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눈에 탑스타-87화 (87/186)

087   8. 과도기

한번 와 본 적이 있다고 금세 적응하는 건 수한이 생각해도 웃긴 일이었다. 수한은 전과 다르게 바로 옆에서 대기하는 남자를 보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명훈이 수한의 소식을 알 정도이니 강우형이 모를 리가 없었다.

강우형은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특유의 카리스마를 놓지 않았다.

“시간 내줘서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근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수한이 기대감이 찬 눈빛을 보이자 강우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요즘 회사에서 힘들게 지낸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일이 줄어드니 오히려 마음이 편합니다.”

수한이 전혀 욕심 없는 사람처럼 순진한 미소를 짓자 강우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런 데서 자존심을 세우는 수한이 어리석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게 있어서 그런 건지 강우형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김수한 씨.”

“네, 이사님.”

“돌려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 건 조건은 유지하겠습니다. 엘 엔터테인먼트로 오는 건 어떻습니까?”

강우형이 먼저 시원하게 본 화제를 꺼내니 수한의 속도 시원했다. 게다가 조건까지 유지해 준다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저한테 이런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김수한 씨가 마음에 들어서요.”

담백하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수한이 신중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매만지고 있자 옆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존재감이 없던 그가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김수한 씨가 원한다면 가온에 속해 있는 연예인을 데려오는 것에도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강우형이 남자에게 빠르게 눈치를 주었다. 강우형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한 일이었으나, 남자는 자신이 실수한 걸 금세 알아챘다. 그러나 남자는 달리 강우형의 손발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뻔뻔하게 수한을 봤다. 물론 수한은 모른 척하면서도 그 광경을 다 보고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뭔가 있을 줄 알았어.’

결국, 수한을 기반으로 가온에서 현재 잘나가고 있는 연예인을 빼내겠다는 속셈이었다. 수한이 명훈에게 당했던 때와 같았다. 그 제안이 설마 수한에게 올 줄 몰랐기에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하긴 나 하나만으로는 조건이 과하긴 했어.’

오히려 말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수한에게 내건 조건은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오히려 저렴하게 연예인들을 끌고 오는 것이니 엘 엔터테인먼트로서는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잘못하면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수 있으니 수한에게는 더욱더 좋은 제안이 아니었다.

‘배신자의 말로는 뻔하지.’

수한이 고민을 마쳤다는 의미로 고개를 들자 강우형이 호감 섞인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죄송하지만, 생각을 조금 더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당연히 넘어갈 줄 알았을 거다. 수한은 그런 남자를 스치듯이 보고는 이번에는 강우형을 봤다.

“게다가 저를 몰아붙인 분 밑에서 일하기에는 부족한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엘 엔터테인먼트가 간절하지 않습니다.”

돌려서 말했음에도 강우형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그리고 수한이 남자의 말실수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웃어버렸다.

“알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조건도 다시 검토하죠.”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강우형이 의아하게 수한을 보자 수한이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똑바로 강우형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전투력이 넘치는 눈빛에 강우형은 진심으로 수한을 보며 감탄했다. 강우형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사람은 수한이 처음이다. 그래서 강우형은 왜 남일이 수한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남일이 품기에는 수한의 그릇이 더 크다. 그래서 강우형은 수한의 경고를 듣고 웃게 되었다.

“명심하죠.”

수한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그 당당한 태도는 몇 번을 봐도 강우형의 마음에 쏙 들었다.

***

‘조용하네.’

수한은 그 경고가 먹힐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온몸으로 긴장하며 남일이 어떻게 습격할지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준비가 무색하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사무실은 어찌나 조용한지 수한은 이 사무실에 혼자 있는 건가 싶어 괜히 고개를 돌렸다.

“김수한, 심심하면 일정표 정리나 할래?”

성민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수한은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그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복잡하게 되어있는 일정표를 정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주혁 씨 일정은 다 취소됐네.’

지금 같은 시기에 예능에 나가면 테러 관련 질문을 받을 테니 조심하는 게 나았다. 물론 이 정도는 제작진과 말을 맞출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고주혁의 피로도가 이미 높은 상태였다. 수한은 이어서 다른 사람들의 일정을 보았다. 시은 말고는 다들 한가하였다.

‘지금쯤이면 한창 대본 리딩 중이겠네.’

오늘 잡혀있는 1차 대본 리딩 일정을 보며 수한은 책상 위로 볼펜을 굴렸다.

수한은 시은도 궁금했지만, 사실 유지아 작가가 더 궁금했다. 그 소심한 성격으로 연기 지도를 어떻게 할까 상상이 되지 않아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한은 현장의 현자도 말할 수 없었다. 이게 다 남일 때문이다. 그 순간, 옆에서 성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대표님. 안으로 가겠습니다.”

남일이 성민을 대표실로 불렀는지 성민이 불편한 얼굴로 사무실에서 나갔다. 또 무슨 일로 저러는 걸까. 수한은 일정표를 보기 좋게 마저 정리하다가 소원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온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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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우리 작업하던 음악은 마저 하면 안 돼요? 그것도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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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당연히 안 된다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멈칫했다.

‘근데 이게 왜 안 되는 일이지?’

어차피 작곡가 에이치는 남일 몰래 소원과 단둘이서 하는 프로젝트다. 이건 수한과 소원, 단둘밖에 모르는 거라서 수한은 생각의 전환을 해 보기로 했다.

‘이 기회에 내 능력을 제대로 개발해 보자.’

소원뿐만이 아니라 유지아 작가와의 작업으로 수한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요령도 생겼다. 그 생각을 하자 재미있겠다는 흥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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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이 비밀은 우리 둘만 가지고 가야 합니다.]

[당연하죠. 오빠 도움이 없으면 저도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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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은 이 말이 빈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수한이 관여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곡의 질이 달라졌다. 그런 비슷한 이유로 유지아 작가도 수한의 도움을 계속 원하는 거였다. 그나마 거의 마무리해 가는 단계여서 수한의 도움이 필요 없지만, 혹시 또 몰라 수한은 유지아 작가의 연락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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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메일로 보낼게요.]

[이건 회사 메일로 말고, 개인 메일로 보내 주세요.]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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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면 척이다. 수한은 담당한 연예인 중에 가장 마음이 맞는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소원을 고를 것이다. 소원과 여러 작업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게 되었다. 물론 수한은 지극히 대중적 취향이지만, 그래서 소원에게 더 도움을 주었다.

‘이번 곡도 좋네.’

어디서 영감을 얻는 건지 못 들어본 스타일의 음악이다. 수한은 메일에 쓰인 내용에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개봉한 사극 영화를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수한은 본 적이 없는 영화이기에 소원 보낸 음악으로 영화의 느낌을 추측해 보았다.

암울하면서도 비극적인 게 듣기만 해도 슬픈 감정을 일으킨다.

‘능력치가 나쁘지는 않지만, 보완해야 할 게 많네. 퇴근 후에 영화도 봐야겠다.’

영화를 봐야 소원이 정확히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한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수한을 위로하는 연예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소원에게 감사하는 건 수한에게 해야 할 일을 주었다는 것이다.

‘할 일이 생기니까 좋기는 하네.’

수한 스스로는 일 중독자라 생각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는 완벽한 일 중독자였다. 하는 일마다 성과가 눈에 보이니 일이 재미있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한아.”

언제 돌아온 건지 성민이 심각한 얼굴로 수한을 불렀다. 더 나빠질 게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수한이 의아해하며 성민에게 다가가자 성민이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더 나빠질 게 있긴 하구나.’

수한이 어서 말해 보라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성민의 체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께서 스토커 일 덮자고 하시네.”

“네?”

설마 그런 쪽으로 뒤통수를 칠 줄 몰랐기에 수한은 깜짝 놀라다 못해 당황했다. 그리고 사실 확인을 위해 정신없이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수한아! 김수한! 너 어디 가!”

뒤에서 수한을 부르며 쫓아오는 성민의 소리가 들렸지만, 수한은 그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지금은 사실 확인이 먼저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다른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사람이 죽을 뻔한 일이다.

‘그걸 덮자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수한은 성민이 남일의 말을 잘못 듣고 오해했을 거라 믿었다. 수한은 급한 마음에 들어갈 거라는 알림도 없이 무작정 대표실 문을 열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수한을 부르는 성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일은 통화하던 중이었는지 수화기를 붙든 채 놀란 눈으로 수한을 봤다.

“잠시만, 조금 이따가 전화 드리겠습니다.”

남일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안 수한은 어느새 그의 앞에 섰다. 남일은 그런 수한을 같잖다는 듯이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고주혁 씨 일을 덮자는 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덮자는 거지.”

“그 말은 선처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래.”

남일은 수한의 바르르 떨리는 주먹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한이 이리 흥분하는 건 처음 봤기 때문에 일종의 희열이 생겼다. 열등감에 비롯된 어긋난 희열이었다.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한 번 한 거 두 번은 못하겠습니까?”

“글쎄 이 이야기는 못 들었나 보네. 스토킹한 친구 학생이야. 미성년자라고. 아무리 무겁게 처벌하려고 해도 법정에서는 미성년자라 봐줄 수밖에 없다고. 어차피 결과야 뻔하잖아. 그럴 바에야 선처해 주는 게 고주혁에게도, 우리 회사 이미지에도 좋지 않겠어?”

수한은 소름이 돋았다. 남일의 머릿속에는 그저 이 일을 어떻게 이용해야 좋은지 계산하는 돈 귀신만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철저히 상품으로만 보고 있었다. 고주혁의 상처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듯했다.

수한의 눈빛 안에 깃든 혐오의 감정을 발견한 남일은 어처구니없어서 웃었다.

“날 그렇게 보지 말라고. 너도 똑같이 그랬으면서 나만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건 웃기는 일 아닌가?”

“네?”

“그동안 네가 해 온 일이 그랬잖아. 잘 생각해 보라고.”

당장에라도 분노를 쏟아 내려고 했던 수한에게 그 말은 뒤통수를 세게 치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수한의 분노가 급속도로 가라앉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차가운 공기만 돌았다. 뒤늦게 들어온 성민만 어리둥절해하며 상황을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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