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8. 과도기
수한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민을 보며 괜찮다고 웃었지만,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현재 상황에서 나은 점은 고주혁의 앨범에 넣을 곡이 확정되었다는 거고, 시은이 들어가는 ‘로맨스는 없었다’도 잘 진행되고 있다는 거다.
수한이 빠져도 이제는 괜찮은 단계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가 대표님 기분이 좋을 때 다시 말해 볼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한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성민은 느낌이 좋지 않았는지 수한에게 미련을 가졌다. 수한은 그런 성민을 향해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마음은 착잡했다.
‘일단은 유지영 씨한테 이 소식을 전해야겠지.’
수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유지영에게 연락하였다. 남일에게 들킨 이상 더는 유지아 작가와 작업을 진행하는 건 힘들었다. 또 걸리면 그때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수한이 전화를 걸자 유지영이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네?”
[인제 보니 거기 대표님 되게 이상한 사람이네요.]
유지영은 수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부터 냈다. 유지영은 대놓고 다혈질이었다. 수한은 유지영과 유지아 작가가 섞이면 아주 이상적인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것과 별개로 유지영은 심각한 말을 해 왔다.
[솔직히 김수한 씨 때문에 가온과 진행하는 건데 거기 대표님 보니까 생각이 바뀌네요. 이렇게 감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죠?]
“큰돈이 걸려 있어서 예민해지신 모양입니다.”
[아무리 예민해도 일 잘하는 직원한테 누가 그렇게 대해요? 보통 사람이라면 안 그래요.]
수한은 쓰게 웃다가 유지영의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성민도 똑같이 말했다. 수한도 한 기획사의 대표 자리를 맡은 적이 있기에 되도록 남일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묻는다면 아니었다.
아무리 수한이 제멋대로 한다고 해도 그게 회사를 위한 일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남일이 수한을 뒤로 빼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말 하는 거 실례인 거 아는데 그 회사에 오래 있는 거 좋지 않을 것 같아요. 김수한 씨한테는.]
가온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대표서부터 이런 식으로 견제하는 건 수한에게 확실히 방해되었다. 수한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 말을 삼자에게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까지 바보짓 한 기분이었다.
‘그래. 굳이 내가 여기서 참을 필요가 뭐가 있어?’
순간적으로 이 회사에서 뛰쳐나간 명훈이 생각났지만, 명훈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수한은 이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동료가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다. 유지영과 전화를 마치고 나자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란해졌다. 오히려 생각이 많아졌다.
“김수한.”
수한은 갑자기 불린 이름에 고개를 들었다가 성민과 종종 나가서 마셨던 커피가 앞에 턱 하니 놓인 것을 보고 웃었다. 성민의 얼굴을 보자 솟아올랐던 화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뇌물입니까?”
“뇌물은 무슨. 우리 대표님 좀 잘 봐달라는 거지.”
성민이 좋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다 보니 감쌀 수밖에 없다. 만약 성민에게 수한과 남일, 둘 중에 고르라고 하면 성민은 고민은 할지언정 결국은 남일을 택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가족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었다.
“제가 봐드릴 게 있나요. 저야말로 더는 눈 밖에 나지 않게 조심해야죠.”
수한은 커피를 마시면서도 입안이 자꾸만 썼다. 본래 달콤함으로 행복감을 안겨 주던 맛이었는데 그건 주어진 상황이 맛보게 하는 달콤함이었나 보다. 지금은 이보다 쓰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알겠으니 너무 제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할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저까지 빠지게 되었으니.”
수한이 하던 일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다음 담당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성민은 불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누구보다 수한이 그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힘내라면서 응원을 해 주었다. 성민은 수한의 그 모습에 겨우 안심했는지 웃으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엘 엔터테인먼트라…….’
강우형이 이런 식으로 나섰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되니까 안 흔들릴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수한은 마음을 차분하게 먹으며 업무 메일을 보다가 고주혁의 스토커가 보낸 메일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은 전혀 해결이 안 되었다.
수한은 일단은 내용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수한이 메일을 클릭하기가 무섭게 징그러운 사진들이 화면에 나열되었다.
‘미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을 이런 데서 사용해야 할까? 이 스토커는 질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자기 자해 사진을 대체 왜 보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한은 실눈을 뜨며 사진을 보다가 마지막에 고주혁이 방에서 자는 사진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장님!”
“어? 왜?”
수한의 다급한 부름에 성민이 달려와서 사진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스토커가 결국에는 고주혁의 개인 공간에도 침범했다. 선을 넘어 버린 모습에 성민은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거는 상대는 경찰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수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순돌이가 꼬리를 흔들면서 현관문까지 달려왔다. 수한은 예뻐해 달라고 발버둥을 치는 순돌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반가워하는 예진을 발견했다.
“뭐 마실래?”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원래라면 이것저것 가져다주지 않을 예진인데 묘하게 태도가 부드러웠다. 수한은 또 재원이 예진에게 뭔가를 말했나 싶어 신경이 쓰였다. 예진은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내가 보낸 홍삼은 잘 챙겨 먹고 있어?”
“그럼요. 덕분에 요즘 체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게다가 하는 일까지 줄어들어 운동할 시간까지 생겼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 입 안이 쓴지 모르겠다. 수한은 오렌지 주스가 쓴 건가 싶어 유리잔을 들었다가 자신보다 더 심각해진 예진의 얼굴에 웃어 버렸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이야기 들었어.”
“재원 선배님 못 쓰겠네요. 입이 너무 가볍습니다.”
“나한테만 가벼우니까 괜찮아.”
수한은 이 와중에도 재원을 감싸는 예진을 보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엄청 감쌌다. 팬들도 예진의 이런 점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든 잘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표한테 말해 볼까?”
“예진 씨,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 안 나십니까?”
수한은 제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미는 예진이 귀엽게 느껴졌다.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수한에게도 정을 줬을지 몰랐기 때문에 수한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이렇게 와도 돼?”
“괜찮습니다. 일이 없거든요.”
예진을 제외하고는 다 빼 버렸다. 남일도 예진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가장 힘든 예진만 남겨 두고 다 담당자를 바꿨다. 그에 가장 크게 반발한 게 소원이지만, 소원은 수한이 설득하였다. 이 타이밍에 계약 해지해서 소원에게 좋을 게 없다.
‘그 양반 성격이면 그냥 나가게 놔두지도 않을 테니까.’
홍보팀이 어떻게 일하는지 봤기 때문에 수한은 소원이 나가도 계약 기간 마치고 나가길 바랐다. 소원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했지만, 수한은 괜찮다고 몇 번이나 다독여 주었다.
문제는 지훈인데 성민이 특별히 신경 써 준다고 하여 수한은 안심하기로 했다. 남일은 믿지 못하지만, 성민은 믿었다.
수한은 예진까지 자신을 걱정해 주자 매니저 인생 헛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가운데 예진은 뜬금없는 소리를 해 왔다.
“엘, 거기로 가.”
“네? 갑자기요?”
“거기서 이직 제안했다며. 대형 기획사니까 여기보다는 나을 거 아냐.”
수한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수한도 고민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엘 엔터테인먼트에서는 그 이후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만약 엘 엔터테인먼트에서 먼저 연락을 했다면 수한은 바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아 수한은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 망할 회사에 내 발로 걸어가는 건 아니지.’
그래도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라서 수한은 여지만 남겨 두기로 했다.
“예진 씨가 그런 말을 해 주니까 너무 좋네요.”
“너 좋아하라고 한 말 아니거든?”
“네.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봐야 할 대본은 어디 있습니까?”
수한이 예진의 집에 오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예진이 우물쭈물하기만 할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수한이 설마 하며 예진을 보자 예진이 결국 숨기지 못하고 말해 버렸다.
“그냥. 놀다 가라고 불렀어.”
수한이 풋- 소리는 내며 웃자 예진이 수한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따라서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핑계가 너무 어이없었다.
“감사합니다.”
“속상해할까 봐 그런 거야.”
“네.”
수한이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절제하지 못하자 예진이 순돌이 옷을 가져왔다. 하나하나 입혀서 사진을 찍을 생각인지 간절하게 수한을 봤다. 여전히 옷을 거부하는 건지 순돌이는 옷을 가져오자마자 수한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상 그 옷을 입힐 사람이 수한인데도 말이다.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텅 빈 것 같기도 했다. 수한은 쓰게 웃다가 속상해하는 예진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수한은 재원에게서 대본을 받아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보니 다들 바빠 보였다. 이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여유 있는 사람이 수한이기에 수한은 예진을 위해 차기작 대본을 골라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아무리 남일이라도 이런 일까지 관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수한은 한꺼번에 보이는 대본들의 능력치에 고개를 저었다. 이 중에서 고를 만한 게 없다. 역시 좋은 작품은 매번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러니까 암흑기도 있는 거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재미있는 작품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부흥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한 해만으로는 드라마 판을 판단할 수가 없다.
수한은 대본을 다 본 뒤에 원래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이렇게 보다 보면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 믿었다.
수한은 예진과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이름에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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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혁]
[고주혁 테러]
[고주혁 사생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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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나오는 단어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수한은 단어를 부르고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하였다.
‘고주혁 씨가 테러를 당했다고?’
그와 함께 사무실에 있는 전화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동시에 울린 적은 시은의 스캔들 이후로 처음이기에 수한은 다급하게 성민을 봤다.
성민은 이미 보고를 받았는지 심각한 표정이었다.