오히려 너무 조급하게 굴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남일과 척을 진 것 같기도 했다.
‘원래는 중소 기획사가 대형 기획사로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면서 배우려고 가온에 들어온 거였는데.’
다소 감정적이긴 하나, 주먹구구식의 경영 방식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체계가 있고, 서로가 맞물려 쳇바퀴가 잘 돌아갔다.
수한은 매니저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기에 대충 회사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파악하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많은 회사였다. 무엇보다 동료가 좋으니 일을 하는 데 있어 활력이 붙었다.
‘이토록 즐겁게 일한 건 또 오랜만이었지.’
명훈과 처음 기획사를 만들었을 때가 떠오르면서 수한은 그 당시 느꼈던 흥분을 떠올렸다. 그 흥분을 수한은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충분히 만끽했다.
‘그래. 분명 즐거웠는데…….’
남일이 말한 게 가슴에 콕 박혔다. 남일이 나름대로 자기 정당화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그게 설마 수한의 약한 부분일 줄은 수한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수한은 갑자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번 길을 잃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변했어.’
과거의 수한이라면 타협하지 않을 일들을 잘도 타협했다. 언제부터 수한이 악마의 편집 같은 걸 인정해 주었단 말인가? 물론 방송가에 대부분이 조작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판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작에 함께 한 게 옳으냐 싶으면 아니었다.
‘직접 돈을 주고,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지.’
스태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 게 있고, 그 노력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걸 수한이 가장 잘 알았다. 수한은 그 순간 기뻐했던 자신을 알았다.
‘무엇보다 소원 씨…….’
남일이 지적한 건 정확히 소원이었다. 소원이 선택한 길이라고 해도 그 슬픔을 이용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그 모든 순간이 수한의 발목을 잡았다.
명훈과 같이 되지 않을 거라 다짐했건만 그가 걸었던 길과 다를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제까지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수한은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도 그들과 크게 다른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그러므로 수한이 꿈꾸는 기획사는 더는 세울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수한에게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지금 내 손에 있을 게 담배가 아니라 술이네.’
누군가는 과거로 돌아와서 이것, 저것 혜택을 누리며 잘 산다는데 수한은 자신만 힘든 길을 걸어 개고생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도 틀린 것 같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수한은 금세 얼어붙은 몸에 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일러를 제대로 켜 두지 않아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바깥보다는 나았다. 수한은 기껏 산 담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요즘은 칼퇴근하는 날이 많아져서 청소할 여유가 생기니 방이 깨끗했다. 수한은 오랜만에 집 밥을 먹기 위해 냄비 밥을 했다. 집에서 밥을 꾸준히 먹으라고 전기밥솥을 부모님께서 사주셨지만, 역시 집보다는 회사에 더 오래 있기에 사용할 일이 없었다.
수한은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냈다. 그런데 얼마나 오래된 건지 뚜껑을 열자마자 신 냄새가 진동하였다. 김치가 익어도 너무 익었다.
“이러니까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가 생각나네.”
지금이 대학로 생활보다 나은 건 돈벌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다. 대학로 연극 배우 시절에는 돈 한 푼 손에 쥐는 게 힘들었다.
매니저라는 직업이 박봉인데도 좋은 건 꾸준한 수입이 있다는 거다. 박봉이라도 매달 같은 금액이 들어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수입이 불안정한 사람들만 알았다.
‘사실 돈을 벌려고 했으면 이 직업군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만…….’
차라리 중소기업에 취직하는 게 매니저 일보다 돈을 더 벌지도 모르겠다. 수한은 냄비 밥이 잘 익은 것을 확인한 뒤 밥을 그릇에 퍼서 접이식 밥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뚜껑으로 다시 덮어 둔 김치를 밥 위에 얹어서 먹었다. 동시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무 시다.’
이런 김치는 김치찌개에 적합하다며 잔소리하던 어머니가 문득 떠올랐다. 부모님을 떠올리자 수한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삶에 있어 목표가 중요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대학로 시절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부모님께 효도 하나 못 하는 지금이 얼마나 한심스럽게 느껴지는지 수한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가고 싶었던 길이 이제는 갈 수 없는 길이라면 다른 길을 찾아 떠나면 된다.
수한은 김치 특유의 신맛을 삼키고는 의지를 다잡았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한의 부모님은 수한만 걱정했다. 그 걱정이 수한에게는 힘이 되었다.
***
“실장님! 어제 퇴근 안 하셨어요?”
“너무 늦게 일이 끝나서 사무실에서 잤어.”
“너무 일을 과하게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아휴. 알면 좀 도와주든가.”
“저도 일이 많아서요.”
재원의 어색한 웃음에 성민은 기대도 안 했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꼈다. 어느새 성민의 시선이 수한의 자리로 갔다. 잠시 자리를 비운 건지 수한의 자리가 비어 있다. 사실 수한만 있어도 어느 정도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일의 고집을 성민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새로 바뀐 담당이 또 다른 부서인 건 뭐야.’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 금방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텐데 다른 사무실이다 보니 찾아가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다고 텍스트로만 말을 주고받기에는 서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일이 많아서 성민은 짜증이 많이 났다. 수한이라면 한 번에 알아들었을 텐데…….
“고주혁 일은 잘 해결됐어요?”
“그래.”
성민은 미성년자라는 말에 씁쓸하게 웃던 고주혁을 떠올리며 미안해했다. 그러면서도 마실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고주혁을 보고 있으니 심란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남일에게 뛰쳐 간 수한을 이해하였다.
‘내 나름대로 복수를 하긴 했는데…….’
남일을 만날 때마다 짜증 유발을 제대로 했다. 남일은 다른 건 몰라도 수한과 엘 엔터테인먼트에 한해서 화를 잘 냈다. 일부러 건드린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남일이 더는 성민을 찾지 않아 성민은 크게 아쉬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번에 봤을 때 더 긁어 놨어야 했다.
“어?”
탕비실에 다녀온 건지 종이컵에 커피를 타 온 수한이 보였다. 사실 성민은 남일보다 수한이 훨씬 신경 쓰였다. 그 이후로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따로 만나자고 해도 거절하고.’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는데 시종일관 웃고 있어서 성민은 수한이 미친 건가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김수한이. 미친 거 아니지?”
“네? 미친 건 실장님 아닙니까?”
수한의 황당해하는 얼굴에 성민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 성민이 아는 수한이었다.
성민은 장난한 거라고 말하며 수한의 자리를 살폈다. 아까는 자세히 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책상 위에 수첩 하나가 올라와 있다.
“너 다이어리 같은 거 써?”
“그냥 메모용으로 쓰고 있습니다.”
수한의 여유 있으면서도 자유로워 보이는 분위기에 성민은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못 하겠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남일이 수한에게 난리 친 원인 말이다.
‘엘 엔터테인먼트.’
남일이 싫어하는 두 사람이 그 일이 있었던 이후로 또 만났다는 소식을 남일을 통해 들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남일이 그래서 고주혁의 일을 그런 식으로 처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고주혁은 김수한의 성과니까.’
지훈의 곡을 빼앗아서 고주혁에게 주려고 했으면서도 고주혁이 수한을 통해 성공적으로 데뷔하자 이제는 남일의 심기를 거슬리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이런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수한을 통해 만난 남일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성민은 엘 엔터테인먼트가 다시 이직 제안을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 수한에게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수한아, 너 혹시 이직 준비해?”
수한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건만 어떻게 들은 건지 사무실 내에 있는 매니저들의 허리가 바짝 세워졌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성민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이직이 아니라 퇴사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