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8. 과도기
“김수한!”
“네! 실장님!”
“가자!”
설마 이런 상황에서 수한을 부를 줄 몰랐기 때문에 수한은 차 키를 챙겨서 급하게 내려갔다. 수한이 운전대를 잡자 성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해하는 감정이 다 느껴져서 수한 또한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팬이 음료수를 줬는데 그 음료에 접착제가 들어갔어.”
수한은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접착제라니, 이건 죽으라고 넣은 게 아닌가? 수한은 그 스토커가 했을 거라 추정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이상한 사람이 또 있다는 건데 그거만큼 소름 돋을 일이 없다.
“그래서 고주혁 씨는요?”
“다행히 맛보자마자 뱉어서 괜찮다는데 정말 괜찮은지는 병원에 가야 알겠지.”
“그 테러범은요?”
“잡았다는데 그 스토커 같아.”
수한은 운전대를 주먹으로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냈다. 좋아한다면서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고 보니 돌아오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그때 표적은 고주혁이 아니라 남자 아이돌이었다.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하고 넘어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면서 수한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조금 더 조심하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너무 가볍게 말하고 지나쳤다. 수한은 후회가 되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수한이 병원 앞에서 차를 세우자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병원에 모였다. 수한은 그 안을 열심히 파고드는 성민을 본 뒤 주차를 했다.
수한이 핸드폰을 확인하니 다행히 성민이 고주혁의 병실 번호를 문자로 보내 놓았다. 그래서 병실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수한이 병실 문을 열자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원이 서 있는데도 취재를 하겠다며 달려드는 기자들 때문이었다. 수한은 사람이 아픈데도 저리 난리 치는 기자들을 못마땅하게 본 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병실 안에 고주혁은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었다. 수한은 그래도 건강해 보이는 낯빛에 살짝 안심하였다. 그래도 결과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서 수한은 긴장한 상태로 성민을 쳐다봤다.
“들어오기 전에 의사 봤는데 괜찮대. 근데 당분간은 목을 쓰지 않는 게 좋겠대.”
“다행입니다.”
수한이 힘없이 벽을 붙잡았다. 십 년 감수했다. 물론 그 이유로 앨범 활동은 연기하게 되겠지만, 목을 아예 못 쓰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 있는 고주혁을 보자 마침 고주혁이 눈뜨는 게 보였다.
“고주혁 씨!”
“수한 형.”
고주혁이 미소를 지으며 수한을 반가워했다. 지금이 이럴 때인가 싶었지만, 고주혁은 진심으로 수한이 반가웠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른 연습생들과 연락하면서 수한의 상황을 들었기 때문에 고주혁도 수한을 걱정하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목이 조금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확실히 목소리가 평소에 내던 좋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살짝 갈라져서 텁텁했다. 수한은 그 스토커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럴 땐 굳이 사람 좋은 척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고주혁은 그랬다. 수한은 사람이 좋은 건 나쁘지 않다고 여겼으나, 그로 인해 스토커를 봐주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봐줄 생각은 없거든요.”
“알겠습니다. 들으셨죠? 실장님?”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고. 걱정하지 마.”
이런 일이 생기면 기획사에서는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기 때문에 대충 봐주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수한도 그렇고, 성민까지도 절대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은 사람을 해한 일이다. 악플도 악질이지만, 이처럼 직접 해를 가하는 것만큼은 아니다. 아니다. 둘 다 끔찍한 일이다.
“난 홍보팀에 전화하고 올 테니까 여기 있어 봐.”
“네. 다녀오십시오.”
성민이 나간 사이에 수한은 병실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1인실에 입원한 덕분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주혁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1인실에도 입원해 보고 신기하네요. 이런 건 돈 많은 사람이나 가능한 일인 줄 알았는데.”
“좋게 입원한 거 아니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네…….”
그러면서도 신기해하는 게 느껴져서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왔다. 하여튼 간에 답이 없었다.
“앨범은 미뤄지는 거죠?”
“네. 의사가 당분간 목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형 말 좀 잘 들을 걸 그랬어요. 팬이 준 거라서 너무 덥석 받아먹었네요.”
수한은 고주혁의 시선 너머로 보이는 물통에 고주혁이 불안해하는 걸 발견했다. 그랬다. 이제부터 고주혁은 모든 마실 것에서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수한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해서.”
“아니에요. 형은 최선을 다했어요.”
“굳이 밝은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한이 고주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고주혁의 밝았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한의 말이 고주혁을 무너뜨렸다. 솔직히 말해 억울해하는 게 당연했다. 이게 연예인의 삶이었다. 호의가 악의로 바뀌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악의가 호의로 변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수한은 조용히 우는 고주혁을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오는 성민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고주혁의 흐느끼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면서 수한은 성민과 함께 병실에서 나왔다. 밖에서는 여전히 기자들이 경호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저 인간들은 귀신이 왜 안 잡아가나 몰라.”
수한은 그 와중에 온 메시지 하나에 쓰게 웃었다. 이서영 기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내용은 저기 있는 기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서영 기자가 그나마 나은 건 저렇게 현장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는 거다.
***
“하나같이 쓰레기네.”
고주혁에 관한 기사를 본 성민이 한 말이었다. 어찌나 자극적인 말만 쏟아 내던지 고주혁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수한과 안면을 튼 이서영 기자가 덜 자극적으로 썼지만, 그런 게 대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었다. 대중은 무조건 자극적인 걸 찾으니까.
“역시 나는 억만금을 줘도 연예인은 못하겠어.”
“누가 실장님께 억만금을 준답니까?”
수한이 가볍게 농담을 걸자 성민이 어이없어했다. 수한은 알면서도 매번 공격당하는 성민이 웃겼다.
다행히 고주혁은 얼마 안 가 퇴원했다. 더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병원은 불편하고 재미없다면서 고주혁이 먼저 나가고 싶은 의사를 밝혔다. 그래서 고주혁은 현재 집에서 휴식 중이었다. 경호원은 지난번보다 더 많이 세워 경계를 강화했다.
“수한아, 심부름 좀 시켜도 되냐?”
“물론입니다. 시키십시오.”
수한의 손에 서류 봉투가 잡혔다. 보통은 우체국을 직접 부르기도 하지만, 그건 보내야 할 게 많을 때였다. 어차피 우체국이 멀지 않으니 수한이 직접 다녀오기로 했다. 수한은 이왕 나가는 김에 바깥바람이나 실컷 쐬고 오기로 했다. 어차피 할 일이 없었다.
‘이런 걸 월급 도둑이라고 하나?’
남들 다 하는 월급 도둑을 이런 식으로라도 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면 좋았다. 한편으로 씁쓸하기도 했고. 어차피 고주혁의 일에서 물러나야 하긴 했으나,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하늘 한번 파랗네.’
나중에는 못 볼 하늘이니 수한은 실컷 봐 두기로 했다. 미세 먼지 없는 하늘은 끝내주게 좋았다. 이런 하늘을 쉽게 못 보게 될 거라고 이때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다.
‘와, 사람이 많네.’
근무 시간인데도 사람이 많아서 수한은 번호표를 뽑아놓고 자리에 앉았다.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뒤통수가 보였다. 수한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뒤통수가 돌아가면서 아는 얼굴로 바뀌었다. 최명훈이다.
‘설마 이런 데서 만날 줄 몰랐는데…….’
만난다면 방송국에서 볼 줄 알았다. 명훈을 알아본 수한과 다르게 명훈은 보지 못했는지 제 볼일을 마친 뒤 먼저 나가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었다.
수한은 바뀐 번호를 보고 앞으로 가서 서류를 보냈다. 그러고 나서 우체국 밖으로 나오는데 누군가 갑작스레 수한의 팔을 잡았다. 수한이 고개를 돌리자 간 줄 알았던 명훈이 수한의 팔을 잡았다.
“오랜만이다?”
설마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수한은 매우 놀랐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인사했다.
“선배님, 오랜만입니다.”
수한이 깍듯하게 인사해도 명훈은 누구 때문에 가온 엔터테인먼트에서 쫓겨났는지 기억했다. 거기다가 수한이 얼마나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알아서 수한의 가식적인 인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오랜만이긴 하지. 그 회사에서 나가니까 이젠 내가 선배이긴 한가 봐.”
대놓고 적의를 보내고 있어 수한은 상대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만약 사람 좋은 척을 했다면 헷갈릴 뻔했다.
“대학로에서의 인연을 잊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나도 그래.”
당장에라도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게 보였다. 수한은 차라리 강우형보다는 이런 상대가 상대하기 쉽다고 생각했다.
수한이 담담하게 명훈을 보고 있자 명훈도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더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맞아. 네 소식 들었어.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너 탐낸다며?”
대체 그런 소문은 어디서 나는 건지 수한은 알 수 없었다. 정작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연락이 없는데 말이다. 수한은 강우형이 자신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린 게 아닌가 짐작했다.
“헛소문입니다.”
“그건 나중에 가 봐야 알겠지. 근데 말이야. 내가 그 소식만 들은 게 아니거든.”
“다른 소식도 있습니까?”
“대표님이 너 견제한다며. 그 인간도 참 변한 게 없단 말이야. 자기 열등감을 누구한테 푸는 건지.”
수한은 남일을 대놓고 무시하는 명훈을 보며 웃음이 나올 뻔했다. 누가 누굴 비웃는단 말인가? 수한이 보기에 남일과 명훈은 비슷한 사람이다. 그나마 남일이 더 나은 건 자기 기획사라도 가졌다는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엘 엔터에는 가지 말라고. 그 판을 짠 게 강우형 대표 이사니까. 나라면 날 몰아붙인 사람과 손을 잡고 싶지는 않을 것 같거든.”
수한은 다 아는 사실을 이렇게 얄밉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간 멈칫하게 되었다.
“근데 그걸 왜 알려 주시는 겁니까?”
“대학로의 인연 안 잊었다고 말했잖아. 그거뿐이야.”
명훈은 그 말을 끝으로 먼저 가겠다며 가 버렸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다가 묘하게 사악했던 명훈의 눈빛을 떠올리고는 수한은 기가 차서 웃었다.
선의 같지만, 선의를 포장한 악의였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구나. 그러니까 엘 엔터테인먼트에 가지 말라고?’
자기라면 안 가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제안이 들어오면 누구보다 갈 사람이 명훈이다. 그만큼 엘 엔터테인먼트는 매력적인 회사였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조언을 가장해 방해하는 건 질이 나빴다.
‘굳이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어차피 수한은 엘 엔터테인먼트에 갈 생각이 없었다. 고인 물 안에 들어가 봤자 고인 물밖에 더 되겠는가? 다만 엘 엔터테인먼트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또 이런 식으로 방해를 했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수한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봤다.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어디에서 온 건지 알았다.
“네, 가온 엔터테인먼트의 김수한입니다.”
[강우형입니다. 김수한 씨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습니다.]
이제야 전화를 준 걸 보니 수한의 애를 제대로 태우려던 심산이었다. 수한은 여유롭게 웃었다. 일단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